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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LH 사태'를 본 우리는 왜 불행해질까?

이보영│전 요리사, 현 핀란드 칼럼리스트

인잇 이보영

"그대들은 어떻게 하늘과 땅을 사고 팔 수가 있단 말인가. 신선한 공기와 반짝이는 물은 우리가 소유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사려고 하는가?
(중략)

땅이 사람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속해있는 것이다."

- 스쿼미쉬 인디언 추장 시애틀(Chief Seattle)이 땅을 팔라고 강요하던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1854년)-

처음 만나는 핀란드인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어쩌다 핀란드에 오게 됐는지 물어본다. 그때마다 나의 대답은, "It's a long story"(말하자면 얘기가 길어요!)이다. 핀란드에 도착하기까지 여정이 진짜로 무지 길었기 때문이다.

여행 중 만난 핀란드 친구와 터키에서부터 유럽을 종단하기 시작했다. 그 친구의 고향인 핀란드까지 도착하는데 걸린 시간이 무려 한 달이었다. 비행기로는 몇 시간 안 되는 거리지만, 무전(無錢) 여행자에게는 대장정이었다. 운 좋은 날은 차를 얻어 탈 수 있었지만, 무거운 배낭을 지고 하루 20km 이상 행군하는 날이 많았다. 가끔 저렴한 숙소를 이용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이름 모를 숲에서 텐트를 치고 추위에 떨며 선잠을 잤다. 그렇게 어렵게 도착한 나라여서 일까? '한 번 가 보기나 하자'며 도착한 곳에서 20여 년 넘게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운명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나 보다.

이렇게 친구 따라 강남보다 훨씬 먼 핀란드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남의 땅에서 자유롭게 야영하고 밥해 먹고 야생 베리도 따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별 생각 없었는데, 이런 '무단침입'이 가능했던 것은 알고 보니 '만인의 권리'(everyman's right)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인의 권리'란 '누가 소유했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누구나 모든 땅과 물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현재 핀란드를 포함하여 일부 유럽 국가(스웨덴,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스코틀랜드, 스위스, 오스트리아, 체코)에서 적용되고 있다. 땅 주인이 아니어도 걷고, 달리고, 자전거 타고, 말 타고 다닐 수 있다. 스키도 물론 가능하다. 어느 숲에서든 열매를 따먹을 수 있다. 호수, 강, 바다에서도 수영을 하거나 배로 이동할 수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땅 주인의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는다면 캠핑도 할 수 있다.

핀란드행 여행자가 아닌, 핀란드 거주민이 된 요즘도 '만인의 권리'는 나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핀란드 국토를 내 앞마당처럼 드나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근처 숲에서 야생 베리를, 가을에는 버섯을 채집해 먹을 수 있다. 수렵과 채집활동은 고대의 생활 방식이었다지만 핀란드에서는 21세기에도 여전히 '핫'한 '국민 취미'이다. 18만 개나 되는 호수는 여름에는 수영장,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이나 노르딕 스키 트레일로 변한다. 비싼 스포츠센터에 다니지 않아도 자연은 사계절 내내 아낌없이 자신의 몸을 내주고, 우리는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 "가장 좋은 것은 무료이고 두 번째로 좋은 것이 가장 비싸다"는 코코 샤넬의 알쏭한 잠언이 딱 들어맞는 경우다.

'만인의 권리'가 허용되는 저변에는 '토지 공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토지는 개인이 사고 파는 재화이지만, 동시에 자연의 일부로서 공적 재화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를 나누고, 이용하고, 거래하는 데에는 '공적 이익'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상이 현실화한 제도가 '토지 공공임대제'다. 국가와 지자체가 소유한 공유지를 민간에게 임대하는 방식으로 토지 불로소득을 원천 차단한다. 이렇게 지어진 주택과 아파트는 가격이 저렴해 서민들도 쉽게 내 집 마련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 토지는 30년~100년까지 장기 임대가 가능하고, 임대기간이 만료돼도 적절한 보상금이 지급되기 때문에 안심하고 건물을 지을 수 있다.

헬싱키도 시 정부가 소유한 토지에 저렴한 아파트를 지어 분양한다. '히타스(Hitas)'라는 이름을 가진 이 시립아파트는 헬싱키시의 비싼 아파트 가격 때문에 자가 주택을 갖기 어려웠던 사람들을 위한 배려에서 시작됐다. 주거 조건이 좋은 지역에 들어선 경우가 많아 상당히 인기다. 단, 아파트를 매매할 때부터 최고 가격은 이미 정해져 있다. 아파트를 싸게 사서 비싼 가격에 팔아 이익을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얼마 전 핀란드는 UN 세계행복보고서(World Happiness Report)에서 또다시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에 올랐다. 4년 연속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순위는 얼마나 재미있는 생활을 하느냐, 혹은 얼마나 많이 웃느냐는 등 표면적이고 개인적인 행복지수와는 거리가 좀 있다. 만약 이런 지수로 순위를 매긴다면 선천적으로 낙천적 성격을 가진 중남미 국가가 더 높은 순위를 차지할 것이다. 하지만 UN이 선정한 행복한 나라는 오히려 이와 반대로 춥고 어두운 척박한 환경에 살며 쉽게 웃지 않는 아이스맨들로 가득 찬 북유럽 국가다.

그 이유는 행복지수를 산출하는 기준을 보면 알 수 있다. 6가지 항목이 있는데, 1인당 국내총생산(GDP), 사회적 지원, 기대 수명, 사회적 자유, 관용, 부정부패다. 태양 빛 가득한 야자수 밑에서 춤추며 미소 짓는 행복이 아니라,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는 곳에서 제대로 돌아가는 정부와 사회의 지원을 받으며 건강한 시민으로 살아갈 때 맛볼 수 있는 '후천적' 행복이 기준이 되는 것이다. 선천적 행복감은 타고나지 않는 한 따라 하기 어렵지만, 후천적 행복은 조건만 갖춰진다면 누구나 벤치마킹할 수 있는 것이다.

2012년부터 UN이 매년 발표하고 있는 '행복보고서'를 통해 우리는 행복에 대한 정의와 기준을 다시 세워보게 된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문제로 시끄러운 한국은 어떨까. 솔선해서 토지 공익에 이바지해야 하는 공사 직원들이 미공개 내부 정보를 이용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며 땅 투기를 하다 걸렸다. 상위 10%가 80%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으며, 국민 70%는 땅 한 평도 없는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토지와 부동산 소유 여부에 따라 빈부격차가 날로 커져가는 현 시국에 날아든 이 뉴스에 국민들은 화가 단단히 났다. 그리고 다시 한번 공직자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UN 행복지수에서 '부정부패'가 주요 기준이 된 이유는 행복과 신뢰가 상관관계가 깊기 때문이다. 연구에 따르면 정부와 사람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한다. LH 직원들이 빼앗은 건 우리의 토지만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행복지수도 갉아먹은 셈이다.

그 덕(?) 때문인지, 올해도 한국은 행복한 나라 순위에서 50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이 우리 행복에 기여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만으로도 만족해보려는 우리 행복의 크기를 더 이상 축소시키지는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인잇 이보영 네임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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