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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식 기자와 평양 함께 걷기] 대중시위로 무너진 동독, 북한에서도 가능할까?

우리는 통일에 준비돼있는가

북한에서 대중시위에 의한 체제 붕괴가 가능할까? 남북한 흡수통일을 상정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입니다.

논의를 보다 분석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동구 사회주의권의 사례를 중심으로 어떤 상황에서 대중시위에 의한 체제 붕괴가 일어났는지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학술적인 부분이 약간 포함돼 있지만 최대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유럽과 남미, 구공산권 국가들의 민주화 과정을 실증적으로 연구한 린쯔(Juan J. Linz)와 스테판(Alfred Stepan)의 연구에 따르면, 대중시위에 의한 체제 붕괴는 동결된 탈전체주의와 술탄주의 체제에서 발생합니다. 동결된 탈전체주의란 탈전체주의적 변화가 시작되다가 동결된 경우이고, 술탄주의란 지도자 개인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왕조적인 체제를 말하는데, 이와 같은 체제에서 체제 붕괴가 일어나는 것은 체제 자체가 경직돼 있어 내부 불만이 정상적으로 수용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집권 세력이나 반대 세력 내에 온건파가 존재할 여지가 없고 집권 세력이 억압적 통치로 일관하면서 개혁에 능동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위기가 닥칠 경우 반대파를 억누르지 못하면 체제 붕괴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동구 사회주의 국가 가운데는 동독과 체코, 루마니아가 이러한 사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를린장벽 붕괴

동독·체코와 루마니아의 차이점


그런데 동독·체코의 사례와 루마니아 사례는 또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동독·체코는 1, 2차 세계대전 중간 시기에 자유민주주의를 경험하는 등 사회주의 성립 이전에 가장 서유럽적인 발전 경로를 가지고 있던 국가였습니다. 민주주의를 한 차례 경험하면서 국민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때문에 두 나라 주민들은 2차 대전 패전 이후 사회주의 정권이 성립된 뒤 정권의 사회주의적 조치에 순응하는 입장이 아니었고, 사회주의 정권은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주민들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억압적인 통치를 시행했습니다. 주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가 정권의 강력한 통제에 의해 억눌려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억압이 가해진다고 해서 민주주의의 경험이 잊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여건만 주어진다면 민주화 시위에 나설 수 있는 잠재적 역량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동독에서 1989년 5월 부정선거를 계기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체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동독 주민들 사이에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잠재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루마니아는 동독·체코와는 전혀 경우가 다릅니다. 루마니아는 사회주의 성립 이전에 저개발 국가였고 국민들도 민주주의의 경험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공산당이 정권을 잡고 독재적 조치를 취할 때에도 국민들 사이에 별다른 잠재적 저항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동구 사회주의 국가 가운데에는 루마니아가 조선이라는 봉건체제가 망한 뒤 일제강점기를 거쳐 김일성 왕조체제로 이전한 북한과 가장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세스쿠

차우셰스쿠가 정권을 잡은 뒤에는 북한과 같은 왕조적 시스템이 더해졌습니다. 차우셰스쿠가 살았던 마을은 성지가 되고 차우셰스쿠의 생일은 루마니아 최고의 명절이 됐으며, 최고지도부는 차우셰스쿠의 혈족을 중심으로 구성돼 차우셰스쿠의 부인, 형제, 아들들이 여러 직책을 독점했습니다. 또, 차우셰스쿠의 아들 니쿠는 차우셰스쿠의 권력 승계자로 알려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민주화를 위한 시위가 스스로 일어날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대중시위가 일어날 수 있는 요건은

그렇다면 동독과 체코, 루마니아를 대중시위에 의한 체제 붕괴로 이끌었던 위기는 어떤 것들이었을까요.

가장 큰 요인은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과 동구권에 대한 소련의 군사적 불개입이라는 외부적 충격이었습니다. 고르바초프가 사회주의 위성국들에게 개혁을 강력히 촉구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던 공산 정권들은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됐고, 소련이 동구권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겠다며 브레즈네프 독트린(동유럽 국가들의 주권은 소련의 지도적 역할이 제한받지 않는 범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으로 소련이 동구권의 자유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내세운 명분)을 철회하면서 반체제 세력들의 입지는 결정적으로 강화되었습니다. 그리고 한번 시작된 탈사회주의 바람은 지정학적으로 인접해 있는 사회주의 국가들에게 연쇄적으로 영향을 주면서 사회주의권의 몰락을 가져왔습니다.

물론,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에는 외부적 충격만이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은 아닙니다. 결국에는 내부에서 대중들이 지속적인 시위를 통해 항의의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체제 붕괴가 가능했습니다.

루마니아 민주화 시위

그렇다면, 이들 국가에서는 어떻게 체제를 붕괴시킬 정도의 대중시위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동유럽 국가들과 쿠바와의 비교를 통해 쿠바에서 대중시위가 일어나지 않는 원인을 분석한 로페즈(Juan J. Lopez)는 대중시위를 위한 필요조건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첫째, 개개인들이 자신들이 정치적 변화를 요구하는 행동에 참여하게 되면 실제로 변화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동독과 체코, 루마니아의 주민들이 거리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헝가리, 폴란드에서의 체제 전환 소식과 소련의 군사 개입이 없을 것이라는 신호 등으로 인해, 대중시위에 가담해도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며 자신들의 행동이 정치적 변화를 추동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기 때문입니다.

둘째, 상시적으로 주민 대다수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반체제 세력의 독자적인 통신망이 있어야 합니다. 반체제 세력이 독자적인 통신망을 가지고 있지 못하거나 정부가 그 통신망을 철저히 차단하는 상황에서는 지속적인 대규모 대중시위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대중들이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왕조적 전체주의 체제인 루마니아에서조차 지속적인 대중시위가 가능했던 것은 헝가리 텔레비전이나 자유유럽 라디오 방송망과 같은 정보 유통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루마니아 주민들은 이러한 통신망을 통해 루마니아 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고, 자신들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를 결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다 체제 내에 반체제 세력의 구심점이 존재하는지도 대중시위의 중요한 요인입니다. 동독의 경우 평화와 환경, 인권 등을 목표로 하는 단체들이 교회의 보호 아래 형성돼 있었고, 이들이 1989년 5월 부정선거를 계기로 정치 세력으로 조직화하면서 적극적인 저항운동에 관여했습니다.

체코의 경우에도 비정치적인 인권단체로 출발한 '77헌장'이 정치적 반대조직으로 발전하면서 반체제 시위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그 누구도 독재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루마니아의 경우 반체제 세력이 존재할 여지는 거의 없었지만, 종교의 그늘 아래 차우셰스쿠를 비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루마니아 대중시위의 도화선이 된 티미쇼아라 사태도 차우셰스쿠 정권을 비판해온 퇴게스 목사를 강제로 추방시키려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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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대중시위가 가능한가

지금부터는 북한의 현재 상황을 짚어보며 대중시위가 가능한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북한은 동독, 체코, 루마니아처럼 외부적 충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다. 북한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사회주의 국가는 중국인데, 현재로서는 중국이 단시간 내에 급속한 위기에 처하거나 북한에 강력한 민주화 압박을 가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 입장에서는 북한이 어떻게든 유지되는 게 국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에서는 또 주민들이 대중시위를 통해 변화를 이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여건이 아닙니다. 집단행동을 억제하는 폭압적 통치체제가 아직은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일성 일가는 체제를 보위하는 핵심 세력만큼은 운명 공동체임을 강조하며 특별히 관리하고 있고, 정권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죽이고 가족과 친척들까지 정치범수용소로 끌고 가는 등 공포정치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주민통제기구들의 근간이 허물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주민들이 조만간 공포감을 이겨내고 불만을 공개적으로 표출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대중시위를 가능하게 할 반체제 세력의 통신망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북한의 모든 정보는 기본적으로 북한 정권에 의해 통제되며, 북한 정권이 원하지 않는 정보는 공식 채널로는 유통되지 않습니다. 대북민간단체들이 단파라디오 방송을 통해 북한에 외부 정보를 유입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고, 북중 접경지역을 통해 또 북한 내에 보급이 확산된 휴대전화를 통해 정보가 유통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 수준으로 대중시위가 전국적으로 파급될 정도의 실시간 정보 유통이 가능할지는 회의적입니다. 체제를 붕괴시킬 정도의 대중시위가 일어나려면 평양에서 수십만이 모여서 시위를 한 것을 함흥, 원산, 신의주에서도 실시간으로 알 수 있고, 이에 호응해서 전국적으로 대중들의 움직임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야 하는데 지금의 북한 상황에서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북한 내에 반체제 세력의 구심점이 될 만한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점도 대중시위를 어렵게 하는 요인입니다. 과거 남한의 군사정권 시절에는 김대중이나 김영삼 같은 야당 정치인이 반정부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민주화 시위를 이끌었지만, 북한에서 이러한 구심점 역할을 할 사람이나 조직은 찾기 힘든 실정입니다. 반체제 세력의 구심점이 될 사람이나 조직을 논하기에 앞서, 그러한 논의가 이뤄질 수 있는 최소한의 정치적 공간마저 보이지 않는 것이 지금 북한의 현실입니다.

끝없이 계속되는 경제 상황의 파탄이 북한 체제를 위기로 몰아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으나, 북한 주민들은 경제 파탄에 어느 정도 적응돼 있을 뿐 아니라 경제 위기는 특정 정치 세력의 의식적 노력에 의해 집단행위로 표출되지 않는 한 체제를 뒤흔들만한 요소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쉽게 말해, 특정 정치 세력이 의도를 가지고 경제 위기를 정치적 시위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한,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체제 붕괴를 이끌만한 대중시위가 발생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볼 때, 머지않은 시기에 동독이나 체코, 루마니아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대중시위가 북한에서 일어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동구 사회주의권에서와 같이 시민혁명으로 북한 체제가 붕괴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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