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수돗물에 악취가 난다"는 주민 민원이 제기됐다. 지난달 23일 물탱크 보수 공사가 이뤄진 직후였다. 녹물 때문에 물탱크 내부의 녹슨 지지대를 교체하고 패널에 도료를 발라 코팅을 했는데 바로 그날 저녁부터 물에서 페인트 냄새가 났다고 했다. 민원이 이어지자 관리사무소가 업체에 문의했다. 업체는 "냄새는 나지만 인체에는 무해하다"며 "음식 만들 때는 쓰지 말고 냄새가 없어질 때까지 흘려보내고 쓰라"고 안내했다. 이 공지는 그대로 주민들에게도 전달됐다.
선박용인데…"쓰셔도 됩니다"
취재진은 다른 물탱크 보수업체들과 도료 제조사의 본사, 도료를 유통하는 대리점 등에 문의해봤다. 판매 중인 도료에 대한 설명에 '피부에 묻으면 즉시 비눗물로 씻고 이상이 있으면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라"고 쓰여 있는 데도 정말 먹는 수돗물이 저장되는 물탱크에 써도 되는지 물었다. 모두 써도 된다고 했다. 제조사 관계자는 "시중에 많이 사용되고 있는 제품으로 물탱크용 강도 등 기준만 충족하면 사용할 수 있어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실제 온라인 판매 사이트에서 이 선박용 도료는 물탱크 용도로도 이용할 수 있다고 표기돼 있었다.
"인증받지 않은 제품, 쓰면 안 돼"
인증원의 대답을 물탱크 보수업체와 도료 제조사의 말과 종합하면 인증받지 않은 도료가 전국에 흔히 쓰이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수도용 KC인증제도 자체가 2011년에 도입됐는데 업계에서 관행처럼 쓰는 제품이 인증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사용되는 걸로 보인다. 하지만 물탱크는 소유자나 관리사무소 등 민간 책임이기 때문에 수시 검사나 정기 검사는 전무하다. 미인증 수도용 자재가 얼마나 유통되고 쓰이는지 현재로서는 파악조차 안 된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수돗물의 공공적인 특성을 감안하면 민간에만 관리 책임을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각 지자체 상수도사업본부가 모든 아파트나 건물 등을 일일이 검수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행업체 등을 통해 미인증 제품 사용에 대한 감시와 수시 검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직접 수돗물을 쓰고 마시는 시민들이 비용을 부담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면 당장 실행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고 강조한다. 2019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아파트 등 공동주택은 1천400만 호로 전체 주택의 77.2%를 차지했다. 최근 잇단 물탱크 관련 주민 민원은 전문성 없는 관리사무소가 업체 말만 믿고 제대로 된 검증 없이 보수 공사를 진행해 발생한 게 대부분이다. 이제라도 정부가 물탱크 관리에 한 발 더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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