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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소송에 졌는데, 판결문에 이유가 없어요"

[인-잇] "소송에 졌는데, 판결문에 이유가 없어요"

최정규 | '상식에 맞지 않는 법'과 싸우는 변호사 겸 활동가

SBS 뉴스

작성 2021.04.23 11:03 수정 2021.04.27 13:29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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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인-잇] "소송에 졌는데, 판결문에 이유가 없어요"

저서 <불량 판결문> 中
 

[주문]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소송 비용은 원고가 부담한다.

[청구취지]
피고는 원고에게 23,359,200원 및 이에 대한 이 사건 소장부본 송달 다음 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 연 15%의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소액사건 판결 이유 생략]


최근 우리 사무실에 한 분이 판결문을 가지고 찾아왔다. 치과 진료를 받다가 의료사고를 당했는데, 2년 넘게 소송을 진행했지만 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분이 화가 나는 건 판결문을 통해서는 소송에서 진 이유를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 분이 가지고 온 판결문은 달랑 두 장이었다. 사건명, 원고, 피고 표시 등을 제외하면 사실상 딱 앞에 쓴 대로 여섯 줄이었다. 한마디로 '청구를 기각한다. 그러니 소송 비용을 부담하라'가 끝이 판결문.


인잇 최정규
거짓말 같았던 이 분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법원 나의 사건 검색'이라는 법원 운영 사이트를 통해 이 분이 2017년 2월 28일 소송을 제기해 재판을 시작했다는 것과 2019년 10월 24일 판결 선고가 이루어진 것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판결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니 '주문'의 세 가지 의미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인잇 최정규인잇 최정규
억울한 국민들이 억울함을 제대로 헤아려달라며 법원에 신청한 주문(注文)에 대해 판사는 성의없이 주문(主文)만 기재하고 그 이유를 기재하지 않는 판결문을 내놓았다.

마법과 같은 주문(呪文)을 외우면 판결 이유가 나오는 것일까? '혹시 판결문 끝에 있는 문구가 마법과 같은 주문(呪文)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당사자는 이 말의 의미를 물어오셨다. 판결문 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소액사건의 판결서에서는 소액사건심판법 제11조의 2 제3항에 따라 이유를 기재하지 아니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당신이 제기한 소송 금액이 3,000만 원이 넘지 않기에 소액사건으로 분류되었고, 소액사건심판법상 소송금액이 3,000만 원 넘지 않은 소액사건은 그 이유를 기재하지 않을 수 있다고 규정하므로 판결문엔 판결 이유를 기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대로 설명드렸더니 의뢰인은 한참 화를 내셨다.

"왜 제 사건이 소액사건이죠? 제가 청구한 2,400만 원은 제 전 재산보다도 많은 돈인데요"

이 문구는 판결 이유를 알려주는 주문(主文)이 아니라, 화를 부르는 주문(呪文)이었을까? 한참 동안 화를 내고 돌아서며 그 분은 이런 말을 남겼다.

"왜 졌는지 이유를 알아야 항소를 할지 말지 결정할 게 아니에요..."

결국 그분은 항소를 포기했고, 이렇게 억울함을 해결해달라는 주문(注文)은 응답받지 못했다.

청구 금액이 상대적으로 작은 사건에 '소액사건'이라는 딱지를 붙인 건 1973년 소액사건심판법이 제정되면서부터이다. 최초 법 제정 당시 20만 원을 초과하지 아니하는 사건으로 시작한 소액사건의 범위는 1980년부터는 법률이 아닌 대법원규칙으로 바뀌었고, 이후 대법원은 그 범위를 넓혀 2017년에는 3,000만 원에 이르었다. 그리고 소액사건의 경우 판결 이유를 생략할 수 있는 제도는 1981년부터 시행되어 지금에 이른다.

사법부가 제한된 인력으로 각종 소송을 더욱 능률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이러한 조치를 취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청구 금액의 규모만을 기준 삼아 판결 이유 기재를 생략 가능하도록 한 것은 당사자의 권리구제를 등한시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2020년 법원이 발표한 자료(사법연감)를 보면 2019년 전국 법원에 접수된 민사 소송은 94만 9,603건이고 그중 소액사건은 68만 1,576건이다. 즉 소액사건이 무려 71,7%를 차치한다(2019년 법원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18년 전국 법원에 접수된 민사 소송은 95만 9,270건이고 그중 소액사건은 70만 8,760건으로 무려 73,9%를 차치한다). 일반인들이 생활에서 겪는 대부분의 사건에 소액사건이라는 딱지를 붙여 사건 처리 능률을 높이기 위해 청구금액에 따른 기준을 정하는 것이 과연 당연한 것일까?

빌려 준 3억 원을 받지 못해 그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대여금 소송은 그리 복잡한 싸움이 아니더라도 무조건 1심부터 판사 3명으로 구성된 합의부 재판을 받고 구체적인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 판결문을 제공한다. 반면, 의료과실로 입은 피해에 대해 2,000만 원을 배상해달라고 하는 복잡한 의료 소송은 그 청구 금액이 3,000만 원을 초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액사건으로 분류되고, 이유도 적혀져 있지 않은 판결문을 제공한다. 이걸 납득할 시민이 있을까?

2018년 근로자 상위 40~50%의 연봉 평균이 2,864만이다. 자신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에 '소액'이라는 딱지를 붙여 이런 불친절한 서비스를 꾹 참고 버텨야 하는 걸 언제까지 참아야 할까?

일단 대법원이 단순히 규칙을 변경해 소액사건 범위를 결정하는 것부터 중단시키고, 처음 법이 시행되었을 때처럼 법률로 그 범위를 정하도록 하고 다시 신중하게 검토해 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 소액사건의 범위를 단순히 청구금액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옳은지, 사건 처리 능률을 높이기 위해 1973년에 등장한 소액사건이라는 명칭이 옳은지부터 따져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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