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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 한국 현대사 굴곡 함께 한 '키다리 아저씨'

[그사람] 한국 현대사 굴곡 함께 한 '키다리 아저씨'

'나이 든 청년' 김판수

윤춘호(논설위원) 기자 spring84@sbs.co.kr

작성 2021.05.01 10:06 수정 2021.05.11 14:54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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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소리가 작고 가늘었다. 여러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자리에서 이 사람 목소리는 다른 사람 목소리에 묻히거나 눌려서 잘 들리지 않을 것이다. 어디에서 목청을 높일 사람도 아니었다. 서너 번 식사를 같이 한 사람마저 자기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했는데 그 말이 과장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는 소년 같은 이 사람의 눈빛을 기억할 테지만 조용히 자리를 지키면서 가끔 미소를 짓던 이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터이다.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존재감이 약한 사람이다. 체질상 술도 마시지 못하고 낯가림도 심하다. 그렇게 거의 평생을 살아왔다.

김판수 그사람
경력을 보면 주눅 들어 살아왔다는 이 사람 말은 이해하기 힘들다. 1942년 사업가 집안의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서울대에 합격했다. 광주일고를 거쳐 서울대 영문과를 다녔고 1960년대 영국과 덴마크에서 유학생활을 했으니 여기까지는 일급 지식인의 경력으로 손색이 없다.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5년 동안 교도소에 있었고 1970년대 후반 기업을 창업해 단단하게 일궈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다양한 사회단체와 개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후원자였다. 지난 1월 익천문화재단 <길동무>를 만들어 이사장으로 취임한 김판수 호진플라텍 회장의 간단한 이력이다. 대화 중에 이 사람이 거명한 사람들의 이름이 화려했다.

1966년 케임브리지 유학시절 김판수
김지하, 이청준, 염무웅, 김정남, 리영희, 이부영, 김태홍, 임재경, 박원순, 송기원, 박성준, 한명숙, 김남주, 황석영, 김선주, 백영서, 김서령, 박혜숙 등등 이런 기라성 같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으니 조금은 주눅 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력 한 줄 한 줄에 한국 현대사의 고난과 성취, 희비가 그대로 담겨 있고 이 사람만큼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온전히 지키면서 살아온 사람을 찾기 쉽지 않은데 이런 사람이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김판수 그사람2. 이 사람의 삶을 말하자면 1969년 <유럽간첩단사건>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사람이 '간첩'이 된 사연만으로 책 한 권은 너끈히 쓸 수 있지만 여기서는 최대한 줄여서 말하기로 하자. 1960년대 후반 유럽 유학 중 두 차례에 걸쳐 동베를린에 있는 북한대사관에서 북한 사람들을 만났다. 유럽 유학을 주선하고 동베를린 방문을 권유한 고향 선배는 평양을 다녀오고 북한 사람들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1972년 사형을 당했고, 같은 사건에 연루된 당시 여당 국회의원도 극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사람은 5년 동안 교도소에 갇혀 있었다. 갈라진 나라에서 저쪽 세상을 넘본 것만으로 죽을 수 있는 시대였고 이 사람은 그런 야만의 시대를 온몸으로 경험했다.

1969년부터 1973년까지 대전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지난 2013년 재심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법적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자신의 행위가 법률적으로 금지된 일이었고 처벌받을 수 있는 행동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재심 법정에서 무죄를 받은 것은 당시 중앙정보부가 고문과 불법 체포를 저지르며 적법한 수사 절차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연히 이 사람의 이름을 들었고 이 사람이 쓴 재심청구의견서를 읽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모르고 살았나 싶어서 자료를 더 찾아보니 우리 시대의 문장가 고 김서령이 2008년에 쓴 인터뷰 기사가 있었다. 기사를 읽으면서 곳곳에서 탄식과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는데 동베를린 북한대사관에서 보낸 며칠의 기억을 이 사람이 회상하는 대목은 충격이었다. 북한 현대사를 다룬 선전 영상을 보고 '엉엉' 울었고 거기에서 만난 북한 공작원들은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은 품위 있는 지식인'이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해도 되는가 싶은데 그 뒤에 북한 체제는 '우상 숭배에 가까운 일인 독재'이며 단 한번도 조국을 배신 했다거나 북한을 추종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말이 이어졌다.

염무웅의 말처럼 모든 항소이유서는 명문이다. 살아남기 위해, 풀려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쓰는 글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2009년 쓴 재심청구의견서도 항소이유서의 일종인데 이 역시 명문이다. 혹시 누가 대신 써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감동적인데 본인이 쓴 거라고 했다.

-이 글 쓰는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하루 저녁에 쓴 것은 아니고 한달쯤 걸렸을 겁니다. 재판부에서 재심청구이유서를 써달라고 하는데 제가 진실 되게 이야기하면 그걸 정말 귀 담아 듣겠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글은 많이 안 써봤지만 내가 아니면 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고심을 하다 보니까 어떻게 쓰기는 썼습니다. 절박하지 않으면 이런 글이 안 나올 거 같아요."

이 글은 김판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측면에서는 만점이지만 재판에서 무죄를 주장해야 할 사람의 글로 보면 빵점에 가까운 글이다. 독재정권 시절 있었던 이른바 공안사건에는 날조, 왜곡, 조작이라는 말이 예사로 붙는다. 어떤 사실 자체가 있었다고 인정하는 것이 곧 죽음일 수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 그런 표현을 붙였다. 이 사람의 재심청구서에는 조작, 왜곡, 날조라는 말은 물론 고문이라는 단어도 찾기 어렵다. 중앙정보부 조사실에서 얼마나 짐승 같은 대접을 받았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자신이 무죄라고 강변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행동이 부끄럽지 않고 5년의 형을 산 것이 억울하지도 않고 북한대사관을 찾아간 것을 후회하지도 않는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간첩사건'의 재심을 요구하는 글이라면 문장과 문장 사이에 핏발이 서고, 단락과 단락 사이에 울분과 한이 허옇게 말라붙어 있어야 될 것 같은데 이 사람의 글은 말갛고 차분하고 정중하다. 누군가에게 속은 거라고, 누군가에게 강요당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불가항력적인 상황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정치적 상황이 달라지고 시간이 흘렀다고 이 사람 입장이 달라지지 않는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다. 객관적으로 있었던 사실과,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구분해서 말한다.
 
"이제 와서 본 사건 피고인들의 완전한 결백을 주장하거나 미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순수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저희들이 북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은 엄연히 실정법 위반이었지요. 그러나 과연 그만한 과오로 한창 피어나는 젊고 유능한 학자를 사형시켜야 했을까요. 그냥 뒀으면 세계적인 석학으로 성장했을 엘리트의 목숨과 바꾸어서 우리가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 김판수, '유럽간첩단사건' 재심청구의견서 중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에서 수사를 받았다고 하면 지옥 같은 시간을 떠올린다. 실제 그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렇게 심한 고문을 당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일종의 결벽증이 있는 거다. 진실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초를 겪은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사실 저는 자백해야 될 것이 별로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고문을 심하게 당한 편은 아닌데 그래도 맛은 다 봤어요. 물고문, 전기 고문까지…"

-고문 후유증 같은 것은 없습니까.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심하게 고문을 받지는 않아서…"

-자신을 합리화하는 좋은 방법은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거잖아요. 자기를 처벌하였던 박정희 정권을 악마화하는 방법도 있을 테고, 한때 동경 내지 이해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북한을 악마라고 공격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 이사장님은 전혀 그러시지 않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만.
"한승헌 변호사님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한번이라도 후회한 적 있느냐고 묻더라고요. 제 행동이 떳떳하고 잘한 거라고 하면 공산주의 사상을 주장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두렵긴 했지만 한 변호사님에게 그랬습니다. '이제까지 내가 한번도 길을 잘못 들어서서 내 신세가 이렇게 됐다'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이 사회에서 가장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빨간 딱지'가 붙는 일이지만 저는 그게 별로 부끄럽지도 억울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현실이 그런 걸 허용하지 않고 지금도 핍박을 받지만 제가 그렇게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전교도소 운동회에서 김판수와 박성준
이 사건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1969년부터 1973년까지 대전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유명한 신영복, 박성준 등이 같은 교도소에 있었다. 그때 박성준은 신혼 6개월 만에 통혁당사건으로 붙잡혀 들어왔다. 박성준의 아내가 성탄절을 맞아 남편과 같은 방에서 지내고 있던 김판수에게도 카드를 보내왔다.

"우리 마음을 다 담을 수는 없어도 언젠가 훗날을 기약하기 위해 이 카드를 보내드립니다." 이 카드를 보냈던 박성준의 아내가 한명숙 전 국무총리다.

감옥은 학교였다. 그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 애썼다. 부지런히 책을 읽고 일본어를 배우고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했다. 낙관주의자의 면모가 엿보이는 시절이다. 교도소에서 배운 것이 일본어만이 아니었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웠다.

"교도소가 아니면 깨우치지 못했을 인간의 가치랄까, 세상 사는 경우랄까 이런 것을 그 안에서 배웠습니다. 교도소 안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통해 인생을 배웠기 때문에 단 한 번도 5년이라는 세월을 헛되이 보냈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사상범으로 잡혀왔으니 당연히 전향 요구가 있었고 그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전향할 '사상' 자체가 이 사람에게는 없었지만 말이다.

3. 1973년 대전교도소에서 풀려났을 때 이 사람을 마중 나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민주투사의 석방이라고 환호하는 동지들도 없었고 그를 하늘 높이 헹가래치는 후배들도 없었다. 따뜻하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사람들도 없었다. 쓸쓸한 출감이었다. 그는 운동권 학생도 아니고 정치에 뜻을 둔 청년도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세월의 질곡에 사로잡혔을 뿐이었다. 감옥 한 번 다녀온 것을 훈장 삼아 운동권에 기웃거릴 생각은 없었고 그런 것이 이 사람 체질에 맞는 일도 아니었다. 그를 불러주는 곳도 거의 없었다.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밖에 없었다. 1979년 친구 사무실 한 켠에 책상 하나 가져다 놓고 사업을 시작했다. 호진플라텍의 모체가 되는 호진실업을 창업한 것이다.

"다른 길이 없다 해서 여기에 전념한 거죠. 운동권에 있다가 어디 갔다 나오면 훈장 달고 나온 것처럼 여기저기 폼 잡고 다니다가 그냥 어렵게 살고, 남에게 피해도 많이 끼치고 그런 선후배들 많이 봤거든요. 나는 그래서는 안 된다, 누가 나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나는 여기서라도 뭔가를 이루자라고 생각했어요"

예전에 알던 거의 모든 사람과의 인간관계를 끊다시피 하고 오직 사업에만 전념했다. 다른 곳에 눈 돌릴 여유가 없었다.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 여기에서 실패하면 내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절박감이 컸다. 그의 고향이 신군부의 군홧발에 잔인하게 짓밟힌 1980년에도 먹고 사는 일에 매달려 '광주'를 돕거나 찾지 못했다. 광주항쟁 시절에 기억할 만한 일을 했느냐고 묻는 문자를 보냈더니 딱 잘라서 "전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1980년대는 이 사람에게 무엇보다 사업, 먹고 사는 일이 우선이었다.

"저는 그런 시대를 살면서도 개인적 안위가 우선이었어요. 내가 나를 포기하고 투쟁의 현장에 가서 옳은 일을 하지는 못했어요. 그에 대한 마음의 빚이랄까 그런 감정을 느끼지요."

신문 볼 시간조차 없이 오직 사업에만 집중하던 시기였다. 유학 중 익힌 영어와 감옥에서 배운 일본어 덕을 톡톡히 본 시절이기도 했다. 카이스트에 가서 해외 저널과 논문을 구해와 번역해서 최신 기술을 익혔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도금 분야 일이었으니 화학의 기본부터 시작해야 했다. 수중에 자금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고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믿을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도금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되었다.

"제 손으로 번역한 미국 논문, 일본 논문이 수백 편이 됩니다. 우리 국내에서는 아직 이야기 나오지 않고 일본에서야 겨우 이야기되는 것을 얼른 번역을 해서 전부 공부를 하는 겁니다. 그런 과정을 경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가르쳐주고 그런 것이 아니라 전부 내 스스로 했어요. 그래서 거기에 대한 자부심이 좀 있습니다. 태양광 같은 분야는 우리가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무역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인데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사상범이라는 이유로 여권조차 나오지 않았다. 달리기를 해야 하는데 발이 묶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세월을 눈곱만큼의 엄살도 부리지 않고 이야기했다. 사실은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는 강박은 이 대목에서도 여전했다. 다른 것을 할 수 없어 사업을 했다지만 사업이야말로 이 사람에게 딱 맞는 일이었다. 돈 버는 재미도 있었다. 이 사람이 잘 할 수 있는 것은 문학도, 영화도 아니었고 정치는 더더욱 아니었다. 광주에서 의류 제조업을 하면서 몇십 명 직원을 두고 큰 부를 일궜던 부친의 피가 이 사람 몸에 흐르고 있었다.

호진폴라텍 임원들과 김판수 회장
"내 정체성이 사업에 있다, 여기서 다른 것을 쳐다보고 하면 제대로 될 수가 없다고 생각했고 오로지 사업밖에 몰랐어요. 내가 여기서 뭔가를 이루어야 내 존재 가치가 있는 거지 다른 걸로는 할 방법이 없었어요. 내가 정치를 할 것도 아니고 영화판으로 갈 것도 아니고 먹여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독재정권 시절이었지만 경제는 호황이었으니 사업가로서 정체성을 찾으려던 그의 선택이 그 시대의 흐름에 운 좋게 맞아 떨어진 셈이다.

4.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난 1990년대 이후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밥을 샀다. 이 사람에게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는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잘 드러나지도 않았다. 이름을 밝히고 후원한 곳보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후원한 곳이 더 많다.

근 십여 년 전 우연히 신문에서 리영희재단이 출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후원을 시작했다. 후원을 부탁하는 사람도 없었고 누가 그 재단을 주도하는지도 몰랐지만 이런 단체를 후원하는 사람이 별로 없겠다는 생각으로 매년 1천만 원씩 꼬박꼬박 기부금을 보냈다. 지난해 작고한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에 몇 번인가 적지 않은 돈을 건넸다. 누구에게도 당신에게 돈 줬다고 말하지 않을 테니 외국 여행이라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밥이나 사라고 했다. 좀처럼 팔리지 않을 듯한 책을 고집스럽게 펴내는 출판사 대표와 있었던 일화를 흐믓하게 이야기했다.

"대구에 있는 출판사가 좋은 책을 냈길래 20권 주문하고 200만 원을 계좌로 보냈어요. 출판사 대표가 여자분이던데 이런 문자를 보내왔어요. '저하고 일면식도 없고 인연도 없는 분인데 아무 말도 없이 돈을 보내 주신 것을 보고 너무 놀랐습니다. 제가 인생을 제대로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런 문자를 받고 저도 참 감동스럽더라고요. 어려운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면 돈 자체가 큰 힘이라기보다 그래도 뭔가 열심히 하면 도와주는 사람도 있을 수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것도 상당히 좋은 거 같더라고요."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사업회에 월 300만 원씩 보냈다. 이 사업을 주도해온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먼저 밝히지 않았더라면 묻혀졌을 일이다.

"보통 이런 단체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연회비로 50만 원 정도를 냅니다. 그런 사람들이 100명쯤 있어야 이런 모임이 유지가 됩니다. 그런데 김판수는 월 300만 원씩 냈습니다. 저희에게는 아주 큰 힘이 되었습니다." / 이부영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사업회장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후원금, 기부금만 해도 1년에 7천만 원에 가깝다. 알려지지 않은 후원과 사람들에게 술 사고 밥 사는 것까지 더하면 그 규모는 더 커질 것이다. 알짜 기업이라지만 연 매출 규모가 220억 남짓한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이 감당하기엔 큰 돈이다. 연 1억 원 이상은 좋은 일에 쓰시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그렇게는 안 되고 많아 봐야 5-6천만 원 정도일 거라고 했다. 자신이 쓰는 돈은 박하게 셈을 했다.

" 천성이 남 어려운 것을 보면 못 참는다고나 할까요. 그렇다고 내 분수 모르고 마구 돈뿌리는 것은 아니고 제 분수껏 하는 겁니다. 무리해서 내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 어디에다 뭘 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뭘 한 적은 없습니다. 제 나름대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해왔습니다."

자신의 행적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내켜 하지 않던 사람이 입을 열기로 한 것은 역시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까 싶었다. 인터뷰 요청을 해도 거부하지 않을까 했는데 자기는 별로 할 말이 없는 사람이라면서도 선선히 응했다.

5. 이 사람이 친구들과 의절한 사연은 어딘가 아릿한 데가 있지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보여준다. 친구들 가운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도 있어 이 사람 말을 그대로 옮겨 적기 조심스럽지만 이 사람을 보다 잘 이해하려는 차원에서 적는다.

서울대 문리대 선배이자 친구인 김지하는 배울 것이 많은 사람, 존경할 만한 동지였다. 유럽에서 귀국해서 1969년 구속되기 전까지 김판수가 가장 자주 어울린 사람이 김지하였다. 김지하에게 피신처를 제공하기도 했고 그 인연으로 김지하의 친구이자 서울대 학생운동권의 핵심 인물인 손정박이 김판수의 매제가 되기도 했다. 감옥에 있을 때 작곡 공부를 하면서 만든 '서울길'이나 '사랑의 빛'같은 노래는 김지하 시에 곡을 붙인 노래들이다. 김판수가 1973년 감옥에서 나오고 김지하는 그 무렵 구속되면서 두 사람의 만남은 엇갈렸지만 김지하에 대한 이 사람의 애틋한 우정은 변함이 없었다. 1980년대 초반 김판수는 해남에 살고 있던 김지하를 찾아간다. 김판수는 김지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감옥 안에서 작곡한 '서울길' 악보도 보여주면서 내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너를 생각하며 곡을 쓰면서 힘을 냈다고 말하고 싶었다. 김지하는 이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김지하는 자기 말을 하기에 바빴을 뿐 이 사람의 말과 생각은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다.

감옥 안에서 작곡한 '서울길'은 김지하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시인, 핍박받는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행세하더군요. 자기를 둘도 없는 친구로 존경하고 한 시절을 같이 보낸 친구로 저를 대하는 태도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저는 안중에도 없어요.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그렇다고 제가 거기에서 화를 내고 나올 형편도 아니었고… 참 씁쓸했습니다"

그렇게 한 번 틀어지고 나니 사실상 끝이었다. 1990년대 초반 김지하가 '죽음의 굿판' 발언 같은 것을 하는 것을 보고 그가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깊이 병들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연민이 느껴졌다.

언론인 출신으로 재선 국회의원을 지낸 김태홍은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인 동시에 오랜 동지였다. 1980년대 민주언론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보도지침 내용이 담긴 <말>지를 몰래 운반해준 것도 김태홍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김판수가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일 때 김태홍이 잊지 않고 이 사람을 찾곤 했다. 두 사람의 수십 년에 걸친 우정은 어찌 보면 사소할 수도 있는 일 때문에 크게 어긋났다. 김태홍이 광주 북구청장으로 일하던 무렵 고향에 성묘차 가는 길에 모처럼 연락을 해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런데 김태홍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전, 사후 어떤 양해나 사과도 없었다. 약속 장소에는 그의 부인도 함께 있었기에 그의 자존심이 더욱 상했던 듯싶다.

"우리가 보통 친구, 보통 동창이 아니거든요. 피를 나눈 친구 같은 감정을 주고받은 존재인데 김태홍의 행동은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 너무 벗어난 거예요. 나이가 들어 좀 너그럽게 봐줄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마음으로는 그래도 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 봤습니다."

김태홍이 루게릭병으로 임종을 앞둔 시점에 친구들의 강권에 못 이겨 병상의 김태홍을 찾아가서 눈으로 인사를 나누기는 했지만 마음이 예전처럼 돌아서지는 않았다고 했다. 한번 아니면 영원히 아니라는 얼음장 같은 단호함이 있다. 자존심이 강하고 경우에 어긋나는 일을 못 참는 사람이다.

김판수와 문학평론가 염무웅,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6. 소설가 이청준, 문학평론가 염무웅 그리고 이 사람은 묘한 3각 관계다. 염무웅과 이청준은 서울대 독문과 동기, 이 사람과 이청준은 광주일고 동기다. 이청준을 통해 이 사람은 염무웅을 만났고 세 사람은 한때 하루라도 못 보면 병이 날 만큼 가까운 관계였다. 지금 염무웅은 이 사람이 가장 가깝게 여기는 친구지만 이청준은 한없이 멀어진 존재가 되었다. 반세기 넘게 이 사람과 교류해온 염무웅에게 김판수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참 괜찮은 친구'라고 했다.

"50년 전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지요. 감옥에도 갔다 오고 맨땅에서 사업을 이루고 하는 게 아무나 하는 게 아니잖아요. 눈에 얼른 보이지 않지만 매우 단단하고 일관된 정신이 없이는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 염무웅 문학평론가

글 잘 쓰고 목소리 큰 친구들 사이에서 이 사람이 다소 주눅 들어 지낼 때, 사람들에게 별로 자랑할 게 없다고 생각할 때마다 염무웅은 늘 따뜻한 격려를 잊지 않았다.

"저는 주눅이 잘 드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것은 하나도 제대로 해보지를 못했습니다. 남들처럼 좋은 글 쓰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항상 주눅이 들고 그랬는데요. 요즘에 와서는 건방진 생각인지 모르지만 내가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살든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는 다 지키면서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게 아닐까 싶고 그런 면을 염무웅이가 믿어주고 인정해주고 그런 거죠."

잘 모르는 사람들을 만날 때 김판수는 염무웅에게 종종 동행을 부탁하곤 했다. 염무웅은 낯가림이 심한 김판수가 그 자리의 어색함을 덜기 위해 자신과 같이 가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김판수는 염무웅과 함께 있는 것이 일종의 존재 증명 같은 것이었다. 염무웅이 있어 내 삶이 크게 그르지 않다는 증명이 되는 것이다.

이청준은 광주서중, 광주일고 동기이고 서울대 문리대 시절을 함께 보냈다. 영국에 유학 중이던 김판수에게 자신의 등단 작품이 실린 <사상계>를 우편으로 보내주기도 했다. 이 사람은 문단의 신성으로 떠오르고 있던 이청준이 자신의 막역지우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때로는 너무 많이 아는 것이 독이 될 수 있다. 김판수는 이청준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이청준의 성장기는 징그러운 가난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시절을 돌이켜 보는 것조차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이 사람이 보기에 이청준은 자신이 살을 맞대고 살았던 가난한 시절과 어려운 사람들을 외면했다.

"이청준이 소설가로서 대단히 성공을 했잖아요. 자기가 그랬으니 어려운 사람들의 심정을 잘 알 거 아니예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아예 안 보려고 해요. 자기가 어렸을 때 경험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연민을 느끼기보다는 그냥 거기에서 멀어지려고 합니다. 자기 어려웠을 때 너무 괴롭고 비참했으니까 그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이청준이를 죽을 때까지 안 봤습니다. 친구들이 가자고 해도 안 갔습니다."

배우지 않은 사람들도 쉽게 문학을 접할 수 있어야 되는 것 아니냐는 김판수의 말에 이청준이 '거기 갔다 오더니 주의자가 된 거 아니냐'고 되쏜 것만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어그러진 것은 아니었다. 이청준에게 김판수는 자신의 어려운 시절을 상기시키는 존재, 그래서 돌아보고 싶지 않은 친구였을 것이다. 글 쓰는 일에 대한 동경을 평생 품고 살았던 김판수에게 이청준은 자신이 이르지 못한 영역에서 그만의 왕국을 건설한 사람이었으니 이청준은 자신을 주눅 들게 하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두 사람이 멀어진 것은 어쩌면 예정된 수순인지 모른다.

김판수 그사람
7. 실패와 좌절의 기억이 많다. 평생 문학을 동경하면서 살았지만 제대로 된 글을 쓰지는 못했다. 젊은 시절 꿈은 영화감독이었지만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1990년대 초반 사업으로 돈을 좀 벌자 외국 영화 수입에 나선 것도 영화에 대한 미련 때문인데 정작 돈만 날리고 극장에 수입한 영화를 걸어본 적은 없다. 국가보안법, 반공법 등 나름 화려한 죄목으로 5년이라는 긴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지만 민주화운동의 일선에 서본 적이 없다. 기업을 일군 것이 나름 자랑이지만 큰 돈을 번 것은 아니었고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정도의 기업으로 키운 것도 아니다.

그래도 이 사람이 승자다. 인생이라는 긴 마라톤에서 결승점이 이제는 눈에 보이는 지점에 이르고 보니 이 사람이 승자처럼 보인다. 내내 대열의 후미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선두로 치고 나오는 듯한 느낌이다. 앞에서 달리던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지거나 탈락하거나 뒷걸음을 치는 사이 이 사람은 자기만의 달리기를 계속해오고 있다. 경제적 여유, 건강, 나름 원칙을 지키며 살아왔다는 자부심, 50년 전 일을 어제처럼 회고하는 기억력 등을 앞세워 이제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싶어한다.

-인생에서 어찌 보면 내가 승자라는 생각은 안합니까.
"가장 중요한 건 자기가 세상살이를 제대로 알고 판단을 하고 그 사리를 따져서 자기를 지키면서 사는 것이 중요한 거 아닌가 싶고, 그런 면에서 저는 초심을 크게 흔들리지 않고 그걸 지키고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가 훌륭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나이 들어 실망스럽게 변하는 것을 많이 봤는데 저는 그런 소리를 안 들으려고 합니다. 나중에 그 사람 괜찮게 살다 죽었다라는 말을 들으면 좋겠습니다"

익천문화재단 <길동무> 창립총회
문화예술인들을 위한 작은 사랑방 하나 만들자는 생각에서 비영리재단 <익천문화재단>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모은 재산을 이 사람 방식으로 사회에 환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이 재산 남겨놓고 죽어봐야 아무 가치도 없는 거고 애들한테 물려줘 봐야 아이들을 행복하게 한다는 보장도 없고 오히려 더 불행하게 될지도 모르고. 그래서 이건 내가 쓰고 죽어야 하는데 어디에 쓸까 고민하다가 이런 재단을 만들면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한 삼 년은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만들기로 한 겁니다."

서울 방배동에 문을 연 재단 사무실이 문화예술인들이 언제라도 편하게 들러 쉴 수 있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사랑방이 되기를 바란다. 점심 저녁은 언제든 사겠다는 것이다. 큰 돈 주는 문학상까지는 어렵지만 창작기금 정도는 감당할 수 있겠다 싶었다. 사무실 유지 비용까지 포함해서 일년에 대략 3억 원 정도면 지금까지 출연한 14억 6천만 원으로 자신의 3년 임기는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친구들을 위한 사랑방이지만 자신을 위한 놀이터이기도 하다.

김판수 그사람
말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말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이 사람에게는 5시간의 인터뷰 시간도 부족해 보였다. 듣는 사람이 지치는데 이 사람은 끄떡없이 말을 이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1박 2일 정도 길게 시간을 잡아서 이 사람이 작곡한 노래도 들어가며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렇게 해도 이 사람에게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었다. 말할 자격이 넘치는 사람이고 말할 자리도 이젠 마련되어 있다.

우리 공동체가 기억할 만한 가치의 원형질 같은 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열정, 배려, 용기, 순수 같은 거 말이다. 팔순을 바라보는 사람 표정이 소년 같은 것은 그런 가치를 잃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술은 못 마시지만 지금도 노래방 가면 노래 한 곡조 제대로 뽑는다. 청춘의 빛나던 한때 덴마크 유학 시절 주말 파티에서는 춤 솜씨와 팝송으로 좌중을 휘어잡았던 사람이다. 그런 매력에 빠진 한 핀란드 소녀와의 반세기 순애보가 일간지를 크게 장식한 적도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대개 허물이 쌓이는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고결해지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사람에게는 해당되는 말이 아닌 듯하다.

*이 인터뷰는 4월 22일 서울 방배동 익천문화재단 사무실에서 양만희 논설위원과 2대 1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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