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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 실패 거듭한 음악 평론가, 명리학을 선택하다

[그사람] 실패 거듭한 음악 평론가, 명리학을 선택하다

윤춘호(논설위원)

작성 2021.05.22 08:19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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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늘 무언가에 중독된 채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소설에 중독됐고 영화에 중독됐고 '이념'에 중독됐고 한때는 도박에 중독된 적도 있다. 술에 중독된 채 살다가 건강이 망가졌고 여전히 위태위태하게 살면서도 니코틴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자에게는 수시로 중독됐고 와인에 중독됐고 공연 연출에 깊이 빠진 적도 있다. 음악은 이 사람이 가장 오래 중독된 분야인데 이제는 사주팔자에 빠져 산다. 무언가에 중독되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사람, 명리학자이자 음악평론가인 강헌의 이야기다.

심장에서 피를 쥐어짜 온몸으로 돌리는 힘이 정상인의 5분의 1이 안된다고 했다. 피를 돌리는 힘이 약하니 모든 신체 기능이 떨어진다. 걷는 것도 조심스러워 보였다. 운동이 부족할 수밖에 없고 운동이 부족하니 체중이 느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두 달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정기 검진을 하고 처방을 받는다. 17년 전 대동맥이 70센티미터가 찢어져 한 달 가깝게 혼수상태로 생사를 넘나들었는데 그 후유증이 여전한 것이다. 수술도 불가하고 다른 처방도 없다. 그저 스트레스 받지 않고 무리하지 않고 조심조심 몸을 달래가면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몸 안에 두고 살아가는 셈이다.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그 고비를 완전히 넘은 것은 아니었다.

2004년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쓰러졌다. 중병의 사전 징후 같은 것은 없었다. 일주일에 닷새 술을 마셨다. 한번 마시면 많을 때는 소주 12병, 적게 마시면 8병을 마셨다. 그렇게 마셔도 몸은 끄떡없었다.

"그렇게 마셔도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제 인생을 지옥으로 몰고 갔습니다."

자기 몸이 철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을 쓰러진 뒤에야 알았다. 사무실에 핸드폰을 두고 간 후배가 없었다면 그대로 황천길이었다. 병원으로 옮겨져 23일을 의식을 잃은 상태로 지냈다. 의사가 사망 확률 98%라고 했으니 그가 깨어난 것은 기적이었다. 의식을 되찾고 다시 자신의 두 발로 걷기까지 1년이 걸렸다. 자신의 힘으로 걸을 수도 없는 처지에서 그는 20년도 훨씬 전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낙담해 있을 때, 명리학을 하던 친구 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40대 초반에 죽을 고비를 맞을 것이고 결혼을 세 번 하고 등등. 그 말이 섬광처럼 생각이 났고 그때부터 자기 운명이 궁금했다. 서점에서 사주팔자, 명리학이란 단어가 들어간 책이란 책은 다 사서 읽기 시작했다. 그것 말고 달리 할 일도 없었다. 의식이 돌아오고 자기 발로 다시 걷기는 했지만 건강은 마치 해동할 무렵 얼음장 위를 걷듯 조심스러웠다. 언제 다시 동맥이 찢겨 나갈지, 심장이 폭탄 터지듯 터질지 모를 일이었다. 이 사람에게 보이는 세상이 쓰러지기 전의 세상과 같았을 리 없다. 명리학을 공부해서 세상이 새롭게 보인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런 경험을 한 사람에게 세상이 예전과 변함없이 같게 보인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사람 강헌

2. 자신을 프롤레타리아 자식이라고 소개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산 미군 부대에서 40년 넘게 일했다. 1981년 서울대 국문과에 들어간 것은 소설가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운동권 학생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반(反)운동권 학생이었다.

"저는 운동권에 대해서 굉장히 시니컬하고 비판적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X도 아닌데 왜 그렇게 인간들이 마르크스와 레닌에 허약한지 모르겠더라구요. 저는 선배들을 못살게 굴고 심지어는 주먹질도 하고 패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학과 사무실에 운동권을 비난하는 대자보도 붙이고 그랬습니다. 반운동권 또라이였죠."

몰래바이트라고 불리던 과외를 해선 번 돈으로 당시 삼성전자 신입사원 월급이 20만 원이 되지 않을 때 22만 원짜리 코트와 8만 원쯤 하는 니트를 입고 다니는 이 사람을 지방 갑부집 아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앵무새처럼 마르크스와 레닌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파가니니와 리스트처럼 살고 싶었다. 세상이야 어찌 되든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쾌락을 누리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태생이 자유분방하고 먹물 근성이 그득한 사람이니 그 시대 도도한 좌파 이념의 세례를 피하기는 어려웠다. 좌파로 전향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음대 대학원에 다닐 때 당시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에 다니던 김종엽, 정준영 등과 어울리면서 마르크시즘이 생각보다 유연하고 다양한 관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사람 강헌

"운동하던 친구들에게 '너희들이 마르크스나 레닌처럼 20년만 살면 존중해줄게' 그랬어요. 그런데 그렇게 산 놈이 한 명도 없어요. 다 변했어요. 그래서 마지 못해 제가 운동권이 됐습니다."

국문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음대 대학원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엇박자 인생이 시작된다. 얼마나 음악을 사랑했으면 국문학도가 음대 대학원을 갔을까 싶었는데 사실은 입대를 미루기 위한 방법이었다. 군대는 죽어도 가기 싫은데 국문과 대학원은 더욱 가기 싫었다. 이미 또라이로 소문이 났으니 국문과 대학원에는 이 사람 자리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학원 시험에서 제2외국어를 보지 않는 단과대학이 음대뿐이라서 음대 대학원을 갔다고 했지만 클래식부터 시작해서 트로트까지 자기보다 많이 음악을 들은 사람은 없을 거라고 했다.

"서울대 음대는 굉장히 폐쇄적이고 귀족적인 곳입니다. 저 같은 양아치를 불러들이는 곳이 아닙니다. 아직도 제가 왜 음대 대학원 시험에 붙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서울대 음대 작곡과 대학원 입학 정원은 다섯 명이었는데 이 사람이 들어간 해만 여섯 명을 뽑았다. 그 해에 음대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대학 3학년 때 이미 장문의 음악 평론을 쓰고, 대학 4학년 때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불량기 넘치고 자신감은 더 넘쳤던 이 사람을 음대 교수들이 놓치기 아까웠던 모양이다.

이 대목에서 정주영 고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이 사람 입을 통해 호출됐다. 긴 이야기를 짧게 정리하자면 고등학교 때 자신을 무시하던 전교 1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죽으라고 공부를 해서 성적이 '한때' 좋았고 그 덕에 아산장학재단이 주는 장학금을 받았다. 그런데 그 액수가 무려 3백80만 원이었다. 1978년 주택복권 1등 당첨금이 1천만 원이었으니 지금 가치로 치면 5천만 원쯤 되는 돈이었다. 그 돈을 받아 어머니에게 드렸더니 네가 공부 잘해서 번 돈이니 네가 알아서 쓰라고 했다.

"어떻게 하면 그 돈을 폼 나게 쓸까 고민하다가 제가 잘 사는 친구 집에 가면 제일 부러운 것이 레코드 판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노래 듣는 것은 가오가 떨어지는 것 같아서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부산 서면에서 제일 큰 레코드 가게에 가서 'A부터 Z까지 클래식 음반을 다 뽑아주세요'라고 했어요. 용달차를 불러 음반을 싣고 집에 왔습니다."

이 사람 화법의 특징은 과감한 생략과 담대한 강조다. 사람들의 귀를 잡아 끌 만한 몇 가지 요소만 딱 잡아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어지간한 것은 과감하게 생략해버리고 강조할 것은 망설이지 않고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전체 스토리와 흐름이지 사소한 디테일이 아니다. 말할 때만이 아니라 글을 쓸 때도 이런 특징은 변하지 않는다.

그사람 강헌

3. 독일로 유학 가서 음악 사회학을 공부할 뻔했지만 결국 공부는 나의 길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당초 꿈꾸던 문학에서도 그 다음에 선택한 음악에서도 자기 둥지를 찾지 못했다. 무리에서 튕겨져 나온 건지, 아니면 무리에서 뛰쳐나온 건지 애매하다. 문학과 음악의 결합이 영화에서 가능할 것으로 보고 영화에 도전하기로 했다.

"사실 저는 영화광은 고사하고 영화를 좋아하는 청년도 아니었어요. 영화가 그렇게 매력적인 장르는 아니었는데 영화가 교육받지 못한 대중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소설이나 이런 것과는 다르겠다 싶었습니다. 내가 어떤 메시지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한다면 이제는 글이 아니고 영상이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충무로에 가서 하루 종일 혼자 어슬렁거리다가 우연히 영화판에 있던 대학 선배 신철을 만나서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인 뒤 독립 영화 제작 집단인 <장산곶매>를 결성한다. 1990년대 동구 사회주의 몰락으로 정치적으로는 좌파 이념이 몰락하고 있었지만 문화 예술 분야는 진보 예술 진영이 정부에 치열하게 맞서며 조금씩 승리를 쟁취하던 시절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영화 사전 검열 철폐 운동이었고 <장산곶매>는 이 운동의 선두에 서있던 집단이다. <장산곶매>에서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닫힌 교문을 열며' 같은 독립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이 사람이 들려주는 그 무렵 영화판 이야기는 한편의 무협 소설이다. 정파와 사파의 자리에 안기부와 운동권이 있고, 잡으려는 자와 잡히지 않으려는 자, 막으려는 자와 뚫으려는 자의 치열한 두뇌 싸움이 장풍 대결을 대신한다. 열정은 넘치는데 돈은 없고, 정의감은 넘치지만 재능은 따르지 않던 청년 영화인들의 이야기는 무협지를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그 당시를 어제 일처럼 복기해내는 이 사람 입담이 아니라면 그 시절 실상은 훨씬 찌질한 것인지도 모른다.

말의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닌데 무협 소설이나 홍콩 느와르 영화 같은 이 사람 이야기가 허황되게 들리지 않는다. 어딘가에 과장이 있겠고 어딘가에 슬쩍 거짓을 묻어두고 있을 테지만 이 사람 따라 연신 폭소를 터트리다 보면 경계심은 온데 간데없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은 틀림없는데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시절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도 이 사람 특징이다.

-영화 제작에 관여했는데 감독을 했다는 기록은 못 봤습니다.
"그 때 전부 다 말은 안 하지만 모두 감독을 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저는 그게 너무 웃겼어요. 감독은 완전 노가다인데 저걸 왜 하고 싶어하지. 그 때만 해도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란 것을 제가 몰랐던 거죠. 그 때는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정권과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저는 감독보다는 제작이 훨씬 재미있었고 다른 사람에게 돈 받아오는 일 같은 것은 제가 제일 잘한다고 생각했죠. (폭소) 운동권 조직을 통해 영화를 배급했는데 이 돈을 떼먹는 놈들이 있었어요. 저는 그런 양아치 같은 새끼들 끝까지 추적해서 돈 받아오곤 했어요. 수금 실적이 탁월해서 (장산곶매) 대표가 됐나 봐요. (폭소) '파업전야'는 대박이 나서 저희가 전노협*에 1억 원을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사람 강헌

<장산곶매>는 사전 검열 철폐를 내세우던 운동 단체였고 당연히 이 사람과 친구들이 만든 영화는 모두 불법 영화였다. '닫힌 교문을 열며' 제작자로 이름을 올렸다가 영화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제작자였던 이 사람의 이름이 피고인으로 명기된 사건은 법원을 거쳐 헌법재판소까지 가게 되었고 헌법재판소는 이 법이 위헌이라고 선고했다. 자신이 대한민국에 기여한 게 있다면 검열 철폐 운동에 이름을 올린 거라고 했다.

*전노협-전국노동자협의회의 준말로 1990년 창립되었다가 1995년 해산했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만들어진 노동자 조직으로 민주노총의 전신이다.

영화판 이야기가 어느 순간 슬그머니 사라지고 공연 기획 이야기가 들어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와인 이야기가 나온다. 한 가지만 하기에는 이 사람 타고난 재주가 너무 많다.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음악 칼럼니스트지만 음악 평론을 할 때도 그 일만 한 것은 아니다. 서너 가지 일을 동시에 했고 원고를 쓸 때도 몇 가지 글을 동시에 쓴다. 음악 평론을 빼면 10년 이상 한 일이 없다. 길어야 5-6년, 그보다 짧게 끝낸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자세와 태도가 어디 일에서만 그랬을까 싶다.

-어디 한 곳에 천착하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습니까.
"예. 사람과의 관계도 오래 못 가는 거 같습니다. 돌이켜보니 제 생애 전체를 아는 사람이 없어요. 특히 제가 쓰러지고 난 2004년 이후로는 술을 마시지 못하니까 사람들을 만날 일이 더 없어지게 됐습니다."

여복 내지 여난에 관한 스토리가 숱하게 있을 법한데 그런 이야기는 굳이 묻지 않았다. 여자와 술을 빼놓고는 이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 것이고, 들을 이야기도 많을 테지만 이 사람의 아픈 상처도 이 부분에 있을 듯했다. 이 사람의 상처를 새삼 덧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4. 서울대 국문과 졸업에 서울대 음대 대학원을 나왔으니 음악 평론가로 이상적인 이력을 갖췄다. 음악에서 의미를 찾아내 그것을 자신의 말과 글로 풀어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데 귀재였다. 대중음악에서 정치를 읽어내고 한 시대를 찾아 복원하고 계급을 논하고 때로는 음탕하게 섹스를 말해준다. 음악이 날라리만이 아니라 지식인의 영역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이다.

다른 이야기에 몰두하다가 하마터면 요즘 트로트 열풍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빼먹을 뻔했다. 트로트에 대하여 10분 넘게 혼자 말을 이어갔다. 중간에 질문을 던질 틈을 주지 않았다. 마치 머릿속에 미리 준비된 녹음을 틀어 놓은 듯했다. 다른 주제도 그렇지만 특히 트로트 부분은 이 사람 말은 전혀 손보지 않아도 받아 적으면 그대로 한 편의 글이 된다.

K팝이 일종의 글로벌 스탠다드가 되어가는 상황에서 가장 낡았다고 여겨지던 트로트가 젊은 사람들에 의해 르네상스를 맞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 대중 문화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역동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트로트가 온갖 천대를 받으면서도 살아남은 가장 결정적인 이유로 서민적 리얼리즘을 들었다. 예를 들어 1970년대 도시화 물결 속에서 농촌을 떠나 도시 빈민 지역에 정착한 노동자의 감성을 대변한 게 트로트였고, 1990년대 트로트는 주류 음악이 전혀 아니었지만 야간 밤무대, 고속도로 휴게소 테이프, 시골에서 벌어지는 행사, 환갑 잔치 같은 산업적 통계에 포함되지 않는 그들만의 시장을 개척하면서 놀라운 생명력으로 살아남았고 그렇게 살아남은 트로트가 TV라는 메이저 포맷을 통해 최근 폭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스 트롯2>를 보면서 난생 처음으로 문자 투표를 보냈다고 했다.

그사람 강헌

"제주댁 있잖아요. 양지은인가… 그 사람에게 예선부터 문자 투표하고 친구들에게도 그 사람에게 투표하라고 독려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1970년대부터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희망과 약속이 좌절되었습니다. 아무리 실력이 있고 노력을 해도 안 된다는 거대한 좌절감이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것이 젊은이들이 절망하는 가장 큰 이유인데 이 프로그램은 그래도 실력이 있으면, 전력과 과거는 어떻게 되었든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사람들이 거기에 자기 감정을 이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강헌은 그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수많은 실패를 거듭해왔던 자신의 또다른 페르소나라고 했다. 참가자들을 응원하면서 '역시 내가 인생에서 실패를 많이 했나 보다'라고 혼잣말을 했단다.

두 손으로 다 꼽기 어려운 직업을 가졌다는 것은 한 가지 일에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말이고 성공한 게 없다는 뜻이다. 나처럼 많은 실패를 경험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했다. 경기문화재단 대표 면접을 볼 때 장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미술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수많은 실패를 경험한 것이 자신의 장점'이라고 답했다.

-이력을 보면 화려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많은 실패를 겪은 사람도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건강 문제, 사회적 커리어, 가정사도 그렇고…
"경제적으로도 그렇지요."

-실패를 통해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실패를 통해서 확실하게 배운 것은 실패는 처절하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는 실패가 훨씬 재밌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너무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게 문제이긴 합니다. 제 감정의 구성 요소 중에는 후회와 반성의 키워드가 없는 거 같아요. 그런 걸 할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새로 할 걸 생각하는 게 훨씬 이익이라고 생각하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실패와 좌절, 불화와 갈등으로 점철된 삶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자신의 사주에는 후회와 반성이 없다는 사람에게 당신이 왜 실패했는지 말해보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실패담이 아니더라도 이 사람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는 얼마든지 더 있었다.

5. 자신이 유일하게 잘하는 게 강의라고 했다. 한 학기에 보통 1천 4백 명이 듣는 대학 강의를 십 년 넘게 하면서 내공이 쌓였다고 했다. 음반 재킷 사진 한 장으로 한 시대를 말하는 재주는 이 사람 아니면 기대하기 힘들다. 모르는 분야가 없다. 아니, 모르는 게 없을 리 없는데 이 사람이 모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떤 분야에서도 초보인 적이 없었을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모든 분야에서 언제나 내가 제일 잘 알아'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잘 모르는데 어떻게 말을 해요? 그럼 듣는 사람이 뭐가 돼요. 잘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자고 앉아 있는 거잖아요. 몰라도 잘 안다고 해야 앉아 있는 청중이 안심을 하죠."

의미가 없는 재미는 존재할 수 있지만 재미가 없는 의미는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이 말은 철저하게 모든 사안을 대중의 눈높이에서 본다는 뜻이다. 재미를 원하면서 의미까지 바라는 사람들의 심정을 꿰뚫어 본다. 청중들이 쓰고 있는 근엄한 도덕주의자의 가면을 한 순간에 벗겨버리는데 선수다. 비속어와 욕설, 성적인 농지거리가 여기에 동원되는데 그렇다고 그의 이야기가 막장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오히려 시종일관 지적인 분위기를 유지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돈을 내고 이 사람의 강연장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

김어준과는 오래된 인연이다. 두 사람 모두 힘든 시절, 이번 달은 뭘 해서 먹고 살지를 고민하고, 비슷한 가정사로 괴로워하면서 거의 붙어 살다시피 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거의 사기에 가까운 방법으로 대기업을 '홀라당해서 많이 털어먹었고' 그 때 경험이 없었으면 오늘의 김어준은 없을 거라고 했다. 듣고 보니 두 사람의 화법도 닮았다. 강헌이 조금 점잖기는 하지만.

"명리학적으로 김어준과 내가 사주가 비슷해요. 서로 죽이 굉장히 잘 맞는 대목이 있어요. 사기성이 농후하다는 것도 그렇고 먹는 거 밝히고 여자 좋아하는 것도 그렇구요."

2014년부터 3년 동안 이 사람이 와인과 명리학, 재즈 강연을 한 장소가 김어준이 운영하던 서울 대학로의 <벙커1>이라는 곳이다. 2012년 대선 직후 김어준이 '파리로 도망가면서' 자신에게 <벙커1>의 뒷일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 시절은 이 사람 인생에서 최악의 시절이었다. 교통사고가 나 동승했던 전처가 죽었고 와인 가게는 문을 닫았고 경제적으로 쪼들렸다. 공황장애로 매일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리려는 충동을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시절이었다.

"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충동을 이겨내려면 밖에 나가서 일을 해야 되는데 김어준이 이걸 나에게 던져주고 간 것은 내 운명인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무조건 할 테니 시간만 비워 두라고 해서 시작한 게 '전복과 반전의 순간'이라는 강좌입니다. 그 때는 제가 살기 위해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내가 죽다 살아났는데 또 그냥 죽을 수는 없지 하는 생각으로 필사적으로 강연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6.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하던 역할을 명리학이 대신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태어난 해와 달과 날과 시간으로 자신의 운명을 가늠해보려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 서점에 명리학 책이 즐비하고 유튜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채널이 사주팔자 채널이다. 명리학에서 위안을 구하고 성공의 가능성을 찾고 실패를 정당화할 구실을 찾는다. 명리학 열풍은 천년 넘게 미신이자 혹세무민의 잡설로 천대받던 전통 역술의 복권 선언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제는 자기 스스로에게 자신의 운명을 물어야 되고 자기 스스로에게 위안을 구해야 되는 시대다. 여기에 경쟁은 더 격렬해졌다. 이기는 것은 고사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언제 나가야 되고 언제 물러서야 할지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어떤 부분은 덜어내야 되는지 어떤 부분은 보완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 모든 사람이 명리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 이 사람의 주장이다.

명리학에 대한 이 사람의 간증은 절절했고 진지했고 길었다. 낄낄거리고 깔깔거리면서 말하던 사람이 명리학 이야기가 나오니 급 진지 모드로 변했다. 다른 곳에서도 명리학을 말할 때만은 진지를 넘어 엄숙이다. 이 사람의 진지한 표정을 보면 사주팔자는 미신이라거나 혹세무민하는 거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기 어렵다.

"제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명리학을 접하게 되었지만 저는 명리학을 모르던 시절과 그 이후가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좌파인 점에서는 변함이 없지만 그 이전에 저를 알던 사람과 그 이후에 저를 알던 사람이 만나면 전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거 같다고 합니다."

'서툰 사람은 무시하고 정의롭지 않은 자는 경멸하는 사람'이었는데 명리학을 알고 난 이후 모든 인간이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됐단다. 그 간명한 사실을 그때서야 알게 된 모양이다. 경기도에서 일하면서 경험한 관료주의의 폐해를 질타하면서 쏟아 내는 그의 독설을 생각하면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된 이후가 이 정도라면 그 이전은 어땠을까 싶다.

자신의 명리학을 좌파 명리학이라고 이름 붙였다. 사주팔자 따지는데 좌, 우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명리학이 개인의 행복과 불행만을 따지면서 우경화 되었다면서 원래 혁명을 말하는 학문이라고 했다. 명리학이 교조화 되면 안 된다는 설명을 하면서 레닌과 마르크스를 예로 들었다. 어떻게든 좌파라는 말을 버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좌파 명리학이라고 이름 붙인 강의를 진행하는 강헌

수많은 명리학자 중에서 이 사람 이름이 유독 대중들에게 기억되고 불리워진다. 이 사람이 쓴 명리학 책은 몇 년째 베스트셀러 자리를 내놓지 않는다. 때로는 명리학이 유행하는 게 아니라 '강헌의 명리학'이 유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책으로, 강연으로, 유튜브로, 방송으로 곳곳을 누비며 명리학을 전도하고 다닌다. 명리학은 비주류의 세계다. 한의학이 당당하게 시민권을 확보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이라면 명리학은 여전히 불법 체류자 신분이라는 비유는 명쾌하게 명리학의 현재 처지를 보여준다. 강헌은 강호에 이름을 널리 떨치던 시절에도 주류는 아니었다.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했고, 이렇다 할 직함을 가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겠지만 어딘가 마이너의 정서를 풍기던 사람이다. 과학적 사회주의를 믿던 사람이 종교와 학문의 경계조차 모호한 명리학에 빠진 것은 놀랄 일이었지만 비주류였던 사람이 비주류의 학문을 본격적으로 공부한다고 보면 명리학과 강헌의 만남은 예정된 만남일 수 있다.


명리학자로서 내년 대선 전망을 물었는데 이 사람 대답은 그리 명쾌하지 않았다. 여권은 이재명 경지지사가 후보로 거의 결정된 거 같은데 야권은 윤석열이 유력해 보이긴 하지만 아직 모르겠다는 정도의 대답이었다.

-내년 대선 결과는 알고 있는데 말할 수 없다는 겁니까.
"말할 수 없습니다. 제 목이 달린 거라서…"

천기를 누설할 수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2012년 문재인과 안철수 후보 단일화 국면에서 안철수로 단일화하는 것이 진보 진영의 승리 가능성을 높인다고 말했다가 민주주의의 배신자 취급을 당했던 게 이 사람 입을 무겁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이 사람에게 굳이 답을 추궁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공동체의 운명을 정하는 일이 후보의 생년월일 여덟 자에 달렸다는 것을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 나라의 운명을 명리학자의 입을 통해 듣고 싶지도 않았다.

7. 평생을 살면서 한 번도 월급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2018년 말 경기도 문화재단대표로 취임했다.

그사람 강헌

"명리학적으로 보면 2018년이 제 인생에서 획기적인 무언가가 일어나는 해였습니다. 어떤 자리에 오르거나 큰 명예를 얻게 될 운수였는데 그 해 10월에 경기문화재단과 인연이 닿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오게 됐습니다."

공모 형식을 거치긴 했지만 그 자리에 간 것은 이재명의 뜻이었다. 이재명이 무슨 생각으로 이 사람을 자신의 곁에 두기를 원했는지, 이 사람은 또 무슨 생각으로 이재명의 곁에 있기를 바랐는지 궁금했다. 두 사람 인연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의외였다. 성남시장 시절에 한 번 만나서 밥을 먹은 게 인연의 전부이고 임명장 받은 이후 3년 동안 따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재명의 참모도 아니라고 했다.

-이재명과 함께 일하기로 했을 때 이재명이 다음 대권을 잡을지 궁금했을 거 아닙니까.
"물론입니다."

-그럼 답을 하셨을 거 아닙니까.
"저한테는 했습니다."

-그 답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건 지금 제가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사자에게 답을 안 했고 지금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 말을 하려면 제가 거짓말을 해야 됩니다. 제 생각을 온전히 말하면 제 목숨이 위험합니다."

-그럼 이재명 지사와 당신과의 관계는 명리학적으로 좋습니까.
"아닙니다. 별로 안 좋습니다. 명리학적으로는 그렇게 서로 도움이 되는 관계는 아닌 거 같습니다. 서로를 잘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도움이 되는 관계는 아닙니다."

강헌과 이재명 경기지사

알 듯 모를 듯한 말이었지만 이 대목에서도 더 따져 묻지는 않았다. 묻는다고 이 사람이 답을 더 할 거 같지도 않았다. 이재명의 대권 운세를 말하는 대신 경기도 관련 통계를 술술 이야기했다. 예를 들면 경기도의 31개 시군 중 서울과 경계를 공유하는 곳이 12곳인데 이들 시군의 경제 활동 인구 가운데 52.6%가 서울로 출근한다는 식이다. 경기 문화재단 대표가 머릿속에 넣고 있을 필요는 없는 통계였다. 경기도 지사와 같은 눈높이에서 경기 도정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요설 같은 역술 이야기보다 이런 이야기가 더 의미 있게 들렸다.

경기 문화재단 대표는 경기도 관내 미술관과 박물관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자리다. 직원이 5백 명이 넘고 연 예산이 1천 4백억 원이니 작은 조직이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 자리가 이 사람에게 잘 맞는 옷 같지는 않다. 옷의 크기도 그렇고 그 자리의 역할 역시 그렇다. 자신이 평생 살아오던 길에서 크게 어긋난, 전혀 다른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 위에 올라탄 듯하다. 그걸 모를 리는 없는데 왜 그 길을 택했을까. 여전히 의문이다. 이번에는 정치에 중독되려는 것인가.

8. 당초 약속한 인터뷰 시간은 네 시간이었지만 네 시간이 다섯 시간으로, 다섯 시간이 여섯 시간으로 늘어났다. 인터뷰 중간에 10분씩 두 번 휴식 시간을 가졌다. 휴식 시간이 되면 밖으로 나가 급하게 담배를 연거푸 피웠다. 긴급 수혈이라도 받는 듯한 모습이었다. 몸 안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사람에게 담배가 해로운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일 텐데 니코틴에 중독된 사람에게 니코틴은 위안이자 구급약처럼 보였다.

우리 나이 예순, 앞으로 갈 길이 많이 남았다. 이 사람이 남은 인생을 안온하고 평탄하게 살 거 같지는 않다. 지난 시간 그랬던 것처럼 끊임없이 도전하고, 사고 치고, 그러는 가운데 뭔가를 이루어 내면서 살 것이다. 이 사람의 도전에 명리학이라는 나침반이 함께 하는 게 이전과 달라진 점일 뿐, 도전하는 자세 그 자체가 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인터뷰는 5월 3일 경기도 용인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양만희 논설위원과 함께 2:1 대담 형식으로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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