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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책임의 재구성

[취재파일] 책임의 재구성

법관 독립과 공수처, 이재용 수사심의위를 둘러싼 논란

원종진 기자 bell@sbs.co.kr

작성 2021.04.06 09:43 수정 2021.04.06 10:35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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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1·2대 도시의 보궐선거에 세간의 관심이 쏠린 상황 속, 법조계가 자리한 서울 서초동에서는 최근 크고 작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법원에서는 처음으로 '사법농단' 혐의를 받은 법관들에 대한 유죄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법원 건너편인 검찰에선 '검찰 개혁'의 일환으로 탄생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와의 갈등이 표면 위로 터져 나왔습니다. 한편으로는 검찰 내에서도 각종 위원회를 둘러싼 잡음들이 새나오면서, 일부는 수사 대상으로까지 비화된 상황입니다. 이번 취재파일에서는 최근 법조계에서 벌어진 일들을 통해, 국민들 기본권에 큰 영향을 끼치는 사법기관과 법조 엘리트들의 책임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법농단 첫 유죄' 판결이 던지는 화두 : 법관 책임의 재구성, 어떻게 할 것인가

사법농단 유죄
지난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재판장 윤종섭)는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기소된 법관들에 대해 첫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판결문에 등장하는 대목을 두고 법관들 사이에 약간의 논란이 일었습니다. 대법원장, 법원행정처장, 법원행정처 차장 등 사법부 행정을 담당하는 고위 법관들에게 '특정 사건 재판의 명백한 잘못에 대해 지적할 권한'이 있다고 재판부가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재판부가 판결문을 통해 설명한 논리는 이렇습니다. 재판부는 양승태 대법원에서 사법행정권 남용이 벌어졌던 시기에, 사법부가 법관들 상호 간의 경쟁과 평가를 통해 '좋은 법관'들을 양성해왔다고 봅니다. 지방법원 배석판사-지방법원 단독판사-고등법원 배석판사-지방법원 부장판사-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이어지는 사다리와,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 압력 속에 법관들이 나태해지지 않고 재판 업무에 매진하게 되는 구조였다는 것입니다.

흡사 착즙 과정을 연상케 하는 엄청난 압력을 통해 사법부가 법관을 양성한 것은 궁극적으로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라는 헌법상 가치를 달성하기 위해서였다고 재판부는 설명합니다. 사법부는 이러한 경쟁과 평가의 과정 속에 책임과 자격을 갖춘 법관을 양성해왔는데, 사법행정권자는 그 과정의 한 부분으로서 재판의 '핵심 영역'에 대해서도 명백한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사법농단' 피고인들이 받고 있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가 성립하기 위해선, 그들이 행사한 권력이 직무상의 '권한'으로 인정되어야 합니다. 재판부는 이처럼 재판 핵심 영역에 대한 사법행정권자들의 '지적 권한'이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사법농단 첫 유죄 판결'이 가능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 핵심 영역에 대한 지적 권한'을 두고 논란이 일었습니다. 고등법원의 한 판사는 "재판부는 사법행정권 남용에 유죄를 선고한 것이긴 하지만, 논리의 구성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재판의 핵심 영역에 대해서 법원행정처에 있는 고위 법관이 '지적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인정한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재판부에 대한 개입의 통로로 악용될 소지가 있어 보인다"고 덧붙였습니다. 지방법원의 한 판사 역시 "담당 재판부가 재판 개입을 단죄하고자 한 취지는 이해한다"고 전제하면서도 "재판의 핵심 영역을 법원행정처 고위직이 '지적'할 수 있다고 표현한 것은 '법관의 독립'과는 결이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다른 시각도 있었습니다. 다른 지방법원의 한 판사는 "결국 이 재판부 논리의 핵심은 재판 개입 행위는 형법으로 처벌될 수 있다는 것"이라며, "재판부 논리의 전제가 재판 개입의 길을 열었다는 것은 판결문을 다소 오독한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습니다.

'법관 독립'이라는 전제와 관련한 판사들 사이의 논란은 언뜻 그들 직역 내부에서나 중요할 이야기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도 관심을 갖고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법관 독립'은 일반 국민이 '법률에 따른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가 쓴 판결문 또한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와 '재판의 법률 기속성'을 강조하면서, 법관의 독립은 그에 '버금가게 중요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사법농단 국면에서 지고의 가치로 여겨지고 있는 '법관의 독립'은 국민에게 좋은 재판을 함으로써 법관의 책임을 다하기 위한 장치로서 다뤄져야 한다는 시각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판결은 형사법적 단죄를 넘어 사법부와 우리 사회에 중요한 과제를 남기고 있습니다. '산더미 같이 쌓인 업무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에게 좋은 재판을 할 수 있는 책임있는 법관을 우리 사법부는 그들의 독립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길러낼 수 있는가?'에 관한 숙제 말입니다. 이는 과거 사법부에 존재했던 피라미드 조직에서의 경쟁과 일방적인 하향 인사 평정이 아닌, 새로운 방식의 법원 운영체제를 앞으로의 사법부가 어떻게 구상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사법부가 이 과제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할 시기는 외부의 정치 환경에 따라 갑자기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사법농단 사태 이후 입법부와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사법 개혁의 일환으로 기존의 법원행정처 대신 '사법행정위원회'를 설치하자는 주장이 제기돼 왔습니다. 이들은 새롭게 설치된 '사법행정위원회' 구성원 과반수에 법관이 아닌 외부인을 넣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법농단 사태 이후 탄생한 김명수 대법원은 그동안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러한 외부의 주장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해왔습니다만, 이후 새로운 사법 질서에 대해 사법부가 의미있는 목소리를 내려면 이제는 '반박'을 넘어 '대안'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첫 사법농단 유죄 판결 이후, 사법부에 던져진 '법관 책임의 재구성'이라는 화두에 답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공수처-검찰 간 갈등이 던지는 화두 : 수사기관 책임의 재구성

공수처, 검찰
최근 벌어지고 있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와 검찰 사이의 갈등도 새로운 편제를 맞은 우리나라 수사기관들 사이 '책임의 재구성'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공수처는 지난달 수원지검에 이규원 검사의 '불법 출금' 사건을 이첩하면서, '수사 완료 후 기소 여부를 공수처가 판단할 수 있도록 사건을 다시 공수처로 송치해달라'는 취지의 공문을 보냈습니다. 이에 대해 수원지검 수사팀장인 이정섭 부장검사는 지난달 15일 검찰 내부망에 직접 글을 올려 공수처의 논리가 잘못됐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우선 법률상 '이첩'이라는 것은 한 기관이 다른 기관에 <사건>을 보내, 그 기관이 자신의 [권한]으로 그 <사건>을 처리하도록 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첩'은 기관들이 [권한]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주고받는 행위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권한]은 행정부 각 기관들이 갖는 고유의 영역이기 때문에, 상하관계가 아니면 서로 주고받거나 침해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사건>을 이첩받은 검찰은 자신들의 [권한]인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행사하는 게 당연하다는 해석입니다. 이러한 해석을 전제로 이 부장검사는 '이첩 후에도 기소할 [권한]은 갖고 있겠다'는 공수처의 논리는 '수사할 [권한]만 검찰에 넘기고 기소할 [권한]은 갖고 있겠다'는 뜻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이 부장검사는 이러한 공수처의 논리는 '이첩'을 <사건>이 아닌 [권한]을 주고받는 일로 착각한 데서 비롯된 일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공수처가 법적으로 갖고 있지 않은 검찰에 대한 수사지휘 [권한]을 행사하는 꼴이 된다고도 지적합니다.

박근혜 국정농단 사건과 조국 일가 수사 등을 한 경험이 있는 창원지검 통영지청 강백신 부장검사는 이러한 해석을 '국가기관의 기능과 책임'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글을 올렸습니다. 강 부장검사는 글에서 "각 기관에 분배되어 있는 권한 자체는 헌법과 법률에 의하지 않은 채 다른 기관에 위임을 할 수 없다"며 "(한 기관이) 자신의 권한에 근거해 다른 기관의 권한을 임의로 제한할 수도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헌법과 법률에 의해 해당 기관에 부여된 권한을 법적 근거 없이 기관장이 임의로 위임하거나 이첩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국가기관이 아닌 다른 사인에 대한 임의적 위임이 가능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 경우 국가기관은 정상적인 작동을 할 수 없고 부여된 책무를 다할 수 없다고 우려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그와 같은 논리라고 한다면 국정농단 사건 관련 대통령이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의 일부를 사인인 최서원에게 위임하여 행사하게 하는 것도 가능하게 된다는 기괴한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도 덧붙였습니다.

김진욱 공수처장
그러나 검찰 간부들의 반발에도 김진욱 공수처장은 기존 주장을 고수했습니다. 지난달 16일 열린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김 처장은 "검찰은 공수처가 사건을 이첩하면 '게임 끝났다', '관여 권한 없다'고 하는데, 이건 '단순 이첩'"이라며 "(공수처가 주장하는 것은) 단순 이첩이 아니라 향후 공소권 행사를 유보한 '유보부 이첩'"이라고 발언했습니다. 공수처 관계자는 이에 대해 "공수처는 검사 등 고위공직자 범죄 수사와 기소를 우선적으로 타겟팅해 만들어진 기관인 만큼, '유보부 이첩'이라는 방식을 통해 고위공직자에 대한 기소권을 담보할 수 있다는 취지의 해석"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신생 수사기관의 '권한'에 대한 기관장의 이 같은 해석은 중요한 지점을 놓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검찰미래위원회와 경찰개혁위원회 등 수사기관 개혁 작업에 참여해 온 양홍석 변호사(법무법인 이공)는 SBS와의 통화에서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형사사법 작용은 매우 크고 위험한 권한이기 때문에, 형사소송법에 엄밀히 규정된 절차를 통해서만 작동돼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공수처장의 이러한 법률 해석은 들어보지 못한 방식의 해석일뿐더러, 엄격한 법 규정을 통해 작동해야 할 형사사법제도를 기관장의 '해석'을 통해 창출하는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처럼 수사기관의 권한이 명확히 정리되지 않고 '해석'의 영역에서 배회할 때, '권한'과 동전의 양면인 '책임'과 관련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첩과 재이첩, 기소 전 재재이첩 등 복잡한 과정을 통해 하나의 형사사법 작용이 여러 수사기관들의 손을 거친다면, 유무죄 판결이라는 최종 결과에 대한 책임 소재는 그만큼 모호해질 수 있습니다. 당장 지난주 기소된 이규원 검사의 경우, 법정에서 검찰의 기소권 행사가 부당하다는 주장을 개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처럼 고위공직자인 피고인이 기소권 행사의 부적절함을 주장할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이 기소권을 행사한 검찰에 있는지, 아니면 '유보부 이첩'을 해 기소권이 자신에게 있다면서도 이를 행사하지 않은 공수처에 있는지 애매해지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 후보는 물론 야권 후보들까지 공수처의 설립 필요성을 주장했던 것은 공수처라는 기관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요구는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에 대한 '관용차 에스코트' 조사에서처럼, 고위공직자의 인권을 필부의 그것보다 더 중히 살피라는 취지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검찰을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수사기관이 검사를 비롯한 고위공직자 범죄를 유독 감싸준다는, 그래서 그들의 잘못에 '책임'을 제대로 지우지 못한다는 국민적 여론이 컸기에 공수처의 탄생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벌어지고 있는 수사기관 사이의 갈등은 이 기관들의 책임성을 제대로 구성할 수 있는 방향으로 다르게 전개되어야 합니다.
 

검찰 내 각종 위원회들을 둘러싼 잡음이 던지는 화두 : 검사 책임의 재구성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근 검찰 내 각종 위원회를 둘러싸고 일고 있는 잡음들도 '책임의 재구성'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우선 프로포폴 불법 투약 혐의를 받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수사심의위 이후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겠습니다. 대검 수사심의위는 7대 7 동수로 이재용 부회장 프로포폴 투약 혐의에 대한 기소/불기소 권고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이후 이재용 부회장 측과 검찰은 각자 동상이몽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부회장 측은 언론을 향해 '수사심의위 조차도 기소를 권고하지 못한 무리한 수사'라는 주장을 개진하고 있습니다. 반면 검찰은 '신청인인 이재용 부회장의 기소 중단 요구를 위원회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공은 검찰에게 넘어왔다'는 입장입니다. 수사심의위 결론이 나온 지 일주일이 넘었지만 수사 지속과 기소 여부에 대한 결론은 나오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상황에서 만약 검찰이 불기소 결정을 내린다면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요?

지난번 취재파일( ▶[취재파일] '프로포폴' 이재용 수사심의위 소집이 던지는 몇 가지 질문들)에서도 지적한 적이 있지만, '이재용 봐주기'를 했다는 비판에 대해 검찰은 수사심의위 핑계를 댈 공산이 큽니다. 반면 '수사심의위가 또 가진 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데 활용됐다'는 비판에 대해 수사심의위는 '7대 7이었으니 기소 결정은 검찰이 한 것'이라고 검찰 핑계를 댈지도 모릅니다. 비슷한 혐의로 마약류 투약 혐의 수사를 받고 있으나 수사심의위 부의 결정도 못 받은 피고인들은 형평성 문제를 제기할 것이고, 앞으로의 마약류 투약 혐의 피의자들에게도 참고 사례가 될 것입니다. 서로 네 탓을 하는 핑퐁게임 속, 수사와 기소를 결정하는 검사의 '책임성'에 대해선 본의 아닌 물타기가 이뤄질 것입니다. 세월이 지난 먼 훗날 우리 사회가 이 사안에 대해 되짚어보고자 할 때, 어딘가 남아있어야 할 '책임의 기록'은 연기처럼 흩어져 찾을 수 없게 돼 있을지도 모릅니다.

검찰과 피의자 양측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 사안에서 이재용 부회장을 무조건 기소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검찰이 이 부회장에 대한 불기소 결정을 내리더라도 이런 식의 방식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소환에 불응하고 있는 피의자에 대해 조사가 이뤄지고, 그 조사가 적절했는지에 대한 검찰 안팎의 감시가 함께 이뤄진 뒤, 이를 바탕으로 사건에 대한 결론이 나는 것이 책임 있는 사법 작용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최근 다시 불거진 '검찰 과거사 재조사'와 관련된 논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변필건 부장검사)는 김학의 재조사 과정에서 조사단 파견 검사가 사안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수사하고 있습니다. 조사단에 몸담았던 인사들이 여럿 검찰에 소환됐고, 수사팀은 대검찰청과 중앙지검을 압수수색해 <검찰 과거사 진상조사단> 관련 자료들을 압수해 분석 중입니다. 과거사를 정리하겠다고 출범했던 위원회는 이제 또 다른 과거사가 될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그런데 김학의 사건을 재조사한 조사단은 2019년 당시 통일된 의견의 보고서는 물론 백서도 발간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검찰의 무책임한 과오를 돌아보고자 만들어진 위원회가 변변한 기록유산조차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은, '과거사에 대한 과거사'를 돌아보게 된 이 시점에서 또 한 번의 책임 실종 사태를 불러오고 있습니다.
 

'책임의 재구성'은 가능할 것인가

법조계에서는 사람들 사이 책임 소재를 가려 그에 합당한 무게를 지우는 일들이 이뤄집니다. 본디 책임이 생명이라는 정치의 영역에서 이 일을 전혀 하지 못하는 마비 상태가 이어지면서,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모든 사안에 대한 책임 따지기가 법조 영역에서 벌어집니다. 이 과정을 축약적으로 설명하는 '정치의 사법화'라는 단어는 십수 년 전부터 한국의 사회 현상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고유명사가 됐습니다.

하지만 그 법조 영역에서마저 '책임'은 마의 삼각지대 어디론가 들어간 뒤 사라져버리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밀려드는 책임 소재들이 법조계라는 하수종말처리장에서조차 걸러지지 못하고 혈관 속의 혈전처럼 응어리져 뭐라 부르기도 애매한 괴물질이 돼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람직하지는 않으나 '정치의 사법화'를 현실에 존재하는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현재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큰 문제는 '사법'의 영역에서조차 책임 소재를 가려낼 수 없는 일들이 예전보다 더 자주 벌어지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매일같이 법원과 검찰청 앞으로 밀려드는 화환과 조화들, 대법원장과 검찰총장더러 자결하라는 말까지 적힌 채 나부끼고 있는 현수막들. 이 소란 뒤에서 점점 보이지 않게 된 '책임성'을 우리는 재구성해낼 수 있을까요? 이것은 주식시장이나 경마판 실황 중계만큼이나 실시간으로 법조뉴스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상황 속, 모두가 곱씹어봐야 할 질문입니다. 국가 권력 행사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먼 훗날 국가기관을 상대로 청구서를 내밀어야 할 때, 가장 먼저 찾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들 기관과 엘리트들의 '책임 소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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