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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2' 조작된 살인자 정원섭, 36년 만의 무죄 선고 '배상금 0원'…지난 3월 별세

'꼬꼬무2' 조작된 살인자 정원섭, 36년 만의 무죄 선고 '배상금 0원'…지난 3월 별세

SBS 뉴스

작성 2021.04.30 04:40 수정 2021.04.30 11:22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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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그는 살인범이 아니었다.

29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이하 '꼬꼬무2')에서는 '조작된 살인의 밤 - 연필과 빗 그리고 야간비행'이라는 부제로 영화 '7번방의 선물'의 모티브가 된 그날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이날 방송에서는 백지영, 안소희, 김진수가 이야기 친구로 등장해 장 트리오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오늘의 이야기는 1972년 강원도 춘천으로 향했다.

만화 가게 아들 10살 정재호가 살고 있던 마을에서 하의가 다 벗겨진 여자 아이의 시신이 발견됐다. 범인은 성폭행을 하려다 여자 아이를 살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발견된 시신은 동네 파출소장의 딸인 초등학교 5학년 윤소미 양. 이에 마을은 한순간에 흉흉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범인이 남긴 흔적은 많았다. 시신 주변에서 연필 1자루와 때가 많이 낀 빗, 그리고 음모가 발견됐던 것. 이에 경찰은 범인이 남긴 음모를 가지고 수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DNA 분석 기술이 전무해 경찰들은 용의자들의 체모와 범인의 음모를 가지고 길이와 색깔, 질감을 비교해 범인을 찾았으나 이는 무리였다.

그리고 사건 발생 이틀째, 갑자기 재호의 아버지인 정원섭이 경찰서에 연행됐다. 소미 양의 바지 주머니에게 TV 시청 표가 발견되었고 당시 TV를 보유하고 있던 만화 가게의 주인인 정원섭이 용의자로 떠올랐던 것. 그러나 소미 양이 갖고 있던 시청 표는 재호네 만화가게의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경찰은 재호의 아버지를 연행했는데 이는 재호네 가게가 소미 양의 집에서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소미 양은 실종 당시에도 만화를 보러 간다며 외출을 했었던 것. 하지만 뭔가 석연찮았다.

아버지가 연행된 지 3일째, 재호의 어머니는 재호의 동생을 출산했다. 그리고 다행히 이틀 후 재호의 아버지도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사건 당일 내린 비로 증거품의 지문은 다 씻겨 지워진 상태였고, 수사도 미궁에 빠진 것.

그런데 재호의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온 지 3일 만에 경찰은 다시 재호의 집에 등장했고 다시 그의 아버지를 연행했다. 한 가지 첩보를 입수했다는 경찰은 이틀 후 파출소장 딸 강간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재호의 아버지 정원섭을 지목했다.

그리고 경찰은 그를 범인으로 확신하는 이유로 몇 가지 증언을 이유로 들었다. 첫 번째 증인인 재호네 옆집 아줌마. 그는 재호의 어머니가 출산했던 당시 집안일을 도왔는데 당시 재호 아버지의 속옷에서 핏자국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증인은 재호네 만화가게 여종업원. 그는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빗이 자신의 잃어버린 빗이고, 자신이 분실한 후 정원섭이 사용하는 것을 봤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증인은 바로 정원섭의 아들 재호였다. 재호는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연필이 자신의 것이며 아버지가 장부 정리할 때 종종 사용했다고 증언했던 것. 이러한 상황에 재호의 아버지는 결국 얼마 후 자백했다.

그는 사건 당일 아들 재호에게 만화 가게를 맡기고 음주를 한 후, 만화 가게로 돌아오던 길에 가게 앞에서 피해자를 만나 으슥한 논둑으로 유인해 성폭행을 시도하려 했으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살해했다는 것. 그리고 그는 이 시각이 밤 8시 50분 경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정원섭의 주장에 재호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사건 당일 밤 아버지가 만화 가게로 돌아온 시간은 9시 20분경이었고, 당시 아버지는 기분 좋게 취해 자신을 예뻐해 주며 신이 났던 얼굴을 떠올리며 충격에 빠졌다. 정원섭의 자백에 의하자면 만화 가게로 돌아온 시간은 바로 범행을 한 직후였던 것.

그리고 이후 더 충격적인 일들이 벌어졌다. 정원섭의 만화 가게에서 일을 하던 10대 여성 종업원들이 그에게 지속적인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고 이에 고소까지 했던 것. 이에 마을은 발칵 뒤집어졌고, 살인범의 가족이 되어버린 재호네는 마을에서 버티지 못하고 야반도주했다.

하루아침 살인범의 자식이 되었던 재호. 그는 "어렸을 때 기억은 좋은 기억이 없다.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산모였던 어머니에게 물을 뿌리고 아기를 목욕시키는데 쏟아붓고 굉장했다"라며 "결국 그래서 못 살고 도망 나왔다. 동생들을 다 데리고 사촌 형이 가지고 온 리어카에 간단한 짐만 실어서 마을에서 도망쳤다"라고 설명했다.

친척 집에서 얹혀살던 재호 가족은 결국 뿔뿔이 흩어졌고, 어머니와 함께 하고 싶어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재호는 당시 비참했던 순간을 잊지 못했다. 그는 "어머니가 사는 데 가서 보는데 깜짝 놀랐다. 철거민들이 모여서 사는 판자촌이었다. 비참했다. 생활이 아예 안 됐다"라고 말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러나 그러한 궁핍한 생활보다 재호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던 것이 있었다. 바로 자신의 증언으로 아버지가 살인자가 되었다는 죄책감이었다. 특히 그는 아버지의 무죄를 확신했기에 그가 느끼는 죄책감은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정도였다.

하지만 자백을 하고 재판을 받게 된 재호의 아버지. 그런데 아버지는 재판을 앞두고 "나는 윤소미 양을 죽이지 않았다. 그날 만난 사실조차 없다. 난 누구를 성폭행한 적도 없다. 난 억울하게 누명을 썼습니다"라며 자신의 범행을 모두 부인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믿어주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고 그는 1심에서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

그렇게 시작된 교도소 수감 생활. 그는 수감 생활 중에도 범행을 부인했다. 이에 그의 수감 생활은 순탄찮았다. 교도소에서 아동 성폭행범은 악질 중에 악질로 분류되는데 그런 그가 범행을 부인하자 재소자들은 그를 향해 집단 폭행과 멸시를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범행을 부인했다.

그러던 1973년, 정원섭을 돕겠다고 찾아온 이가 있었다. 그는 법조인들의 존경을 받는 부장 판사 출신의 이범렬 변호사. 그는 군사정권 시절 반공법 위법, 시국 사건에 무죄 판결을 할 정도로 소신 판결을 했던 법관으로 당시 정권의 눈엣 가시가 되어 스스로 법복을 벗고 변호사가 됐던 것.

이범렬 변호사는 향해 정원섭은 그간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리고 정원섭이 털어놓은 진실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는 두 번째 연행 직후부터 경찰들의 고문이 시작됐고, 거듭된 고문에 버티지 못하고 거짓 자백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정원섭이 당했던 고문은 그가 가방 밑창에 숨겨 아내에게 은밀하게 전달된 수감 일기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빤스 하나만 입은 채 양쪽 팔목을 뻣뻣한 타월 같은 것으로 감고 넓적한 총끈 같은 것으로 양 손을 묶는다. 양쪽 무릎 사이를 경찰 방망이로 꿰뚫어 씌운 팔이 벗어지지 못한다. 나의 몸은 착 꼬부라진 채 대롱대롱 매달렸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는데 이는 일명 비행기 태우기 고문이었다. 특히 당시 경찰은 거꾸로 매달린 정원섭의 얼굴에 수건을 덮고 고춧가루를 탄 물까지 부어 고문을 행했다.

이 고문은 당시 암암리 행해지던 고문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들에게 행해지던 고문을 그대로 했던 것. 이를 버티지 못한 정원섭은 결국 거짓 자백을 했다.

이에 이범렬 변호사는 당시 수사 기록부터 꼼꼼하게 살폈고, 이상한 점들을 발견했다. 시신 발견 당일 작성된 사건 현장 지도에서 이미 정원섭을 피의자라고 명시하고 있었던 점, 그리고 국과수 감정 결과는 사건 발생 보름 후에 나왔으나 수사 첫날 문건에는 이미 국과수 감정 결과를 명시하고 있었던 점 등이 의아함을 자아냈다. 이에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 추측케 했다.

또한 정원섭에 대한 성폭행 피해 증언 등의 추가 증언들이 나오기 시작한 시점이 정원섭의 고문이 시작된 이후였던 것도 석연찮았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수사를 한 것 같은 상황에 또 하나의 사실이 드러났다. 내무부의 산하 기관이었던 경찰. 당시 내무부 장관 김현옥은 경찰에 열흘 시한부 검거령을 내렸고 시간 안에 범인을 찾아내지 못하면 담당자를 문책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 그가 명한 시한부 검거령의 데드라인은 10월 10일이었고 정원섭의 검거가 보고된 일자 또한 10월 10일이었다. 그리고 당시 담당 수사관들은 사건의 수사가 끝나기도 전에 1계급 특진이나 내무부 장관 표창까지 받았던 것으로 드러나 눈길을 끌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모두 알게 된 이범렬 변호사는 의심스러운 정황과 증거를 모두 모아 법원에 제출했고 2심 판결을 기다렸다. 그러나 2심의 판결 역시 무기징역. 그리고 대법원에서도 증거 조사는 적법했다며 정원섭의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이에 정원섭의 담당 변호사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가족들에게 사죄했다. 그리고 그는 재호의 뒷바라지를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재호는 중학교 졸업 후부터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야 했고 이에 학업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재호 씨는 어머니가 일을 하러 가던 길 교통사고를 당해 결국 다리까지 절단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당시 너무나 비참했음을 고백했다.

무기징역 선고를 받은 정원섭 씨는 그때부터 달라졌다. 그는 모범수가 되어 하루라도 빨리 밖으로 나가 자신의 무죄를 밝히겠다는 생각 하나로 수감자들에게 음악과 한글을 가르치고 검정고시반의 교사까지 맡았고 어떠한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에 결국 그는 15년 2개월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성탄절 특사로 석방된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집으로 돌아간 정원섭. 하지만 아이들은 아빠를 알아보지도 못했고, 좁고 낯선 단칸방에서 여섯 식구가 함께 사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특히 정원섭은 생계를 꾸리기 위해 취직 자리도 알아봤지만 그를 써주겠다는 곳은 없었다. 이에 정원섭 씨는 홀로 시골로 떠났다.

그가 석방된 지 9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이범렬 변호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당장 만나자는 것. 그리고 그는 직접 수기로 적고 타이핑을 해 정리한 그의 수사 기록과 재판 기록을 꺼냈다. 이범렬 변호사는 "이걸로 재심 한번 해보세요. 도움이 될 거다. 내가 봐주긴 어려울 것 같다"라며 23년간 간직해 온 기록을 넘겨주었고 얼마 후 사망했다. 사실 이범렬 변호사는 암 투병 중이었고 유품처럼 정원섭 씨의 자료를 모두 건네고 세상을 떠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1999년, 정원섭의 재심을 하겠다는 변호사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재심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며 고소를 했던 소녀들이 경찰의 강요와 협박에 의해 거짓 증언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경찰은 소녀들을 여관방에 일주일간 감금하여 성폭행 피해 증언과 증거품에 대한 증언을 할 것을 강요했던 것.

또한 그중 양심의 가책을 느낀 당시 17세 여 종업원은 진실을 밝혔으나 위증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그리고 최초 목격자는 현장에서 본 연필이 하늘색 연필이 아닌 노란색 연필이라 법원에서 진술했으나 이에 그는 위증 혐의로 구속됐다. 그리고 추후 진술을 번복하자 바로 풀려났다.

사실 현장에서 발견된 연필은 노란색 몽당연필이었다. 경찰은 아들의 증언을 노리고 실제 증거품이 아닌 재호의 필통에서 꺼낸 진짜 재호의 연필로 증거품을 바꿔치기에 사건을 조작했던 것.

그럼에도 재호 씨는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감옥에 보냈다는 사실 때문에 죽어도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며 자신의 손으로 본인을 처단하고 싶다고 밝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정원섭 씨는 변호사들과 재심 신청을 했지만 재심 신청 1년 반 만에 나온 결과는 재심 청구 기각이었다. 법원은 "30년 만에 진술을 번복한 증인들의 증언은 신빙성이 없다"라며 재심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정원섭 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변호사들을 독려했고, 2005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출범되자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드디어 조사가 시작됐고 2년 만에 재심 권고 결정이 내려졌다. 그리고 재판부도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2008년 11월 28일 재심 재판에서 드디어 정원섭의 무죄가 선언됐다. 36년 만에 드디어 밝혀진 진실에도 정원섭 씨는 환하게 웃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교도소에 간 지 3년 만에 병을 얻어 사망, 어머니는 아들 옥바라지만 하다 무죄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당시 그를 고문하고 증거를 조작했던 경찰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혐의를 부인했다. 이에 처벌을 받은 사람은 0명. 재판부도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이라며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검찰 수사 때부터 재판하는 내내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을 주장했던 정웝섭, 그러나 검찰과 재판부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또한 억울한 이가 누명을 쓰며 소미 양의 가족들은 진짜 범인을 받을 기회 조차 잃었다. 사실 사건 당일 수상한 남자를 봤다는 증언도 있었지만 경찰은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결국 윤소미 양 강간 살인 사건은 영구 미제 사건이 됐다.

정원섭의 무죄판결 후 억울한 옥살이의 대가인 형사보상금은 겨우 9억 6천만 원. 그러나 국가는 이를 일시불도 아닌 4번에 나누어 지불했고, 정원섭 씨의 가족은 긴 옥살이와 소송으로 남은 것은 빚더미였다.

이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했고, 1심에서는 26억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배상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정원섭의 손해 배상 소송 2심 진행 중 손해배상 소명 시효를 3년에서 6개월로 축소해 소명 시효가 10일 초과해 배상할 필요가 없다는 황당한 이유였다. 국가 스스로가 돈을 주지 않겠다고 법을 바꾸었던 것. 정원섭 씨는 끝내 한 푼도 배상을 받지 못했고 2심 판결 이후 뇌출혈로 쓰러지고 치매까지 걸려 점점 기억을 잃었다.

제작진을 만난 정원섭 씨는 당일 점심 식사로 무엇을 먹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러나 고통스러웠던 시절의 기억은 그대로였다.

그는 무죄받았을 때를 떠올리며 "좋았다. 여러 사람들과 같이 좋았으니까"라고 답했다. 또한 과거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에는 고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며 경찰들의 끔찍했던 고문의 순간을 증언했다.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던 정원섭 씨는 코로나 19로 면회도 힘들어 아들과의 영상 통화가 유일한 낙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아들과의 통화에서 늘 좋은 소식이 없냐며 국가 배상에 대한 결과를 물었다. 재호 씨는 차마 아버지에게 더 이상 배상을 받을 수 없는 사실을 알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날 방송에서는 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방송 녹화 얼마 전 정원섭 씨가 고문 후유증으로 지병을 앓던 중 합병증으로 결국 세상을 떠났던 것.

그날의 이야기에 김진수는 "같이 분노해 드리는 것, 그것 밖에는 해 드릴 수 없는 게 너무 화가 난다. 너무 죄송하고 부끄러운 게 이제 와서 알고 울고 한다는 게 죄송하다. 이런 이야기를 우린 왜 귀 기울이지 못했을까"라며 눈물을 흘렸다. 또한 백지영은 "정원섭 씨를 고문했던 형사들이 재호 씨한테 죄송하다고 사과라도 했으면 좋겠다"라며 분노했다. 그리고 안소희는 "긴 시간 동안 외롭게 싸우셨을 텐데 하늘에서는 외롭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라고 빌어 눈길을 끌었다.  

(SBS연예뉴스 김효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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