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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바이러스'와 계약을 맺다?

- SDF2020 김홍중 교수(서울대 사회학과) 강연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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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중 교수(서울대 사회학과)는 지난해 SBS 대표 포럼 'SDF2020'에서 <사회계약을 넘어 자연계약으로: 코로나19에 대한 문명사적 성찰>을 주제로 강의를 선보였습니다. 김 교수는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전공은 사회 이론과 문화사회학입니다.
김 교수는 학문적 관심의 핵심에 '마음'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마음'은 주로 집합적 욕망과 믿음의 에너지를 가리킵니다. 마음은 힘으로 작용하면서 현실을 만들어가는 동력입니다. 바람처럼 인간들을 움직이고, 행위하게 하고, 건설하게 하고, 파괴하게 하는 이 힘의 흐름을 탐구함으로써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 가는가를 해명하는 것이 김 교수가 집중하는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론적 관점으로, 민주화 시대 이후 386세대를 이끌어간 진정성의 욕망을 분석했으며, 21세기 밀레니얼세대의 생존주의적 욕망을 같은 맥락에서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인간들이 구성하는 사회를 넘어서 환경과 비인간의 영역으로 관심이 확장되었는데요, 인류세, 포스트휴머니즘, 그리고 새로운 미래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탐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김홍중 교수가 'SDF2020'의 청중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간추린 내용입니다.

* 강연 영상 다시보기를 원하는 분들은 [▶SDF2020 홈페이지][▶유튜브]를 이용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사회학자 김홍중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코로나19에 대해 성찰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카툰(cartoon) 하나를 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외계인이 천신만고 끝에 지구에 도착했네요. 그런데 와서 보니, 지구가 휴업 중이군요. 별이 하나 폐쇄되었습니다. 저 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정작 이 재난을 어떤 언어와 관점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사회 이론을 전공합니다. 이론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난해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복잡한 말들의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사실 그 용어의 그리스어 어원인 테오리아(* <보는 것>, <관상>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명사)는 지극히 감각적인 행위, 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론가는 어떤 현상에 놀라서 그것을 보는 사람입니다. 팬데믹 재난 속에서 우리 자신은 이렇게, 저렇게 놀라는 이론가들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계신가요. 바이러스입니다."


"바이러스가 무대를 독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이러스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를 바이러스의 시대이자 무대라는 의미에서 바이러스 씬(scene)이라 한 번 불러봅니다.

사실 20세기 후반에 대규모 생태 변화에 의한 신종 전염병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기후 변화, 집약 농업, 삼림 벌채, 공장식 축산, 그런 인간 행위가 인수 공통 감염병의 새로운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환경과의 연관 속에서 나타난 질병이라는 의미에서 이를 에코 데믹이라고 부릅니다. 컨테이젼이라는 영화가 바로 그런 상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대 기업이 숲을 파괴해서 서식처를 잃은 박쥐가 인간에게까지 바이러스를 전염시키는 상황이 그려져 있습니다."


"코로나19는 에코-데믹입니다. 2019년 겨울 중국 우한에서 야생 큰 박쥐를 숙주로 하고, 천산갑을 매개로 하여 인간에 전염된 코로나19가 발생합니다.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현재 커다란 사회 변동을 야기하고 있는데요. 한국과 전 세계에서 다수의 확진자와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물론 과거에 더 치명적이었던 감염병들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지구화된 세계에서 이렇게 동시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팬데믹을 체험하며 함께 고통받는 상황은 아마도 인류 역사에서 최초라고 해도 그다지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재난이 가져온 충격파는 지적 영역을 자극해서 소위 담론 폭발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경제, 경영, 철학, 교육학, 사회학, 신학 등, 그 분야도 매우 다양합니다, 그중 철학자 지젝은 자신의 '팬데믹 패닉'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바이러스는 우리 삶의 기반들 자체를 흔들어놓을 것이다.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길은 없고, 새로운 노멀이 우리 삶의 잔해들로부터 만들어질 것이다.' 지젝은 우리가 생활양식 전체의 갑작스러운 종말을 맞이하고 있다고 봅니다."


"과히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스크는 이제 생활의 필수품이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도 마스크를 씁니다. 악수 대신, 팔꿈치나 주먹을 부딪치기도 합니다. 거리두기 또한, 관습이 되어갑니다. 운동 경기장에는 관중 대신 인형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원격 소통, 원격 수업, 상담, 진료가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SF 영화의 장면들을 보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작년 겨울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어떤 새로운 사회의 풍경이, 새로운 사회의 계약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계약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대 사회는 17, 18세기의 유럽에서 만들어진 사회계약의 결과로 형성된 것입니다. 약 300년이 넘는 근대를 지배해온 기본 시스템이 거기에서 비롯되어 있습니다. 홉스, 로크, 루소가 뼈대를 놓은 계약론의 핵심은 사회 구성의 근본 원리를 사람들의 동의에서 찾는 것입니다. 신이 아니라 인간이 사회를 만듭니다."


"그런데 여기 몇 가지 주목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 흔히 먼 과거에 실제로 있었다고 상상이 되는 사회계약은 실제로는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회계약이란 미래에 대한 약속에 더 가깝습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새로운 목소리를 내는 주체가 나타날 때마다 우리는 계약을 통해 삶의 규칙들을 바꾸어 갑니다.

사회계약은 그래서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논쟁, 투쟁, 혁신, 혁명을 통해 갱신이 되는 일종의 프로세스입니다. 둘째, 사회계약은 사실 백인, 유럽, 남성들만의 것이었습니다. 여성, 어린아이, 장애인, 비서구인, 동물, 식물은 계약의 주체가 아니라 지배의 대상으로 계약된 것입니다. 1651년에 출판된 홉스의 리바이어던 표지를 보면, 계약을 통해 형성된 국가를 상징하는 인공 인간이 등장합니다. 그 피부의 사람들만 존재합니다. 남성들만 존재합니다. 근대 사회의 원형적 이미지가 바로 저것입니다."


"그런데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세르(Michel Serre)는 1990년에 출판된 '자연계약'이라는 책에서 전통적 사회계약의 한계를 바로 이 자연에 대한 태도에서 발견합니다. 사회계약은 자연을 소유와 이용의 대상으로만 보았습니다. 그 결과, 우리 시대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 전쟁을 하듯이, 서로 적대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진단입니다. 환경 오염과 온난화는 자연계약 없는 사회 계약의 한계를 극명히 드러낸다고 봅니다.

세르는 21세기 문명이 지속되기 위해서 새로운 자연계약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의 자연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까요? 때로는 거대한 파괴의 힘으로, 그리고 때로는 희생된 주검이나 고통의 얼굴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미디어에서 종종 만나게 되는 저 동물들의 얼굴을 바라보십시오. 세르가 말하는 자연계약은 저들과의 이야기입니다. 마치, 편협한 근대의 인간만의 사회 계약을 갱신하고, 자신들과 좀 더 전향적인 사회계약을 맺자고 저들이 요구하는 듯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같이 생존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당신들이 누리는 생명권을 자신들에게도 부여해달라고 호소하는 듯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자연계약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물질 또한 중요한 파트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1945년 지구상에서 최초의 원폭 실험과 원폭 투하가 있었습니다. 이후 수많은 원전이 지어졌고, 체르노빌, 후쿠시마에서의 파국적 참사도 있었습니다. 이 과정을 겪으면서 인간은 원자력이라는 물질의 힘과 약 70여 년째의 계약을 이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독일은 이제 원전을 폐쇄하는 방식으로, 프랑스는 원전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계약했습니다."


"21세기는 이런 비인간들과의 전면적 계약이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이산화탄소, 광우병을 일으키는 프리온, 미세플라스틱, 항생제, 살충제, 환경호르몬, AI 혹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미지의 물질이나 미생물과 사회가 새로 계약을 맺어 나가야 합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이러스입니다. 바이러스란 무엇입니까. 세포질도, 대사 기능도 없이 단백질에 둘러싸인 RNA, 혹은 DNA 조각들입니다. 평소에는 죽은 듯이 있다가 숙주 세포 속으로 들어가면, 맹렬하게 생명 활동을 하는 바이러스는 생명과 비(非)생명의 경계선에 놓여있는 매우 흥미로운 존재입니다.

인류가 바이러스를 인지하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로, 20세기 초반에야 비로소 현미경으로 그 실체를 확인합니다. 바이러스 같은 비인간과 계약을 맺는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이 문제를 고민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근대를 지배했던 인간 중심주의를 깊이 성찰해보아야 합니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인간에 전폭적인 특권을 주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사고하는 인간, 코기토 (* Cogito-'나는 생각한다'의 라틴어)만이 살아있습니다. 자연은 수동적인 기계에 불과합니다. 동물도, 식물도 영혼이 없습니다. 이 생각은 근대 서구인들에게 인간이 자연을 마음껏 사용, 통치, 소유할 수 있다는 어떤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그런데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그어진 이 경계선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은 허구에 가까운 것입니다. 20세기 후반 자연과학은 미생물이 지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십분 인정하고 그들에게 여러 능력들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저명한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 니클러스 머니, 복잡계 이론가 스튜어트 카우프만 같은 분들에 의하면 바이러스와 박테리아 역시 느끼고 생각하고 소통하고 판단합니다. 이들에게도 계획이 있습니다."


"분자생물학자 '로렌스 솜페이락'은 바이러스에도 마인드가 있다고 말합니다. 바이러스도 생각합니다, 고로 존재합니다. '코기토 에르고 숨 (Cogito, ergo sum - 라틴어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인간의 우월성에 대한 신화를 넘어서면 우리는 세상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사실 동물, 식물, 미생물은 인간과 함께 지구를 물질적으로 창조해가는 공생적 시민들입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생존은 그들의 생존과 분리돼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비인간의 힘과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과 함께 세계를 계약해나갈 방법을 좀 더 실질적으로 모색해야 합니다.


"코로나19의 또 다른 충격은 사회라는 관념의 변화에서 발견이 됩니다. 팬데믹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매일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때, 사회적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사회적 약자, 사회 정의, 사회 보장, 사회적 기업, 이때의 사회는 안전망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회적 거리두기의 사회는 그 반대 의미를 띱니다. 비말이 튀어 감염될 수 있는 상황을 지칭하고 있으니까요.

사회는 이제 위험한 것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됩니다. 예배, 시위, 축제, 파티가 사회를 위험에 빠뜨립니다. 저 같은 사회학자에게 이것은 충격적인 사태입니다. 사회학자들에 의하면 사회란 면 대 면, 페이스 투 페이스 상호작용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모여서 연대하고 열광하고, 투쟁하고 협동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공통의 삶의 구조가 사회입니다. 팬데믹은 이 원리를 변형시켜가고 있습니다."


"2020년 우리에게 진정 사회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은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아니라 저런 집들로 연결된 사회가 아닐까요? 이것을 저는 에코레짐이라 불러봅니다. 집은 그리스어로 오이코스, 에코라고 불립니다. 경제를 의미하는 에코노미, 즉 오이코스 노모스는 집의 통치 수를 가리키는 것이고, 생태학을 의미하는 에코로지, 오이코스 로그오스는 거주지에 대한 학문을 의미합니다. 코로나19는 경제의 에코도 아니고, 생태의 에코도 아닌 제3의 에코, 그러니까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집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집 안으로 모든 것이 짜여 들어오고 있습니다. 노동, 여가, 운동, 예술 관람, 사교, 쇼핑도요. 이제 사회적 불평등 역시 집의 관점에서 재조립되고 있습니다, 집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집이 좋은 자와 열악한 자, 집에 머물 수 있는 자와 먹고살기 위해서 집 밖으로 나가야 하는 자. 오이코스 디바이드. 집의 양극화입니다. 쪽방촌이나 원룸, 혹은 열악한 집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의 고통. 집들 사이의 불평등, 집안에서의 불평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문명 계약의 마지막 쟁점으로 제가 검토하고자 하는 것은 가치의 문제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반(反)마스크 운동이나, 규제에 대한 강렬한 저항이 있었습니다. 이 현상은 자유와 자유주의가 저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자유주의의 핵심에는 더 나눌 수 없는 실체로서의 개체, '인디비주얼(individual)'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습니다. 이 개체는 사회와 환경에 아무것도 빚지는 바가 없고, 자기 신체 내부에 봉쇄돼 있는, 셀프 컨테인드(self-contained) 되어있는 독립적 주체성이라고 이해됩니다. 그런데 비말을 통해서 전염이 되는 코로나19 상황에서 개인의 신체는 환경에 열려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구멍 뚫린 채 물질을 나누는 몸들입니다. 우리는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타인들과 분비물을 공유하는 존재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개체, '인디비주얼(individual)'이 아니라 분체, 즉, 디비주얼(dividual), 나누어진 존재에 더 가깝습니다. 자유주의가 꿈꾼 개인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서구도 자유주의를 재계약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어떤가? 저는 이런 점에서 한국 사회가 이미 지난 10여 년간, 독특한 사회 계약을 수행해 왔다고 봅니다, 광우병, 촛불, 세월호, 가습기 살균제, 미투운동, 대통령 탄핵 등의 사건을 겪어 오면서 우리가 계약해낸 자유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한국 시민들은 스스로를 주권자로 여기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성들이 밤길을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것, 학생들이 배를 마음 놓고 탈 수 있는 것, 국민이 소고기를 걱정 없이 먹을 수 있는 것, 혹은 감염병에 걸리지 않고 삶을 향유할 수 있는 것, 이런 게 자유가 아닌가요? 안전한 삶, 생명의 기본 능력을 보장해주는 그런 사회 속에서만 자유라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요?

'안전으로서 자유'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새로운 가치는 한국 사회가 실험을 통해 형성시켜가는 사회계약의 중요한 부분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안전으로서 자유'라는 것은 동시에 전통적 자유 개념과 긴장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데이터를 통한 감시, 새로운 빅브라더에 대한 불안이 거기에 그림자처럼 깔려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2020년, 우리는 인간의 시대에서 생명 공존의 시대로 전환되는 문명적 과정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는 이 사실을 우리가 몸으로 체감하는 재난입니다. 18세기에 루소는 새로운 계약이 없으면 우리가 생존할 수 없다고 말하며 불평등 사회에서 사회계약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그런데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인류와 생명에 닥쳐오는 생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계약을 넘어서 자연계약의 방향을 고민해야 합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SBS 보도본부 미래팀의 취재파일은 SBS의 대표 사회 공헌 지식 나눔 플랫폼 <SBS D포럼>을 중심으로, SBS 보도본부 미래팀원들이 작성합니다.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화두를 들여다 보고, 의미 있는 새로운 관점이나 시도들을 전합니다. SBS 미래팀의 취재파일 내용을 접하고 싶은 분은 SDF다이어리를 '구독'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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