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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그래서 어떻게 소방관이 되었나요?

시골소방관 심바씨 | 마음은 UN, 현실은 집나간 가축 포획 전문 구조대원

묵묵하게 한길만 걸어온 진수 씨는 이것저것 찔러보고 살았던 나의 삶에 관심을 보였다. 페루에서 여행가이드를 했다고도 하고 호주에서 농부로 살았다고도 하니, 소방관이라는 직업에 접점을 찾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보통 여자들은 나같이 바람처럼 사는 남자에겐 별 관심이 없다는 뼈 때리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진수 씨, 사실 저는 꿈이 소방관이 아니었어요. 외국에서 NGO 창립자나 선교사가 될 줄 알았거든요. 그러다 UN의 문턱이라도 밞으면 가문의 영광이겠다 생각하며 살았거든요."

"심바 씨는 그래서 아프리카 우간다에 가신 거예요?"

"아뇨. 나름 사정이 있었는데, 처음엔 영어를 배우러 간 거였어요."

군대에서 4년 3개월을 보내고 나와보니 세상 모든 게 흥미로웠다. 개미 지나가는 것만 쳐다봐도 아주 흥미진진했다. 대충대충 먹잇감 집어가는 것 같아도 자세히 보니 나름 기승전결이 있는 애들이었다. 버킷리스트가 적힌 한 권의 노트와 형광펜으로 도배가 된 영어 문법책을 들고 전역한 나는 홀로 나방을 끌고 가는 저 개미처럼 곧 무언가 대단한 것을 이룰 것만 같았다.

대학교에 복학을 하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공부를 했다. 군대에서 1년에 100권씩 읽었던 책들이 모두 자기계발서 였다. 나는 더 이상 성적 상위권 녀석들이 밟고 올라서는 성적 상승의 사닥다리가 아니란 걸 보여줄 심산이었다. 지난날 심해층(성적 바닥권)에서 말미잘 녀석들(성적 바닥권 친구)과 정신없이 놀던 때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직업군인이었던 덕분에 모아온 돈으로 복학한 첫 학기는 알바를 하지 않고 공부에만 오롯이 집중을 할 수가 있었다. 사실 뭐 괜찮았다. 어차피 성적장학금을 타게 되면 그동안 썼던 돈을 대부분 보상받을 테니 말이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장 학교 도서관으로 가서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뽑아서 열람실로 갔다. 3면이 막힌 열람실 책상은 나에게 진지함과 설렘을 안겨줬다. 티브이로 많이 봤다. 남자의 집중하는 모습은 쪽지가 붙은 캔 커피를 필연적으로 불러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알게 된 사실도 있었다. 어떻게 생긴 남자가 집중을 하느냐도 중요하다는 것을.

결론부터 말하자면 장학금은 장학생에게로 돌아갔다. 무늬만 장학생이었던 나에게 큰 교훈과 결심을 안겨준 사건이기도 했다. 공부머리가 아니란 걸 깨닫고는 모험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실 나도 사람이라 열람실을 들락거리는 동안 촉이라는 게 왔었다. 장학금 킬러라고 불리는 후배 둘이 있었는데 그 두 사람은 캠퍼스 커플로 수업이 끝나고 만나면 공부 데이트를 한다고 했다. 이런 훌륭한 만남을 외로이 캔커피나 기다리는 내가 이길 리 만무했다. 이제 성적장학금 3개 중 하나가 남았는데, 이미 열람실 안쪽엔 어떤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는 걸 알게 되었다. 의식주를 열람실에서 해결하며 열공하는 인류 공동체가 존재했고, '걸어 다니는 암모나이트'라 불리는 조상 격 선배가 그 구역을 관리하고 있었다. '내가 저들을 제치고 남은 한 자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그들을 초조하게 지켜보는 한편으로 교환학생 공고를 수시로 살폈다. 여차하면 떠날 작정이었는데 여차했다.

때마침 아프리카 우간다에 교환학생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게시판에 올라왔다. 게다가 영어를 쓰는 나라라는 말에 내 마음은 요동쳤다. 영어에 갈급함이 있던 나는 망설임 없이 지원을 했다. 모험을 떠나기 전 톰 소여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면접 날이 되어 국제교류팀 사무실을 찾아가니 영어로 무장된 쟁쟁한 젊은이들이 쌸라쌸라 거리고 있었다. 나도 준비는 해왔지만 기억나는 거라곤 '아이 엠 최규영'이 전부이니 이걸 어떡하나….

"Could you introduce yourself?"

"에?"

"영어로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한 면접관님이 말했다.

"Uhmm(음).. Well(그러니까), you know(그게).. I am 최규영 but..(제가 최규영입니다만). Ahmm..(아무 생각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갑자기 내 서류와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면접관들이 분주해졌다. 원어민들이 많이 쓴다는 'well'과 'you know'를 적절히 배치한 자기 소개였지만 이렇게 짧게 끝난 걸 깨닫곤 그들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톰 소여의 모험은 시작과 동시에 암초를 만났다. 망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고 초조하게 다음 우간다 지원자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필리핀 지원자들의 영어 면접이 시작되었다. 아까 전까지 팽팽 놀던 생각 세포들이 갑자기 밀린 업무를 처리하더니 큰 깨달음을 선물했다. "아! 우간다 지원자가 나 한 명이구나." 우중충한 먹구름들 사이로 한줄기 따듯한 빛이 나에게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때마침 의문의 퍼즐 한 조각이 탁 맞춰졌다. 대기실에서 지원자 명단을 확인하던 선생님이 흠칫 놀라며 우간다 지원자가 맞느냐 재차 물었던 적이 있다. 난 잘생긴 사람에게 말 한마디 더 붙여주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전략이 필요했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자, 최규영 학생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 해도 좋습니다."

"면접관님. 제가 알아본 바로는 우간다 쿠미대학교와 교류협정을 맺은 지 10년이 되었지만 제가 첫 지원자라고 들었습니다. 미지의 땅에서 많은 리스크가 따를 거라는 우려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면접관님, 오늘 꼭 한 명을 선발해야 한다면 영어 잘하는 사람을 보내시겠습니까? 아니면 아프리카에서 살아남을 사람을 보내시겠습니까? 제가 비록 영어는 부족하지만 생존력에 있어서만큼은 이곳에 온 모든 지원자들 중에 가장 뛰어나다고 자부합니다. 특수부대에서 중사로 전역했다는 점을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책, 독서, 공부

그렇게 난 그 자리에서 당당히 합격을 따내었고 면접관님들의 바람대로 영어학원에 등록했다. 대학교도 체면이라는 게 있는데 학생이 영어를 너무 못하면 좀 그렇지 않으냐는 우려 때문이었다. 우려와 달리 난 문법책 2권을 10번씩 필사를 하며 영어를 빠르게 익혔고, 엉성한 발음으로 내 체면만 구겼다. 시간이 지나 이 일을 두고 1대1 경쟁률이면 거저 아니었냐 소리를 들었지만, 1대1의 경쟁률이란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기에 한없이 고독했고 거칠었던 싸움이라 회고했다.

"진수 씨 저번에 이런 이야기를 해줬잖아요. 물질적으로 풍요로우면 행복할 줄 알았다고요."

"예 그랬어요. 물질이 주는 행복감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이런 생각도 해봤어요. 부유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다면 물질을 소유하는 것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요. 예전에 너무 행복하게 웃는 평범한 가정의 아이를 본 적이 있어요.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이 오가는 가정이라는 공동체에서 가족의 사랑으로 안정감을 이룰 때 비로소 진짜 행복이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진수 씨 선생님 같아요. 그런 생각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그냥요. 문득 들었던 생각들을 손님과 대화하기도 하고 책도 보고요. 심바 씨는요?"

"모험을 떠나듯 갔던 아프리카였는데, 저에겐 비슷하면서 좀 다른 이야기가 있어요."

외국을 처음 나간 나에게 미지의 땅 아프리카는 미친 동식물의 땅이었다. 기숙사에서 나를 반긴 건 우간다 친구들과 내 주먹 반쪽만 한 풍뎅이였다. 기숙사 곳곳을 기어 다니고 날아다니는데, 자기가 무슨 헬기도 아니고 수직 이착륙을 했다. 나무마다 도마뱀들이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고, 화장실 옆에는 휴지 나무라고 부르는 식물이 있었는데 이파리에 보들보들한 솜털이 나있고 질겨서 기숙사 친구들은 그 잎을 뜯어다가 뒤처리에 사용을 했다. 그러다 비가 올 듯 하늘이 거뭇거뭇하면 높은 습도를 감지한 흰개미들이 등에 날개를 달고 불빛을 향해 모여들었다. 아프리카 그 칠흑 같은 동네에 불빛은 우리 기숙사밖에 없었다. 10미터 복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흰개미가 바글바글하게 날아다니는데 졸도를 할 뻔했다. 생전에 파브르가 왔다면 좋아서 기절했겠지만 나는 좀 많이 달랐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기숙사에 살고 있던 친구들의 행동이었다. 각자 비닐봉지와 플라스틱 통을 들고 나와 흰개미들을 모조리 쓸어 담아갔다. 흰개미가 날아와 모여드는 데 10분 걸렸다면 사라지는 데 5분 걸렸다. 나를 위한 기숙사 메이트들의 특별 배려였을까 생각하며 감사히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망고나무 밑 교실에서 친구들이 손바닥에 새까만 콩 같은 걸 쌓아 놓고 반대 손으로 집어먹고 있었다. 너무 궁금해서 '그게 뭐냐? 맛있는 거면 같이 먹자' 했더니 답은 심플했다. "White ant!!(흰개미)" 당황한 내 표정을 보곤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소금과 함께 내입에 밀어 넣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맛이 있었다. 구운 흰개미에서 나오는 진한 새우맛의 아름다움을 목 뒤에 돋은 뾰족한 소름도 인정했다. 지구 최상위 포식자다운 면모를 선하게 생긴 친구들에게서 보았다.

세상 어디든 인생은 먹고사니즘이었다. 먹고살자니 내 입에 맞는 게 바나나와 자파티(밀가루 전병) 밖에 없었다. 처음엔 학교에서 제공하는 포쇼(옥수수떡)와 콩 수프를 싹싹 비워가며 먹었는데 두 달이 지나자 이건 현지 적응화를 위한 과정이 아닌 현지 적응 쇼였다는 걸 스스로 알았다. 난 너무도 간절히 격렬하게 순대국밥을 원했다. 깊고 누릿한 국물에 쫄깃한 곱창들. 수업시간이면 발 밑으로 돌아다니는 동네 돼지 녀석들이 있었는데, 언젠가 난 그놈들의 똥꼬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심지어 입맛도 다셨다.

그때부터 음식을 남기는 안 좋은 버릇이 생겼다. 한입만큼 남기던 걸 언제부턴가 반쪽씩 남기고 있었다. 그냥 식당 직원한테 포쇼(옥수수떡) 절반만 달라고 하면 되는 것을 굳이 산더미만큼 퍼와서 남겼다. 솔직히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간다. 그러던 어느 날 또 포쇼 한 바가지를 퍼와서 절반을 남겼다. 남은 걸 기숙사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휙 던져 넣고는 나는 쫄래쫄래 잔디밭 길을 따라 접시를 닦기 위해 갔다. 접시를 닦고 돌아오는 길, 배는 부르고 하늘은 높고 내 표정은 좀 띠벙했다. 조선시대 기록엔 이를 두고 한량이라 불렀다고 한다.

잔디밭길 중앙쯤에서 내 앞으로 한 모녀가 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의 머리엔 터번을 둘렀고 아이는 머리를 여러 갈래 곱게 땋았다. 아이의 앙증맞은 손을 꼬-옥 잡고 기숙사 방향으로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아이를 한 번씩 내려다보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아이를 향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기숙사에 가까워오자 어머니는 아이의 손을 잠시 놓더니 검은색 비닐봉지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걸 손에 끼우곤 다시 아이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기숙사에 다다르자 어머니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곤 아이의 손을 놓고 머리를 한번 쓰다듬더니 어떤 각오를 한 표정이었다. 어머니는 기숙사 옆 쓰레기통에 봉지가 쓰인 손을 쑤욱 집어넣더니 하얀 덩어리를 하나 꺼내어 반대 손에 감싸 쥐었다. 내가 먹다 버린 포쇼였다. 마지막으로 주위를 확인하는데 멍청한 표정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은 너무 강렬했고 진실했다. 1초 남짓의 시간 동안 그녀는 내게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사랑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가 먹고 자라날 음식이 없었어요. 음식을 구하러 다녔는데 어느 날 이 쓰레기통에 아이와 제가 먹을 만큼의 포쇼가 버려져 있었어요. 훔친 게 아니라 주워간 겁니다. 가난한 나라라고 가난이 떳떳한 것은 아니에요. 비록 당신이 먹다 버린 것을 주워서 아이와 나눠 먹었지만, 이런 저의 모습이 창피합니다. 부디 못 본채 지나가 주세요. 그동안 저녁밥을 제공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나는 기숙사 방으로 뛰어들어가 식빵 한 봉지를 들고 문 앞에 섰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지금 이대로라면 저 모녀는 내가 먹다 버린 음식으로 저녁을 해결할 것이다. 그건 내가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가 식빵을 전해준다면 난 저 어머니의 무너지는 심정을 짓밟는 꼴이 될 것이었다. 나의 죄책감을 덜 것인가 어머니의 마음을 지켜줄 것인가 갈등이 되었다. 그 순간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저는 이 순간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까. 왜 이런 장면을 제게 보여주셨습니까. 차라리 마주치지 않았다면 제가 지내는 동안 반쪼가리 포쇼라도 매일 먹었을 텐데… 이 미안함을 안고 앞으로 저보고 어찌 살라고 이런 일을 겪게 하십니까." 수치심 가득한 어머니의 눈빛, 세상의 온기를 품은 아이의 얼굴, 배부르고 멍청했던 나 그리고 하나님.

그 일이 있고 며칠간 나는 기도만 했다.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어 근처 선교사님과 교수님께 상담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분들 역시 답을 낼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그곳에 시선을 멈추고 삶을 더 살다가 보면 지금보다는 더 좋은 생각이 들 수 있으니 나의 자리로 되돌아가 삶을 살아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날 이후로 난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다. 군을 나오고 나의 목표는 원래 군 헬기 조종사 시험을 또 치르는 것이었다. 군 복무 중 시험을 한번 보았는데 영어가 너무 부족하여 떨어졌다. 전역을 하면 못해본 일들을 하며 인생을 좀 즐기다가 영어공부를 해서 다시 군에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단순히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삶이 훌륭한 인생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목표를 접었다. 그 대신 여러 나라와 선교지를 돌며 나의 시선을 가난과 사람에 두고 한동안 집 없이 살았다. 소방관이 되기 전까지 사람들이 나에게 꿈이 무엇이냐 물으면 선한 기업을 만드는 것 또는 NGO를 창립하는 것이라고 답하며 살았다. 어찌 보면 그때 그 마음의 빚을 갚지 못해 스스로 만들어낸 일종의 보호막 같은 게 아니었을까 한다. 그때마다 내 마음은 '미안했다고, 그때 내가 먹다 남은 걸 줍게 만들어 미안했고… 그 후로 포쇼 새것을 쓰레기통에 넣어놨는데 못 가져갈 만큼 수치심을 주어서 또 미안하다고… 그렇지만 노력하며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소방관, 화재, 소방서

"그래서 심바 씨는 어떻게 소방관이 되었나요?"

사실 외국에서만 계속 살 수는 없었다. 나의 오늘이 세상을 조금 더 밝게 만들 거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그것보단 전기회사에서 가로등을 하나 달아주고 가는 편이 훨씬 더 밝게 했다. 심지어 가로등을 달면 범죄율도 줄어든다고 하니 실제로 세상이 밝아지는 게 맞았다. 어쨌건 나는 친구랑 한 달에 한 번은 목욕탕에 가야 하고 순대국밥도 주기적으로 섭취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이란 걸 살면서 알았다. 게다가 뭐 그리도 인생엔 장애물이 많은지 아직도 그 사기꾼을 못 잡았네.

모든 걸 내려놓고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시점에서 난 중학교 시절 합기도 덕후 때로 되돌아가 보았다. 몸을 쓰는 건 자신이 있었던 까무잡잡하고 건강한 아이, 학업우수상은 못 받아와도 선행상은 꼬박 받아왔던 착한 아이였다. 그 아이가 커서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 명백했다. 내 몸 던져 남을 돕는 일. 물론 울산 중앙구조대에 있는 군대 동기가 내게 조언과 용기를 아낌없이 주어 가능했던 일이었다.

얼마 전에 교회 카페에서 스리랑카 선교사님을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 자신들이 하는 일은 천천히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일인데, 내가 하는 일은 한순간에도 바꿀 수 있는 일이니 멋진 선택을 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렇다. 나는 또다시 사람을 위한 일을 선택했다. 내가 몸을 담은 그릇은 바뀌었지만 나의 그릇은 바뀌지 않았다. 그 그릇 안에는 조그만 합기도 소년의 열정, 특수부대원의 패기, 악어 농부의 땀, 아프리카의 꿈 등이 담겨있다. 앞으로 구조대원의 열심이 더 담길 그릇의 이름은 사람 최규영이다. 사회생활을 잘하려면 하얀 거짓말도 할 줄 알아야 하고 늘 진솔할 순 없지만, 진실의 순간 앞에선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섬이 없는 사람 소방관이 되고 싶다. 나누고 돕고 사랑하며 살아가리라 다짐한다.

#인-잇 #인잇 #시골소방관심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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