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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굿바이' 김보미∼ '봄의 여왕'이 된 '보상 선수'

이정찬 취파용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만큼 뻔한 말도 드물다. 이 뻔한 말로 큰 울림을 준 선수는 더 드물다. 삼성생명 가드 김보미가 그랬다. 그에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은 '죽을 힘을 다하는 것' 이상이었다.
 

눈물의 여왕

눈물로 시작한 시즌이었다. 2020년 9월 14일. 개막을 한 달 앞두고 훈련이 한창이었다. 새 시즌 목표를 말하던 김보미가 울컥했다. "처음 프로에 왔을 때부터 늘 똑같았어요. 최고의 선수가 되기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꿈이 너무 소박했나 봐. 그래서 최고가 못 됐나 봐. 하하하." 최고가 되지 못해 서러웠던 건 아니었다. 그 순간 '마지막'이란 세 글자가 뇌리를 스쳐 눈물샘을 건드렸다. 웃는 표정으로 눈물을 쏟아냈다. "더 이상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게 느껴져요. 최선을 다할 수 없을 때 떠나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때가 온 것 같아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은퇴하고 싶어요."

이정찬 취파용

훈련 하나, 공 하나가 소중했던 마지막 시즌. 삼성생명의 성적은 14승 16패. 지는 날이 더 많았다. 올 시즌부터 4위까지 플레이오프에 나가게 된 게 큰 행운이었다. 한 경기, 한 경기가 간절했다. 정규리그 1위 우리은행과 플레이오프 2차전 승리를 이끈 김보미는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뛰었다"며 눈물을 쏟았다. 은퇴를 결심한 그에게 패배는 곧 끝이었다. 챔피언결정 2차전, 4쿼터 종료 직전 치명적인 파울로 지옥과 천당을 오간 뒤에도 펑펑 울었다. 김보미의 눈물은 시리즈 내내 빛났다. 정규시즌, 평균 6.9점을 넣던 선수가 플레이오프에선 11.6점을 넣으며 펄펄 날았다. 플레이오프 통산 개인 평균(5.39점)의 2배가 넘었다.

이정찬 취파용

좀비

그렇게 끝까지 갔다. 2021년 3월 15일. 여자농구 챔피언결정 5차전, 마지막 4쿼터는 김보미가 자신의 농구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난 순간이었다. 36살 맏언니는 다리가 풀려 코트에 쓰러졌다가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3점포를 꽂았다. 삼성생명의 15년 만의 우승, 정규리그 4위 팀의 사상 첫 우승에 쐐기를 박았다. '농구 선수' 김보미의 마지막 득점이었기에 더 극적이었다. 그날 밤 김보미에겐 좋아할 힘도, 축하받을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축하연이 이어졌지만 속이 좋지 않았다. 구토를 참지 못했다. 김한별의 부축을 받으며 연회장을 빠져나와 침대에 쓰러졌다.

2005년 데뷔 후 프로 17년 차. 처음으로 제대로 된 별명이 붙었다. '좀비'.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고, 주저앉았다가도 다시 일어나 공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드는 모습이 꼭 그랬다. 김보미는 은퇴 경기에서 새로 얻은 별명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저니맨

이렇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던 그에게 단 하루. 돌아가고 싶은 날이 있다. 2011년 1월 30일. 올스타전. 이날만큼은 설렁설렁해도 됐다. 물론 그러지 않았다. 늘 그랬듯 몸을 날렸고, 무릎을 크게 다쳤다. 처음으로 수술대에 올랐다. 당시 소속팀 사령탑이었던 김영주 감독은 "열심히 하다 보니 그런 걸 어쩌겠나"라며 안타까워했다. 부상은 다른 부상을 불렀다. 복귀를 서두르다 또 다치고. 무리하다 반대편 무릎을 또 다치고. 3차례나 더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때 올스타전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무릎을 다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재활하는 시간보다 경기하는 시간이 더 길었더라면. 혹시 최고가 될 수도 있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김보미는 '보상 선수'가 됐다. 스타 선수가 이적해오면 튕겨 나가게 되는. 여자프로농구 전체 6팀 가운데 5팀을 옮겨 다녔다. 보기 드문 이력이다. 내세울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코 부끄럽지도 않은 일이다. 소속팀에서 '보호' 받지는 못했지만 다른 팀에는 '보상'이 될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니까. 어디서든 최선을 다하는 김보미니까.
 

봄의 여왕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종종 시큰둥한 답을 듣곤 한다. '최선을 다하기보다 최고가 되라'고. 열심히는 누구나 다 하니까 잘하라고. 잘할 수만 있다면 열심히는 안 해도 좋다고. 최선을 다했지만 최고가 되지 못한 선수 vs 최선을 다하지 않고도 최고가 된 선수. 둘 중 하나만 될 수 있다면 후자를 선택하는 게 당연하다고.

김보미는 반대였다. "그건 제 스타일은 아니에요. 최선을 다하지 않고도 최고가 된다면 찝찝할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뛸 수 있는 지금, 코트를 떠나는 데 미련이 없다. "끝까지 최선을 다한 선수로 기억되고 싶었는데. 최고가 되진 못했지만 우승을 하고 떠나게 됐잖아요. 저는 꿈을 이뤘어요."

이정찬 취파용

챔피언결정전 MVP를 '봄의 여왕'이라고 부른다. 그 투표에서 김보미는 8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MVP는 66표를 받은 김한별이 차지했지만 김보미가 준 울림이 더 컸다. 차갑고 냉정한 프로의 세계에서 김보미는 최고가 아니어도 뜨거운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챔피언 트로피는 16년 동안 한결같이 죽을 힘을 다 한 과정에 대한 보상이었다. '2021년 봄의 여왕'은 최선을 다한 김보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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