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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북적] 세상에 없던 아이가 발견한 것…'배움의 발견'

[북적북적] 세상에 없던 아이가 발견한 것…'배움의 발견'


[골룸] 북적북적 284 : 세상에 없던 아이가 발견한 것…'배움의 발견'


"저 아래 국도를 지나가는 통학 버스는 우리 집 근처에서는 멈추지 않고 쌩 달린다. 나는 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바로 이 사실, 다른 어떤 것보다 이 사실이야말로 우리 가족을 다른 가족들과 다르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학교를 가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아버지는 정부가 강제로 우리를 학교에 가도록 만들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정부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일곱 자녀 중 네 명은 출생증명서가 없다. 가정 분만으로 태어나서, 한 번도 의사나 간호사에게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의료 기록도 전혀 없다."


1986년생 미국인 타라 웨스트오버가 이야기하는 어린 시절입니다. 다소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지금도 이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미국에 적지 않다고 합니다. 당장 타라의 조카들 중 몇몇은 2021년 이 순간에도 학교에 다니지 않습니다.

타라 웨스트오버는 28살이었던 2014년, 케임브리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그리고 [북적북적]에서 이주에 함께 읽고자 하는 이 책 [배움의 발견]을 2018년에 써내 미국 사회에서 커다란 화제와 논쟁, 벅찬 감동을 동시에 불러일으킵니다. [배움의 발견]은 뉴욕타임스와 아마존문고가 선정한 2018년 권장 도서에 각각 이름을 올렸고, 빌 게이츠와 오바마 전 대통령이 각자 해마다 발표하는 '올해의 추천도서' 중 하나로 꼽혔습니다. 타라 웨스트오버는 2019년 타임 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포함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타라는 16살 때까지 교실이라는 곳에 들어가 본 적조차 없는 아이였습니다. 그때까지 '홀로코스트'라는 용어를 들어본 적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여성이 역사나 법을 전공하고 '싶어해도 된다'는 생각 자체를 가져 보지도 못했습니다.

타라 웨스트오버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이하 모르몬교) 중에서도 극히 근본주의적인 분위기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타라의 아버지는 학교가 아이들의 온전한 신앙심을 해칠 것이라고 믿고, 병원을 비롯한 제도권의 어떤 편의나 복지를 이용하는 순간 정부의 조종에 넘어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타라의 가족들은 문자 그대로 머리가 깨져도, 대형 교통사고를 당해도,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타라의 아버지는 분명히 가족들을 사랑하고 딸의 행복을 바라지만, 자신의 권위가 도전 받았다고 느낄 때면 그 자신도 모르게 가족들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아내면서까지 자기의 위치를 다집니다. 가족과 세상 사이에 높은 담을 쌓아 가두면서, 그것을 신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타라의 오빠 중 한 명은 누구보다도 타라를 아껴 아버지가 시키는 위험한 일을 타라 대신 자청해서 맡을 정도이지만, 걸핏하면 타라를 심각하게 폭행하고 조종하려 합니다. 하지만 17살에 모르몬 교회에서 운영하는 브리검 영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타라가 아는 세계는 오직 그 가족 뿐입니다. 바깥 세상을 접하고 대학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가족과 스스로의 상태를 직시할 수 있는 정신적인 힘과 분별을 조금씩 기르게 되면서, 타라 웨스트오버가 평생 치러야 할 '영혼의 전투'가 시작됩니다.

"내 팔은 손목이 꺾인 채 등 뒤로 잡혀 있었다. 변기에 머리가 처박혀 변기 물이 코에 닿을 듯 말 듯한 상태였다. 오빠가 뭐라 소리지르고 있었지만 뭐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나는 그 소리가 들리자 완전히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됐다. 찰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한 가장과 가식 –화장, 새 옷, 좋은 그릇으로 차린 식탁- 뒤에 가려진 진짜 내 모습이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찰스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나는 온몸에 힘을 줬다. 몸을 크게 휘어지게 하면서 숀 오빠에게 잡혀 있던 손목을 잡아 뺐다. 오빠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내가 생각보다 힘이 더 셌는지, 생각보다 무모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빠는 잡고 있던 손을 놓쳤다. 나는 문을 향해 돌진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내 머리가 다시 뒤쪽으로 훅 당겨졌다. 오빠가 내 머리카락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나를 너무 세게 잡아당긴 나머지 우리는 둘이 함께 뒤로 넘어져 욕조 안으로 쓰러졌다.

다음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찰스가 나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고, 나는 웃고 있었다. 미친 듯이 울부짖는 비명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나는 내가 계속 크게 웃어댈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하고 모든 게 농담인 것처럼 찰스를 설득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렀지만 –엄지발가락이 부러졌다- 나는 계속 캑캑거리며 웃었다. 숀 오빠는 문 앞에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괜찮아?] 찰스가 계속 물었다.
[물론 괜찮지! 숀 오빠는 너무 너무 너무…. 웃겨.]

"부러진 발가락에 체중이 실리면서 통증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기 때문에 마지막 단어는 이상하게 튀어나왔다. 찰스가 나를 부축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를 뿌리치고 부러진 발이 멀쩡한 것처럼 똑바로 걸었다. 오빠를 장난스럽게 손으로 툭 치고 지나치면서도 나는 통증으로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물론 타라의 경험이 전반적인 모르몬교도들의 삶을 대표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타라는 대학에 입학해서 아버지의 기행들이 아버지가 정신에 앓고 있는 병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아가게 됩니다. 또한 모르몬교가 여동생을 때리고 조종하는 데서 쾌감을 느끼라고 가르칠 리도 없습니다. 타라의 오빠 숀은 병적인 공격성과 파괴적 성향에 제대로 된 치료나 주의를 받지 못한 채 방치돼 자란 것입니다. 하지만 타라의 고백을 따라가는 여정은 "모르몬교도들 중엔 훌륭한 사람들도 많아." 같은 반응이 왜 그녀가 처했던 현실에 대한 동문서답에 불과한지 자연스럽게 깨닫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처한 환경이 어떤 이름을 가졌고, 얼마나 도덕과 규율을 중시하는 허우대를 갖췄는지가 아닙니다. 폐쇄적인 공동체, 진보와 변화를 구조적으로 거부하기 쉬운 환경은 마음에 병이 든 타라의 아버지나 오빠 같은 사람들이 숨어들어 학대와 무지를 은폐할 수 있는 그늘을 곳곳에 드리운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일기장을 다시 가져다가 그때까지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기록한 것이다. 다른 기록처럼 애매하고 그림자 같은 표현을 쓰지 않았다. 암시나 은유 뒤에 숨지 않았다. 나는 그때 쓴 일기를 지금까지 기억한다. [오빠가 어느 순간 나를 강제로 차에서 내리게 했다. 내 양손 모두를 머리 위로 올려서 잡았고, 내 셔츠가 딸려 올라갔다. 나는 오빠에게 옷을 내릴 수 있게 해달라고 했지만 내 말을 전혀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냥 정말 못된 사람처럼 드러난 내 배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내가 몸집이 작아서 다행이다. 내가 좀 더 컸더라면 그 순간 오빠를 찢어발겨 버렸을 테니까.]
…..
나는 일기장을 꺼내서 일기를 썼다. 전날 쓴 페이지의 반대편에 기록한 일기에 나는 내 기억을 다시 고쳤다. 오해였다고 썼다. 내가 멈추라고 했으면 오빠도 멈췄을 거라고.
그러나 어떤 식으로 기억하겠다고 결심했든지 간에 그 사건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이제 그때를 돌이켜 보면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때문이 아니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내가 기록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약해 빠진 껍질 속 어디엔가, 천하무적이라는 허구로 속을 모두 비워내 버린 그 소녀 안 어디엔가 아직 불꽃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두 번째 기록이 첫 번째 기록을 덮을 수는 없었다. 두 일기 모두 보존될 것이다. 나의 기억과 오빠의 기억이 나란히 공존할 것이다. 앞뒤 말을 맞추기 위해 한쪽을 수정하지 않은 것은 대담한 행동이었다. 두 페이지 중 하나를 찢어 내버릴 수도 있었지 않은가.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것은 약하고 무력하다는 거슬 인정하는 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행동이다. 나약하지만 그 나약함 안에 힘이 들어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살겠다는 확신. 그날 밤 내가 쓴 단어들 중 가장 강한 단어는 분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의혹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라고 쓴 부분 말이다."


17살에 갑자기 세상으로 나온 타라는 '교육받기' 시작합니다. 교육이란 인류가 그동안 방대하게축적해 온 객관에 대한 노력과 논쟁, 소통과 기록을 흡수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는 일입니다.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시선'을 가질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일입니다. 타라는 공부하고 생각함으로써, 문자 그대로 알을 깨고 나오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세상이 알이었는지 무엇이었는지를 관찰자의 눈으로 파악하기 시작하고, 날개와 생명력을 가진 스스로와 부서져 나가 버려져야 할 알 껍데기를 구분하기 시작합니다. 타라의 평범하지 않은 삶에 있어서 그것은 사랑하는 가족이 자신을 학대해 왔다는 데 대한 인지에 이르는 과정이고, 자신의 뿌리와 결별해야 스스로 일어설 수 있다는 깨달음을 피하지 않아야 하는 고통이기도 합니다.

이 책이 참으로 특별한 것은 학대의 주범인 아버지나 오빠, 그들의 굴레를 차마 벗어나지 못하고 차라리 딸(동생)을 방치하는 편에 서고 만 어머니나 언니… 그 누구도 평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타라는 그 가족들 모두의 사정과 고통, 인간적인 결들을 하나하나 입체적으로 짚어갑니다. 마음의 병에 집어삼켜진 자신이 가부장의 권위를 견제 없이 휘두를 수 있는 닫힌 세상 속에서 문제를 문제로 인식할 기회를 놓쳤다는 점에서, 타라의 아버지와 오빠도 결코 행복하거나 특혜를 누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으로 나가고자 하는 딸에게 무의식적으로 상해를 입혀서라도 주저앉히려는 아버지는 정작 대학에서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풀이 죽은 딸의 목소리를 전화 너머로 들어버린 순간엔 –역시 그 자신도 모르게- 그저 따뜻한 위로만을 건넵니다. 가족 내의 학대나 무지는 사랑이나 진심 어린 애정과 결합해 있기 때문에 더더욱 무서운 것이고 분리하거나 인식해 내기 어렵다는 것, 마음의 생살을 다쳐가며 하나하나 배워 나간 그 여정을 저자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낱낱이 분해해 펼쳐 놓습니다. 그것이 저자에게 얼마나 큰 치유의 시간이자 다시 한 번 상처들을 깊게 헤집는 과정이었을 지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네게 은총을 내리겠다는 제안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하겠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 은총은 자비였다. 아버지는 오드리 언니에게 제안했던 것과 같은 항복 조건을 내게도 제안한 것이다. 언니에게 이것이 얼마나 큰 안도였을지 상상이 갔다. 자신의 현실 –나와 언니가 함께 알고 있던 현실-을 아버지의 현실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언니가 느꼈을 안도감 말이다. 그렇게 적은 대가만 지불하면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언니는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나는 언니가 한 선택을 두고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같은 선택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순간 알고 있었다. 내가 그때까지 해온 모든 노력, 몇 년 동안 해온 모든 공부는 바로 이 특권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준 것 이상의 진실을 보고 경험하고, 그 진실들을 사용해 내 정신을 구축할 수 있는 특권. 나는 수많은 생각과 수많은 역사와 수많은 시각들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믿게 됐다. 지금 굴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쟁에 한 번 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내 정신의 소유권을 잃는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내게 요구되는 대가였다. 이제 이해가 됐다. 아버지가 내게서 쫓고자 하는 것은 악마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
[사랑해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 죄송해요, 아버지.] "


타라는 이제 유명하고 칭송 받는 작가가 되어 뉴욕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타라 웨스트오버의 영혼이 나날이 트라우마에 도전 받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득 밤잠을 설치는 날이 그녀에게 여전히 때때로 찾아올 것입니다. 사랑하고 증오했던 가족을 스스로 등짐과 동시에 배척당하고, 자신의 역사를 하나하나 고쳐 써야 하는 삶은 절대로 유명세와 인세 정도로 편안해질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다만 이제 타라는 생 도처에서 발생한 모순을 받아들이면서 직시하고, 때때로 엄습할 자기부정을 이겨나갈 힘이 스스로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의미 있는 차이가 존재할 뿐입니다.

타라는 매우 극단적인 환경에서 태어난 경우이긴 하지만, 타라의 이야기는 사실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소외와 맞닿아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이런 소외가 작동하는 게 제일 벗어나기 힘들지만, 좀더 넓게 보자면, 사회의 특정한 편견이나 차별도 그걸 당연시하는 분위기 안에서 자라난 개인이 제대로 인식하고 극복하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자기혐오와 분열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소외를 이겨낸 타라의 목소리에 우리가 깊이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입니다. 타라는 '그 사람은 자발적으로 학대(소외, 열외, 차별)받는 쪽을 원하는 거래' 류의 말을 듣는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이 어째서 '자발적인 것만 같은' 행보를 보이는지 낱낱이 끄집어내 보여줍니다.
타라는 어디서 출발했든 결국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지점에 도달할 수 있는 인간 정신의 힘을 정말 벅차게 증명합니다. 이 책을 통해서 자신이 배운 것을 다시 우리에게 배움으로 되돌려줍니다. 인류가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조금씩 조금씩 싸워서 얻어왔고 또 얻어갈 모든 종류의 자유와 배움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자신의 삶 자체로 웅변합니다.

"[학교에 왜 다니지 않았나요?]
나는 최선을 다해 설명을 했다. 부모님이 공교육을 신뢰하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다 끝내자 교수는 아주 어려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라도 해야 하는 사람처럼 두 손에 깍지를 꼈다. [계속 도전을 해보세요. 그렇게 하면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는 거예요.]
…..
내가 원한 것은 도덕적인 조언이었다. 아내와 어머니로서 내 소명을 다하라는 신의 부름과 내 마음속에서 나를 부르는 다른 목소리 사이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에 대한 조언을 원했었다. 그러나 케리 박사는 그런 내 질문은 옆으로 밀어놓고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먼저 학생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 본 후, 학생이 어떤 사람인지 결정하세요.]"


타라의 삶이 증명하는 인간 정신의 힘, 자유의 가치, 열린 사회의 중요성은 보편적인 감동을선사합니다. 미국의 독자라면 극단적인 종교 근본주의나 큐어난 같은 음모론이 파고들 수 있는 지금 미국 시스템의 허점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엿보기도 할 것입니다. 동시에 미국의 교육과 시스템의 가능성도 다시 한 번 확인됩니다. (타라가 맨 처음 진학하는 학교인 모르몬 계열의 브리검 영 대학 비숍까지 포함해서) 타라가 무너지는 고비고비마다 등장해 그녀를 일으켜 세우는 선생님들은 그야말로 서구 교육에 대한 빛나는 헌사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이 책을 읽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렇다면 미국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읽는 타라의 이야기는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나… 여러 가지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당장 세계 많은 지역의 아이들은 17살 이후 타라의 삶은 꿈조차 꿀 수 없습니다. 아예 타라가 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봉쇄된 아이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반면에 심지어 미국 안에서도 타라처럼 태어나는 아이들이 나오는 것처럼,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닫힌 문 뒤에서 태어나 숨겨지고, 삶의 가능성을 얻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큰 문제의식 없이 통용되고 있는 인습들, 그 문제를 지적하는 손가락이 오히려 손가락질 당하는 인습들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히 누리는 자유와 교육의 권리는 모두 과거에는 소수에게만 부여된 엄청난 특권이었지요.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특권은 깨닫고 의심할 수 있게 된 문제들을 가리키는 우리의 손가락을 어떤 손가락질들에도 불구하고 내리지 않는 용기가 아닐까. 그럼으로써 오늘까지도 소수에게만 주어진 특권을 내일 모두를 위한 당연한 권리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 시간들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늘 깊이 감사드립니다.

*출판사 '열린책들'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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