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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직장 내 성폭력…"위력은 말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공기 같은 것"

신임 변호사 '미투'…"대표가 지속적 성폭력" <br> 대표 측 "합의된 관계" 주장…송치 전 극단 선택 <br> 피해자 대리인 이은의 변호사 인터뷰

서울 서초동에서 그제(26일) 한 로펌 대표변호사 A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지난 12월부터 경찰 수사를 받고 있었습니다. 같은 사무실 20대 신임 변호사를 수차례 추행하고 성폭행한 혐의입니다. 수사는 마무리됐고 송치를 앞두고 있던 상황.

이 사실은 지난 24일 한 언론 보도(오마이뉴스, [단독]"법조계 민낯" 어느 초임 변호사의 '미투')를 통해 처음 알려졌습니다. 평판이 중요한 폐쇄적인 변호사 업계에서 나온 첫 '미투' 사건인 만큼 피해자 측 변호사를 만나 당시 상황을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인터뷰 가는 도중 A 씨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제 사법 절차를 통해 피해자가 받은 상처를 회복할 길은 사라지게 됐습니다. 경찰 수사는 멈추겠지만, 막 시작한 법조 경력, 2차 피해의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과 비슷한 일을 겪을 수도 있는 동료, 후배들을 위해 고소를 결심했다"는 피해자 뜻에 따라 법조계에 상존하는 '위력 관계'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피해자 측 이은의 변호사(이은의법률사무소)의 인터뷰를 싣습니다.

이 변호사는 그 스스로가 대기업에서 성희롱 피해를 겪고 이에 맞서다 퇴사한 뒤, 성범죄 피해자, 갑질 피해자 등의 법률 대리인으로 주로 활동하고 있는 법조인입니다.


김민정 취파용

Q. 피해자는 어떤 상황인가요? 2차 가해 우려는 없는지?
"피해자는 굉장히 큰 충격을 받은 상태입니다. 어렵게 용기를 냈는데 피해자로서 법적 절차에 따라 피해 회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다 날아가 버린 거고요. 업계에 남아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피해자 신분도 비공개로 했고 피의자 신원도 철저히 함구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피해 당사자가 누군지 유추될 수 있는 상황이 됐기 때문에 2차 가해 우려도 제기됩니다."

Q. 수사는 어떤 단계였나?
"지난 12월 고소한 뒤 6개월 가까이 수사가 진행된 상태였습니다. 피해자 조사, 피의자 조사, 참고인 조사까지 모두 마무리되고 송치를 앞두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최종 법리 적용을 검토하던 단계였다고 합니다. 지난 3월 피의자 측에서 합의하고 싶다는 연락이 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혐의를 인정하는 거냐'는 질문에 '그건 아니고 도의적으로 사과하고 싶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피해자는 애초에 합의를 바라고 고소를 한 게 아니라 사법 절차를 통해 피해 회복을 하고 싶었던 것이기 때문에 응할 의향이 없다는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성폭력 범죄는 크게 두 가지 쟁점으로 다투게 됩니다. 첫째는 행위가 있었는지, 둘째는 강압성 여부입니다. 특히 두 번째 쟁점이 첨예한데, 행위를 부인할 수 없을 땐 "합의했다", "안 했다"가 공방의 핵심이 됩니다. 이 둘을 가르는 게 바로 강압성입니다. 강압성을 따질 때 현행법상 강간죄를 물으려면 물리적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만 됩니다. 한 마디로, 저항하다 두들겨 맞거나 협박을 당해야만 현행 법체계에서 '합의하지 않은 관계'로 인정된단 겁니다.

이는 피해자가 물리적 저항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를 전혀 설명하지 못합니다. 피해자가 장애인일 때, 미성년자일 때, 혹은 동등한 성인이더라도 한쪽이 우월적 지위에 있는 상황일 때를 말합니다. 우리 법은 그래서 이 각각에 대해 폭력과 협박 없이도 강압성을 인정하는 별도 법 조항을 두고 있습니다. 특히 업무, 고용 관계에 있는 피감독인에 대해 위력을 행사해 성폭행을 했을 때도 가해자를 처벌할 수가 있습니다.

이 위력이 말이나 행동으로 직접 행사되어야 하느냐, 아니면 피해자의 자유의지를 제압하는 유무형의 지위와 권세 그 자체를 곧 위력으로 보느냐. 사법부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 대한 대법원 확정 판결과 그 전후 일련의 판결들을 통해 후자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안도 법정으로 간다면 변호사 업계에서 신임 변호사에 대한 대표 변호사의 '위력'이 쟁점이 될 것이었습니다. 피해자는 바로 그 위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김민정 취파용

Q. 왜 거부하지 못했나?
"서초동에서 실무 수습을 시작한 신임 변호사의 지위는 이렇습니다. 수습 변호사는 수사 기관의 조사 배석을 단독으로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서면이 나갈 수도 없습니다. 수습, 그러니까 훈련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으로 변호사로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수습 기간 동안 로펌 변호사들이 수습에게 일을 주고 가르치면서 실무 능력을 쌓게 합니다. 그 과정에서 평가가 이뤄지고 수습이 끝난 이후 채용 여부까지 결정하게 되는 겁니다. 수습 변호사 입장에서 가장 이상적인 건 자신이 수습을 한 곳에서 채용이 되는 겁니다. 그 채용에 대한 권한과 평가권을 로펌의 대표가 갖고 있는 것이고요."

Q. 거부하고 다른 곳으로 가면요?
"여기서 실무 수습을 받았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실무 수습을 하고 채용이 안 돼서 다른 곳을 갈 때 소위 '평판 조회'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수습 변호사를 데리고 있었던 로펌에서 나에 대해 어떻게 말하느냐가 향후 취업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게다가 최근엔 실무 수습 자리를 구하는 것 자체도 쉽지 않습니다. 법조계는 인맥관계가 좁고 폐쇄적인 면이 커서 경력이 길고 업계 영향력 있는 대표 변호사의 존재는 그만큼 위력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너의 커리어를 좌지우지하겠다'고 말로 표현하는 사람은 없어요. 위력은 말 안 해도 존재하는 공기 같은 겁니다."

Q. 피해자가 당시 지인에게 피해를 호소했는지, 일기 등의 기록은 있나요?
"없습니다. 통상의 경우 그런 기록이 필요한 이유는 업무상 상하 관계에서 벌어진 성범죄의 경우, 한편으론 피해를 입으면서 또 한편으론 사회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해 가해자와 친근한 대화를 주고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대화가 가해자 측의 '합의' 근거가 되어 피해자를 옭아맬 때 피해자의 내심이 괴롭고 힘들었다는 점을 증명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나 이번 사안에선 피해자가 A 씨와 사적인 대화를 주고받은 게 전혀, 단 한 건도 없습니다."

김민정 취파용

Q. 이런 구조에서 그간 왜 서초동에서 다른 피해자들은 없었나?
"여러 법조인들을 비슷한 사례로 저희 사무실에서 상담한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법조계가 워낙 좁고 평판이 중요한 업계라 '없는 일'이 아닌 '덮고 가는 일'이 되는 거죠. 이번 피해자는 자신의 커리어를 걸고 큰 용기를 낸 겁니다. 아닌 건 아닌 거다, 라고. 더 늦기 전에, 동료나 후배들이 비슷한 피해를 더 당하기 전에요."

Q. 이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될텐데
"처벌 대상이 없어졌으니 기소를 할 수가 없다는 걸 모르진 않아요. 다만 6개월간 피해자, 피의자 조사, 참고인 진술까지 모두 이뤄진 데다 사회적 파장도 있었던 만큼, 사건 송치를 앞두고 있었던 경찰이 이 사건을 어떻게 송치할 예정이었는지 설명해준다면 피해자가 피해 회복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겁니다. 실무 수습 제도와 소형 로펌에 대한 성희롱 예방 교육 등에 대한 제도개선 목소리도 낼 예정입니다."

김민정 취파용

경찰은 난색입니다. 실무 원칙에 따라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를 종결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지만 내부적으로 검토를 더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A 씨는 대표 변호사로서의 '위력'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수사 과정에서 다퉈왔던 걸로 알려졌습니다. 20대, 이제 갓 사회생활에 발을 내딛은 피해 변호사는 자신이 했던 공부와 커리어를 걸고 법조계 위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고발했습니다. 이 변호사가 겪은 피해에 대한 사법적 해결의 길은 사라졌지만, 이 사건을 계기 삼아 또 다른 피해를 막을 기회는 아직 남아있습니다. 피해자 측은 오는 31일 기자회견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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