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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인신매매 처벌 없는 대한민국, 비상식 100년

최정규 | '상식에 맞지 않는 법'과 싸우는 변호사 겸 활동가

미국 하버드 대학교 램지어 교수의 논문이 논란이 되고 있다. 공개된 논문초록에는 위안소라고 불리는 전시 매춘시설 운영이 매춘 업소와 매춘 여성 사이에 맺은 계약을 통해 이뤄졌다는 문구가 담겨져 있다. 일본군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일 뿐 인신매매 피해자가 아니라는 일본 극우 세력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쓴 논문에 국제사회는 분노하고 있다. 램지어 교수의 논문은 당시 '계약서'가 작성되었다는 것도 입증하지 못했다. 하지만 비단 그 때문만에 램지어 교수의 논문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설사 그런 계약서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당시 일본이 성 착취를 목적으로 협박이나 무력을 동원해 여성들을 끌고 간 것은 인신매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인신매매 범죄와 자발적 성매매는 함께할 수 없는 개념이다.

2000년 11월 이탈리아 팔레르모에서 UN 총회가 열렸다. 이때 "인신매매, 특히 여성 및 아동의 인신매매 예방 · 억제 · 처벌을 위한 의정서"라 불리는 유엔 인신매매 방지 의정서가 세계 159개국의 동의로 채택됐다. 그리고 이 의정서에는 다음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의도된 착취 문제를 다룰 때 인신매매 피해자가 동의했는지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보통 '인신매매'라고 하면 납치, 물리적 폭력, 감금과 같은 무시무시한 상황을 떠올린다. 하지만 사기, 기만 등 달콤한 말로 사람을 속여 동의를 받는 경우에도 인신매매는 성립된다. 램지어 교수의 논문은 '엉터리 연구', '역사 왜곡'의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전 세계가 합의한 '인신매매'의 개념을 후퇴시키고 있는 것이다.

울타리, 경계, 철조망 (사진=픽사베이)

■ '인신매매 피해국', 대한민국은 인신매매범을 어떻게 처벌할까?

램지어 교수 논문의 문제를 '일본의 역사 왜곡'이라는 관점에서 '인신매매와 관련된 인권의 후퇴'라는 관점으로 전환해 생각한다면 동시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 봐야 한다. '인신매매 피해국', 대한민국은 스스로 인신매매범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역설적이게도 대한민국에는 인신매매범을 제대로 처벌할 규정이 없다.

"어떤 일인지 제대로 설명 안 했다. 손님과 같이 앉아 있는 것도, 성매매를 시키는 것도 이야기 안 했다. 필리핀에서 처음 일을 제안할 때는 그냥 가수로 일하라고 했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보니 모두 다 거짓말이었다."

예술흥행비자(E-6)비자로 한국에 입국한 필리핀 출신 여성이주노동자의 말이다. 한국에 가면 돈을 많이 볼 수 있다는 거짓말로 외국인을 한국에 들였다. UN 인신매매방지의정사상 엄연한 인신매매다. 하지만, 이런 가해자들 대부분 인신매매로 처벌받지 않는다.

2013년부터 현재까지 성매매 인신매매로 처벌 확정된 사건은 겨우 2건에 불과하다. 인신매매는 대한민국에서 아주 제한적으로만 적용된다. '피해자가 계속된 협박이나 폭행의 위협 등으로 법질서에 보호를 호소하기를 단념할 정도의 상태'를 '엄격하게 입증'해야만 인신매매로 처벌할 수 있다. 가해자에게는 고작 행정법규위반인 출입국관리법위반죄 만이 적용된다.

"부모가 맡겨 놓고 간 장애인을 지금까지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줬는데, 내가 왜 처벌받아야 합니까?"

피해자가 내국인이라고 다를까. 2014년 신안군 염전노예 사건을 시작으로 속속 밝혀지는 지적장애인 노동력 착취 사건에서 항상 듣는 가해자들의 항변이다. 부모로부터 가해자의 손에 맡겨진 지적장애인들은 가해자들이 별다른 폭행이나 협박을 하지 않아도 가해자가 시키는 일을 거절하지 못했다. 이렇게 맡겨진 지적장애인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것도 역시 UN 인신매매 방지 의정서상 인신매매다. 그러나 가해자는 역시 인신매매로 처벌받지 않는다.

월급 한 푼 받지 못한 채 수십 년 동안 죽어라 일하는 것을 보다 못한 이웃들이 신고하고서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는 이 사건들에서 가해자들에게 적용되는 죄명은 임금체불뿐이다. 학대 기간과 상관없이 10년 치 최저임금만 피해자에게 주면 대부분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난다.

■ 인신매매특별법 만들었지만…처벌도 못하는 '반쪽'

우리나라가 UN 인신매매 방지 의정서를 비준한 것은 지난 2015년, UN에 가입한 193개 나라 가운데 170번째였다. 이후 UN은 인신매매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엄격하게 처벌하는 법체계를 갖추라고 대한민국에 요구했다. 의정서 비준 후 6년 만인 지난 23일, <인신매매 · 착취방지와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렇다면 드디어 인신매매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할 수 있게 될까?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다. 새로 만들어진 인신매매 특별법에도 처벌규정은 없다. 시민단체는 이수진 의원이 법안을 발의한 직후 "처벌 규정 없는 인신매매 특별법은 필요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국가인권위원회도 지난 8일 국회에 회신한 검토의견서를 통해 '발의된 특별법이 인신매매를 처벌하는 문제에는 여전히 답을 주지 못한다'며 에둘러 비판했다.

보다 못한 UN의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지난 15일 한국 정부에 공개 서한을 통해 법안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정부의 의무를 다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UN 인신매매 의정서에 따라 그 '후속입법' 차원에서 추진된 법안이 UN의 전문가들의 '우려' 속에서 통과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비상식적 상황을 맞닥드리게 됐다. 피해자가 분명한데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는 사회에 대해 국제사회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버드 대학 램지어 교수가 인신매매 개념을 후퇴시킨 것으로 비판받는 것처럼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법적으로' 만들어 낸 대한민국 역시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지는 않을까.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 사건의 가해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100년이 지났고 인권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지만, 대한민국에서 인신매매 가해자는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있다. 21세기, UN 의정서에 의해 인신매매특별법을 제정한 이후에도 그런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인신매매 피해자는 존재하나 가해자 처벌은 없는 나라"

100년 동안 진행된 이 지긋지긋한 비상식을 이제는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 국회는 반쪽짜리 법안 통과로 안주할 것이 아니라 인신매매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할 수 있는 후속 입법 마련에 속도를 높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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