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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그런 불량 판결은 유죄입니다

최정규 | '상식에 맞지 않는 법'과 싸우는 변호사 겸 활동가

저는 곤경에 빠진 가난한 피해자입니다. 소송 대리인으로 도움을 줄 정의롭고 용기 있는 좋은 인권변호사, 좋은 인연의 이웃을 찾습니다. 소송 대리가 아니더라도 소송에 관련하여 유익한 어떤 정보라도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기억했다가 살아가면서 은혜를 갚겠습니다.


"곤경에 처한 이웃을 도와줄 용기 있는 소송 대리인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이런 내용이 담긴 이메일을 받은 것은 지난 3월 13일이었다. 당시 나는 4월에 출간될 책 <불량판결문>의 마지막 수정 작업으로 매우 바빴다. 새로운 사건을 맡기보다는 지금 진행 중인 사건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인 만큼 "하나를 하면 다른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문구를 손바닥에 쓰고 다닐 정도였다.

하지만 내 성정은 어쩔 수 없었다. '오죽 답답했으면 일면식도 없는 변호사에게 이런 이메일을 보냈을까?'하는 마음이 들었을 때 손바닥을 힐긋 봤어야 했는데… 이미 내 손가락은 답장 버튼을 클릭한 지 오래였다. 보내온 소송 자료를 보면서 나는 또 하나의 '불량판결문'이 생산될 것을 예감했고, 일단 이것은 막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다시 뛰어들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2018년 12월 30일부터 2019년 1월 1일, 48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다. 12월 30일 낮 12시 반, 피해자는 외국인으로부터 눈을 맞아 실명됐다. 법률 용어로 '중상해'였다. 피해자 가족들은 간신히 가해자를 찾아냈는데, 알고 보니 외국인등록도 돼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혹여나 외국으로 도망치면 어쩌나, 경찰에 그런 상황을 대비해달라고 요청했다.

형법상 중상해죄는 장기 3년 이상의 징역에 해당되는 중범죄이다. 가해자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도망칠 우려도 크다. 따라서 형사소송법상 긴급체포가 가능한 사안이었다. 그럼에도 경찰은 출국금지조차 돼 있지 않은 피의자를 긴급체포 하지 않은 채 순순히 풀어줬고, 피의자는 2020년 1월 1일 아무런 제지 없이 출국해버렸다. 경찰의 안일한 대응으로 피해자는 가해자로부터 치료비 등 피해 배상을 받을 기회를 잃어버리게 됐다.

가해자에게 돈 한 푼 배상을 받지 못한 피해자와 가족들은 안일한 대응을 한 경찰의 위법한 직무를 문제 삼는 국가배상소송을 시작해야 했다. 그런데 2019년 5월 14일 시작한 소송은 제대로 진행이 되지 않았다. 피해자가 입은 손해를 입증하기 위한 신체감정절차에서 법원이 선정한 종합병원 안과, 성형외과 전문의들 모두 감정을 고사했다. 바쁘다는 이유였다. 3차례나 감정 절차가 틀어졌고, 올해 2월에는 법관 인사이동으로 판사마저도 바뀌게 됐다.

재판이 지연되고 판사가 바뀐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3월 11일 진행된 재판에서 새로 바뀐 판사의 말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오늘로 재판을 마치고 한 달 후에 선고를 하겠다는 것 아닌가? 이렇게 감정도 없이 재판을 끝내는 것은 부당하다고 당사자는 외쳤지만, 판사는 새로 변호사를 선임해 변론을 다시 열어달라는 신청서를 제출하라는 말을 남기고 재판을 마무리했다. 내가 받은 이메일은 이런 사연을 거쳐 내게 도달한 것이다.

법원이 채택하여 진행되고 있는 신체감정절차가 진행 중에 있는데 이렇게 판결을 선고하는 것은 당사자의 재판받을 권리가 침해된 것이다. 판사가 남긴 말도 있는 만큼, 변론을 다시 열어달라고 법원에 서면으로 요청했다. 하지만, 판사는 예정대로 4월 22일 판결을 선고해버렸다.

판결문에는 적힌 이유는 겨우 두 줄이었다.

최정규 인잇

그리고 어김없이 이 문구와 마주쳤다.

"소액사건 판결서에는 소액사건심판법 제11조의 2 제3항에 따라 이유를 기재하지 아니할 수 있습니다."

당사자는 매우 허탈해했다. 특히 변론조서를 보면 화가 난다고까지 했다. 마지막 변론기일, 새로 바뀐 판사가 곧장 재판을 끝내겠다고 할 때, '그렇게 끝내선 안 된다'고 외쳤던 절규와 새로 변호사를 선임해 변론을 다시 열어달라고 하라는 판사의 말 모두 소송 기록에 제대로 남겨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 2021년 3월 11일 진행된 변론기일을 기록한 변론조서에는 그 날 오고 간 대화는 전혀 남겨져 있지 않았다. 대신 조서에는 누군가의 희망을 짓밟고 내리는 사망선고처럼 무미건조한 네 글자만이 기록돼 있었다.

'변.론.종.결.'

지난 4월 25일은 법의 날이었다. 1895년 근대적 사법제도를 최초로 도입한 재판소구성법 시행일인 4월 25일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법의 날을 사흘 앞두고 선고된 이 판결문은 이런 질문을 자아낸다.

"우리 사법제도는 과연 시민들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리고 이렇게 재판이 끝내면 안 된다는 절규를 담아내지 않고 그저 '변론종결'이라는 네 글자만 남긴 변론조서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민들의 외침을 묵살하는 이런 사법제도에 사망선고를 내려야 하지 않을까?"


최정규 인잇

법원이 청구금액에 따라 '소액사건' 딱지를 붙이고 판결이유를 생략하는 등 무성의한 판결을 쏟아내고, 재판정에 오고 가는 말들이 그저 몇 마디 무미건조한 법정 용어로 생략되는 상황. 그저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2021년 대한민국 법원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리얼스토리'다.

"좋은 법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쟁취하는 것이다" 독일의 법학자 헤르만 칸토로비츠가 한 말이다. 시민이 주인인 법원을 쟁취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청구금액이 3,000만원을 넘지 않는다고 법원 맘대로 '소액사건' 딱지 붙여 판결이유 생략하도록 내버려 둔 '소액사건심판법', 법정에서 하는 말이 의무적으로 녹음돼 속기되지 않고 그저 변론조서에 판사가 남기고 싶은 말만 남기도록 내버려 둔 '민사소송법'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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