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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2021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새로운 정석

김지미 | 영화평론가

남캘리포니아 날씨는 거의 매일 비슷하다. 덕분에 어제도 오늘같고 오늘도 내일같다. 하지만 작년 오스카 시상식날 날씨만큼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아침부터 하루종일 장대비가 내렸다. 흔치 않은 날씨이기도 했지만 작은 기후 변화에도 오락가락하는 이곳 케이블/인터넷 상황 때문에 하루종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기생충>의 아카데미 생중계를 혹시나 놓치게 될까봐서였다.

시상식 시작과 함께 튼 TV에 염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화면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모자이크였고 소리마저 뚝뚝 끊겼다. 당장 케이블 TV 고객 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 기술자 아저씨는 한없이 느긋하게 오늘은 날씨 때문에 별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다급하게 우리는 한국인이고, <기생충> 때문에 아카데미 시상식을 봐야 한다고 항의를 했더니, 아저씨는 수상 결과를 중계해주며 축하해 주었다. 우리는 전화로 생중계를 들으며 핸드폰으로 뉴스를 검색해야 했다. 다음날 케이블 서비스를 해지했다.

아카데미시상식 오스카 트로피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올해는 식전 행사 때부터 생중계 인터넷 링크를 확보하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이미 십년 전 코로나 시대를 예견했다는 평가를 받는 <컨테이전>(2011)의 감독이자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공동 제작자인 스티븐 소더버그의 말대로 시상식은 '이전과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다. 할리우드의 실력자들이 모여 세를 과시하고, 인기 카테고리 시상만 생중계되었던 예년과 달리 각 부문 후보자들과 관련자들만 초대되었다. 또 참석자들은 빠짐없이 각광받았는데, 화려한 쇼나 입담은 줄어든 대신 주요 부문과 비주요 부분 차별없이 무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늘 주요 부문에 밀려 본 무대에서 상 받는 모습을 보기 어려웠던 메이크업 헤어, 의상, 다큐멘터리, 단편 애니메이션과 단편 극영화 부문의 후보들이 모두 화면에 등장했고 수상자는 무대에 올라 수상 소감과 기쁨을 함께 나눴다. 늘 시상식이 거행되던 대형 극장이 아닌 유니언 스테이션으로 무대가 옮겨졌고, 미국이 아닌 해외에 있는 후보자들은 각자의 지역에서 참석했다. 본래 모습과 형태상 많이 달라졌지만 내용상으론 올해야말로 영화제의 본질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것 같았다.

우선 지난 몇 년 동안 지독하게 아카데미를 따라다녔던 인종과 젠더를 둘러싼 '차별 문제'를 떨쳐내려고 한 의식적인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영화 감독이자 뮤지션인 DJ 퀘스트러브의 디제잉에 맞춰 쇼가 진행되었고, 다양한 인종의 배우들이 시상자로 등장했다. 수년간 논란을 빚었던 백인 위주의 후보선정에서 벗어나 다양한 국적과 인종적 배경을 가진 영화인들을 후보에 올렸다. 특히 감독상, 작품상, 여우 주연상을 휩쓴 <노매드랜드>는 아카데미 최초의 유색인종 여성 감독의 수상이라는 쾌거를 이루어냈다(물론 철저히 백인을 기준으로 한 유색인종이라는 용어 역시 재고되어야 하겠지만). 늘 남성 감독 일색이던 감독상 후보에 수상자인 클로이 자오뿐 아니라 <프라미싱 영 우먼>의 에머럴드 페널 감독까지 여성이 둘이나 있었다는 점도 이례적이고 고무적이었다.

아시안계 이민자 관객으로서 중국계 감독 클로이 자오의 수상도 감동이었지만 한국 영화인들의 등장은 목이 메는 뭉클함이 있었다. 시상식 초반 작년 수상자인 봉준호 감독뿐 아니라 <기생충>이 해외 영화제에서 화제가 될 때마다 함께 주목받았던 통역사 샤론 최의 반가운 등장은 한국 영화의 여전한 화제성을 입증해주었다. 그리고 <미나리>로 주연상 후보에 오른 스티븐 연의 위트있는 멘트로 진행된 기술상의 시상 역시 흐뭇한 미소를 불러왔다. 영화 내 언어 비율 규정에 따라 <미나리>를 외국어 영화상 후보로 제한했던 골든 글로브와 달리, 아카데미는 <미나리>를 본상 수상 후보로 골고루 올려 영화의 가치에 맞는 대접을 해준 점도 마음에 들었다.

미나리 스티븐 연 아카데미시상식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미나리>나 <노매드랜드>의 약진은 코로나 시대로 위기를 맞은 영화계가 받아들인 긍정적인 부작용이다. 통상적으로 영화 제작사들은 영화의 기대 수익에 따라 배급 계획을 세우고 홍보한다. 홍보비용에 따라 대중이 영화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이 달라진다. 한마디로 대규모 홍보비가 투입된 영화들이 더 많은 관객들의 관심을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영화에 투자된 자본에 따라 관객의 작품에 대한 접근 가능성이 달라지는 셈이다. 그러나 코로나 시대는 투자 자본의 크기에 따른 영화 간의 명백한 경계를 상당히 흐려 놓았다. 코로나는 영화들 사이에 견고한 차별적 장벽을 만들던 자본의 플랫폼을 흔들었다. 덕분에 작은 영화들이 더 쉽게 관객을 만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아시아 여성으로는 두 번째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조연상을 거머쥔 배우 윤여정은 20억 원 남짓한 <미나리>의 제작비가 애초에 2백억 원인 줄 알고 수락했다고 인터뷰에서 농담처럼 말했다. 저예산 영화의 열악한 촬영 현장을 버텼던 그는 "요즘 한국에서도 이렇게는 안 찍는다"는 애정어린 투정을 늘어놨다. 한국 이민자 가족의 미국 중부 정착기를 극단적인 서사나 상투적인 감정 없이 섬세하게 담아낸 <미나리>가 독립 영화의 메카인 선댄스뿐만 아니라 주로 대형 영화들의 잔치였던 아카데미까지 무리없이 진출할 수 있었던 데는 앞서 말한 '경계의 흐려짐'이 큰 몫을 했다.

현재 미국은 코로나뿐 아니라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촉발된 'Black Lives Matter' 운동과 그에 대한 반발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혐오를 아시안 전반에 대한 인종적 편견으로 투사한 'Asian Hate Crime'으로도 몸살을 앓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 때문인지 올해 아카데미 후보작들은 흑인 인권 운동 문제, 아시안 이민자, 여성 문제 그리고 장애인 문제와 같은 소수자들의 관점에서 접근한 작품들이 주를 이뤘다. 현실에서 이뤄질 수 없는 상상을 펼쳐내는 '꿈의 공장'으로서 영화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드는 '꿈'을 함께 찾아가려는 영화들에 더 주목한 결과다.

이번 영화제의 수상 소감들 역시 함께 사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촉구하는 발언이 많았다. 인권 신장에 눈에 띄는 역할을 한 영화인에게 수여되는 진 허숄트 박애상을 받은 타일러 페리는 인종, 젠더, LGBTQ-여자 동성애자인 레즈비언(lesbian), 남자 동성애자인 게이(gay), 양성애자인 바이섹슈얼(bisexual), 성전환자인 트랜스젠더(transgender), 성정체성을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사람인 퀴어(queer)의 머리글자를 딴 단어-등 현존하는 다양한 갈등과 소외와 그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사랑을 이야기했다. <작은 신의 아이들>(1986)로 최연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청각장애인 배우 마리 매틀린이 수어로 시상하고 이것이 음성언어로 통역되는 장면은, 익숙했던 '정상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미나리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윤여정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무엇보다도 한국 관객에게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배우 윤여정의 수상 소감이었다. 뉴욕타임즈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들 역시 최고의 수상 소감으로 꼽은 것을 보면 그것은 국적을 넘어선 보편적인 반응이었다. 그는 "글렌 클로즈와 어떻게 경쟁하겠느냐"며 후보에 여덟번이나 올랐지만 이번에도 빈손으로 돌아가게 된 전설적인 여배우에게 존경을 표했다. 나머지 배우들에게도 "우리는 모두 다른 영화에서 다른 역할을 했을 뿐 서로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다"며 겸손하게 치하하고 그저 "오늘 내가 좀 더 운이 좋았을 뿐"이라며 유머로 자축했다. 이 감각적인 수상 소감은 영화제를, 수상을 위한 경쟁의 장이 아닌 서로의 노고를 인정하고 격려해주는 진정한 축제의 장으로 전환시켰다. 그녀의 멋진 연기와 그 연기를 가능하게 만든 깊은 내면을 드러낸 수상 소감을 보며 그녀의 연기와 위트를 동시대에 즐길 수 있는 지금의 관객이야말로 정말 운이 좋은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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