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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쾡이 사냥보단 연애소설!…'연애소설 읽는 노인' [북적북적]

살쾡이 사냥보단 연애소설!…'연애소설 읽는 노인'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288 : 살쾡이 사냥보단 연애소설!…'연애소설 읽는 노인'

 
"그리하여 노인은 다리가 긴 책상 앞에서 고즈넉이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가 아껴 둔 연애 소설을 읽을 수 있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시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여기 한 노인이 있습니다. 연애소설도 있습니다. 이 노인의 취미는 연애소설 읽는 것입니다. 새삼스레 첫눈에 반하거나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런 말랑말랑한 풋사랑과는, 서울에서 아마존만큼이나 거리가 있을 것 같은 노인이 연애소설을 읽는다는 것, 그건 봄날에 가만히 광합성하며 천천히 책 읽는 것과 비슷한 호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번 주 북적북적의 선택은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입니다.

루이스 세풀베다는 칠레 출신의 작가입니다. 책 앞머리 작가 소개를 보면 "반독재 반체제 운동에 참여하다 수감되었고... 오로지 목숨을 구하기 위해 피노체트의 나라에서 도망쳐야 했다... 살해당한 환경 운동가 치코 멘데스에게 바치는 소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발표했다"라고 합니다. 1989년 출간되자마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이 소설은 아마존 강 근처의 어느 마을에 사는 노인이 주인공입니다.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는 나서 자란 고향을 떠나 정부가 말한 '약속의 땅' 엘 이딜리오라는 개간지에 와 말 그대로 '개고생'합니다. 함께 고생하던 아내는 2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안토니오는 현지 인디오인 수아르 족과 친구가 되어 밀림의 삶에 완전히 동화해 수아르 족 아닌 수아르족으로 최고의 사냥꾼으로 거듭나죠. 책과는 꽤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삶을 살았던 그가 왜, 그것도 연애소설을 읽게 됐을까요.
 
"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 방식은 간단치 않았다.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특히 자신의 마음에 드는 구절이나 장면이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러기에 그에게 책을 읽을 때 사용하는 돋보기가 틀니 다음으로 아끼는 물건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플로렌스 바클레이의 '로사리오'를 펼쳤다. 그 책은 어쩌면 그가 진작부터 찾아 헤매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책에 담긴 것은 사랑, 온통 사랑이었다. 그 책은 등장인물들의 아픔과 인내를 얼마나 아름다운 방법으로 묘사해 놓았는지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에 돋보기가 흥건히 젖을 정도였다... 그 책은 그가 오두막의 창문 앞에서 수없이 읽고 또 읽은 텍스트가 되었다. 그리고 그 책은 나중에 치과 의사가 가져다준, 세월보다 더 끈질긴 사랑과 불행을 담고 있는, 다른 책들과 함께 지금처럼 마음이 착잡해진 노인이 다시 찾아줄 때를 기다리며 다리가 긴 탁자 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명확한 이유는 나오지 않습니다. 자신이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걸 노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각한 뒤 뭔가를 읽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이유가 뭔지, 또 그게 왜 하필 연애소설이었는지...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 노인의 취향이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딱딱하고 형식적인 내용'이나 '자신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세상의 이야기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제외했더니 연애소설이 남았다는 데엔 묘하게 공감이 가기도 합니다. 그건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수색대 동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노인은 그 부분을 큰 소리로 반복해서 읽었다. 곤돌라라는 게 수로를 따라 유유히 미끄러지고 있었다면 보트나 카누 같은 게 분명한데 그 이상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울러 폴이라는 주인공은 친구가 보는 곳에서 여자에게 '뜨겁게' 입을 맞춘 것으로 보아 그다지 좋은 녀석이 아닌 것 같았지만, 딴은 작가가 처음부터 나쁜 인물들을 확실히 지적해 준 덕분에 복잡한 생각이나 쓸데없는 동정을 피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할수록 그의 생각은 베네치아라는 도시로 가고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집 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에 강물로 떨어질 수밖에 없을 베네치아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웃고 있었다."

"조금만 더 크게 읽으면 안 될까요?" 숫돌에 칼을 갈던 동료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는지 씨익 웃으며 채근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정말 관심이 있소?" "그렇다니까요. 언젠가 로하에 있는 극장에 간 적이 있었죠. 멕시코 영화였는데,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오더군요. 제기랄! 그런데 여기서 내가 울고 말았다는 얘기를 꼭 해야 하나요?" "좋아. 그렇다면 처음부터 읽어 주지. 자네도 누가 좋은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는 알아야 할 테니까." 노인은 책장을 넘겼다. 그 부분은 이미 수십 번 반복해서 읽었던 터라 보지 않아도 줄줄 외워 나갈 수 있었다.

이 수색대는 뭐냐면 '살인 살쾡이'를 쫓는 수색대입니다. 밀렵꾼에게 습격당한 데 대한 보복으로 인간 사냥에 나선 맹수 살쾡이를 저지하기 위해 수색대가 꾸려졌는데 경험 많고 밀림을 너무나 잘 아는 노인이 여기 참여하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사실 이 소설은 '연애소설 읽는 노인'보다는 '살쾡이 쫓는 노인'의 이야기가 더 핵심인 것처럼 보입니다. 최고의 사냥꾼이긴 했으나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노인이 된 그와, 사람 여럿을 이미 해치고 독이 오를 대로 올라 있는 살인 살쾡이의 한 판 승부, 어떻게 될까요? 노인은 과연, 맨 처음 읽은 대로, 아껴둔 연애소설을 아주 천천히 읽을 수 있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먼저 싸움을 건 쪽은 인간이었다. 금발의 양키는 짐승의 어린 새끼들을 쏴 죽였고, 어쩌면 수놈까지 쏴 죽였는지도 몰랐다. 그러자 짐승은 복수에 나섰다. 하지만 암살쾡이의 복수는 본능이라고 보기에 지나치리만치 대담했다. 설사 그 분노가 극에 달했더라도 미란다나 플라센시오를 물어 죽인 경우만 봐도 인간의 거처까지 접근한다는 것은 무모한 자살 행위였다. 다시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노인의 뇌리에는 어떤 결론이 스쳐 가고 있었다."

작가가 이 소설을 살해당한 환경운동가에게 바쳤다고 밝힌 만큼, 소설에 등장하는 밀렵꾼이나 뚱보 읍장, 살쾡이 등이 상징하는 건 꽤 분명해 보입니다. 어쩌면 '노인과 살쾡이', '노인과 아마존'이 더 어울리는 제목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책과는 멀리 떨어진 삶을 살았던 노인이 사랑과 연애라는 인류 보편의 주제를 나타낸 연애소설에 빠져드는 장면들, 음절과 단어와 문장을 곱씹어 읽으며 천천히 읽어나가는 과정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을 생각해가는 과정에 대한 묘사나 일자무식의 수색대 동료들이 노인이 읽어주는 연애소설에 몰입하는 대목도 꽤나 흥미진진합니다. 작가도 그런 마음으로 썼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결국 제목은 '연애소설 읽는 노인'이 됐겠죠. 처음 읽을 때보다 다시 찬찬히 읽을 때가 더 마음에 남았습니다. 노인이 연애소설 읽듯이 읽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루이스 세풀베다는 작년 코로나에 감염돼 투병하다 별세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바랍니다.

*출판사 열린책들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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