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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하루키 "이야기는 마음을 발견하는 빛"

모교 와세다 대학 입학식에서 '깜짝' 축사

[월드리포트] 하루키 "이야기는 마음을 발견하는 빛"
3월에 각급 학교의 입학식이 열리고 새 학기가 시작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은 4월에 신학기가 시작됩니다. 지난해에는 코로나 감염 확산으로 많은 학교들이 입학식을 취소했지만, 올해는 체온 측정과 마스크 착용, 사회적 거리두기 등 감염 방지 대책을 마련한 가운데 입학식을 여는 학교가 많았습니다.

도쿄 신주쿠(新宿)구에 있는 사립 명문 와세다(早稻田)대학도 지난 1일 입학식을 열었는데요, 여기에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 여부로 세계적인 관심을 끄는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씨가 '깜짝' 참석해 졸업생 대표로 신입생들에게 축사를 했습니다. TV 카메라를 극도로 피하기로 유명한 무라카미 씨답게 1일 밤 일본의 TV 뉴스들은 와세다 대학 측이 제공한 사진과 간단한 단신으로만 이 내용을 전했고, 다음날(2일) 신문들도 비슷한 내용을 보도했습니다만, 오늘 취재파일에서는 무라카미 씨가 어떤 축사를 했는지 전문(취지)을 통해 자세히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안녕하세요. 입학을 축하드립니다. 좀처럼 세상이 진정되지 않고 있지만 올해는 모두 여기 모여서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저는 50년도 훌쩍 넘긴 과거에 문학부에 들어왔습니다만, 당시에는 소설가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졸업을 하고 하루하루 일에 쫓겨 살아가는 가운데 갑자기 소설을 쓰고 싶어지더니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소설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할까, 무언가가 저를 이끌어 주었다고 할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학 재학 중에 결혼을 했으니 우선은 그 상태로 일을 시작하고, 졸업은 나중에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과는 순서가 반대로 돼 버린 겁니다. 이런 식의 인생은 좀처럼 추천하기 어렵습니다만, 그래도 인생은 어떻게든 흘러가더군요.

소설가는 머리가 너무 좋아도 될 수 없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바로 머리로 사물을 생각해 버리거든요. 머리로 생각한 소설은 그다지 재미가 없습니다. 마음을 사용하지 않으면 좋은 소설은 쓸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읽어 줄 만한 문장을 쓰는 것은 꽤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이라 필요에 따라 머리가 일단 움직입니다. 그래도 수재라거나 우등생은 아니라는 정도가 딱 좋습니다. 그렇게 적당한 정도를 발견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문학부나 문화구상학부니까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딱 좋은 '배합'을 잘 찾기를 바랍니다. 와세다 대학은 그런 작업에 적당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가을에 와세다 대학의 캠퍼스에 [국제문학관,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가 문을 엽니다. 서적과 자료, 음악 컬렉션 등을 갖추고 학생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연구 시설도 만들어서 외국과의 문화교류 기지로서도 기능을 하게 됩니다.

이 공간의 모토는 '이야기를 열자, 마음을 이야기하자'입니다. 이건 조금 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네요. '마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들이 평소에 '이건 내 마음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 전체 가운데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들의 '의식'이라는 것은, 마음이라는 연못에서 길어 올린 한 양동이의 물 같은 것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공간은 손대지 않은 그대로 미지(未知)의 영역으로 남게 됩니다. 우리를 진심으로 움직여 가는 것은 그렇게 남겨진 쪽의 마음입니다. 의식(意識)이라든가 논리가 아니라 더 넓고, 더 커다란 마음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어떻게 탐험해야 좋을까요? 자기 자신을 진짜로 움직이고 있는 힘의 원천을 어떻게 발견해야 좋을까요? 그 역할을 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우리들이, 우리들의 의식이 제대로 읽지 못하는 마음의 영역에 빛을 비추어 줍니다.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우리들의 마음을 픽션이라는 형태로 바꾸어서, 비유적으로 떠오르게 합니다. 그것이 소설가가 하려는 일입니다. 간단하게 말해 버리면, 그것이 소설가의 기본적인 발화법입니다. 하나의, 즉 한 단계로 대체된 형태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에둘러 말한다'고 하면 될까요. 그래서 소설이라는 것은 직접적으로는 사회에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즉효약이나 백신처럼은 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소설이라는 작은 움직임을 없애 버리면 사회는 건강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면, 사회에도 마음과 같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천 년 이상 다양한 형태로 다양한 장소에서 손에 소설을 들었습니다. 소설가라는 직업은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마치 횃불과도 같이 이어져 왔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 횃불을 이어가 줄 사람이 있다면, 또는 어쩌면 이 횃불을 따뜻하고 소중하게 지원해 줄 사람이 있다면 저로서는 굉장히 기쁘겠습니다.

다시 한번, 입학을 축하합니다. 이 캠퍼스에서 충실하고 멋진 시절을 보내 주세요. 감사합니다.

* 잘 알려진 대로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대학 문학부에서 연극을 전공한 신입생들의 '대선배'로, 평생 작가 생활을 하며 간직해 온 육필 원고와 자료, 취미로 모은 레코드를 '무라카미 아카이브'라는 이름으로 모교에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와세다 대학은 캠퍼스 안의 기존 건물을 개축해 만드는 '국제문학관'(별칭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에 무라카미 씨가 기증한 자료를 전시하기로 했는데, 이 건물의 개축 설계를 일본의 대표적인 현대 건축가 구마 켄고가 맡게 돼 큰 뉴스가 되기도 했습니다. 국제문학관은 당초 올해 새 학기와 함께 문을 열 예정이었지만 코로나로 일정이 다소 지연돼 올해 가을에 개관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와세다 대학에 올 가을 개관하는 '국제문학관' (사진=대학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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