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중독'에만 집착한 보안관…너무나 허술한 수사 브리핑
이번 사건은 범행이 크게 보면 두 군데에서 발생했습니다. 첫 번째 범행은 체로키카운티 보안관이, 두 번째 범행은 애틀랜타 경찰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도심 외곽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보안관(Sheriff) 조직이 경찰과 같은 수준의 공권력을 행사합니다. 이들은 교통 딱지를 끊는 업무부터 강력범죄에 대응하는 일까지 모두 처리합니다. 보안관은 선거로 선출되기 때문에 무서울 게 별로 없는 조직입니다. 얼마 전에는 주지사의 자택 대기명령을 집행하지 않겠다고 반기를 든 보안관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명령 불복종을 선언해도 주지사는 예산 삭감 등으로 간접적으로 통제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우리로 치면 지역 경찰청장이 도지사의 행정 집행을 안 하겠다고 선언하는 꼴인데 우리 국민들이 이해하기에는 다소 낯선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 범행에 대한 첫 합동수사 브리핑은 여러모로 이상했습니다. 바이든이 한때 부통령 후보군으로도 고려한 것으로 잘 알려진 케이샤 보텀스 애틀랜타시장이 브리핑을 진행하며 애틀랜타 경찰서장과 체로키 보안관이 번갈아가면서 첫 수사 진행 상황을 발표했습니다. 애틀랜타 경찰서장은 "수사가 아주 초기여서 범행 동기를 단정하기 어렵다" 정도로 발표를 했습니다. 사실 체포한 지 얼마 안 되는 상황이라 이 정도 톤이 적절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레이놀즈 체로키 보안관이 마이크를 받아 브리핑을 하면서 "피의자는 성 중독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해 이목을 사로잡았습니다. 체포한 로버트 롱의 진술을 듣고 거의 그대로 전달하는 수준이었는데 레이놀즈 보안관은 "그가 이런 장소에 과거에 자주 갔을 거라고 믿는다"며 "그곳에 화풀이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여 브리핑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얘기가 진술 형태로 나왔을 수 있지만, 브리핑에서 언급하기에는 대단히 부적절했습니다. 이런 업소에 갔다는 진술이 나오면 적어도 수사기관이라면 카드 사용 내역, 휴대폰 위치추적 자료 등을 근거로 그 진술이 사실인지는 확인하고 발표하는 게 정상입니다.
보텀스 시장도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마이크 앞에 다시 나와 "우리는 희생자를 비난하거나 부끄럽게 느끼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망자가 나온 마사지 업소의 업태에 대한 논란을 의식한 듯 "우리가 아는 한 그들의 사업은 합법적이었다"며 논점이 흐려지는 것을 막으려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피의자에게는 나쁜 날이었다"…피해자는 안중에도 없는 대변인
보텀스 시장이 이번에도 다시 나와 "이 사람의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희생자 대부분이 아시아계 여성이다"면서 "이런 일은 나라 전체에서 벌어지는 문제로 용납될 수 없다"라고 브리핑 방향을 다시 정리했습니다. 성 중독을 꺼내 든 보안관과 피의자를 동정하는 듯 한 발언까지 한 대변인의 브리핑 사고를 막기 위해 옆 동네 시장이 고군분투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던 겁니다.
"중국에서 수입된 코로나"…백인 보안관 본인이 아시아 비하?
사실 백인 경찰들의 백인 피의자에 대한 온정적인 태도를 자주 봤었습니다. 의회 폭동이 벌어졌을 때 흥분한 트럼프 지지자들이 의사당에 몰려가도 별 제지도 안 했던 경찰도 있었고, 의사당 내부에서는 같이 사진도 찍어주는 장면까지 나왔었습니다. 반면 흑인 조지 플로이드 목을 무릎으로 밟아 죽인 백인 경찰의 무자비한 모습은 미국인들에게 깊게 각인돼 있습니다.
미국 남부 정서가 있는 조지아주에서도 체로키카운티는 백인이 전체의 90% 가까이 되는 지역입니다. 반면 애틀랜타는 백인이 40%, 흑인이 51%로 인종 구성이 상대적으로 다양합니다. 서로 멀지 않은 지역이지만 체로키카운티 자체가 백인 순혈주의를 온전히 가지고 있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체로키카운티에서는 아시안은 물론 흑인조차 구경하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러다 보니 백인 보안관들의 무의식 속에는 백인 살인마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려 했던 게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트럼프가 남긴 혐오 바이러스…폭행당하는 아시안들의 비극
하지만 수사 초기부터 성 중독이라는 피의자의 일방적인 주장이 전면에 떠오르면서 수사의 공정성 자체를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습니다. 이걸 시골 보안관들이 자기들끼리 대충 피의자 주장을 전하는 수준으로 수사를 마무리했다가는 더 큰일이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애틀랜타 경찰의 수사 보고서에도 사건이 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표시해놨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번 사건은 결국 FBI 같은 연방 차원의 수사기관이 더 깊게 개입해서 결론을 내야 하는 상황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아시안들에 대한 혐오범죄는 심각하다는 표현을 넘어서는 상황이 됐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얻어맞는 아시안들이 갈수록 늘고 있어, 관련 뉴스가 거의 매일 쏟아지는 상황입니다. 특히 아시안 노인, 여성처럼 취약계층을 골라 폭행을 가하는 야비한 짓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거의 매일 실명이 걱정될 정도로 맞아서 눈이 퉁퉁 부은 노인들의 인터뷰가 영상으로 들어오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울 지경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취재하면서 중국 기자로 생각한 트럼프 지지자들의 공격적인 언행을 여러 번 경험한 적도 있습니다. 이런 언어 폭력이든 물리적인 폭행이든 미국에서는 아시안들의 수난 시대가 펼쳐지는 상황입니다.
이런 일이 왜 벌어지게 된 거냐고 하면 트럼프가 뿌린 혐오 바이러스가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코로나 초기 미국 상황이 괜찮을 때만 해도 트럼프는 시진핑을 칭찬하면서 그가 잘 해낼 거라는 응원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 코로나 확산의 불이 붙으면서 책임론이 거세지자 중국 때리기로 반전을 시도했습니다. 트럼프와 일체감이 큰 지지자들은 '쿵푸 바이러스', '차이나 바이러스' 등 격한 트럼프의 선동을 듣고 아시안들이 재앙을 가져온 원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지키기도 너무 괴로운 코로나 봉쇄가 모두 아시안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며 원망했습니다. 과거에는 이런 생각이 들어도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웠다면, 노골적인 아시안 비난을 일삼던 트럼프 시대 이후에는 혐오를 드러내는 게 어렵지 않게 됐습니다. 이제 미국 사회는 이번 사건으로 흑인의 삶이 소중한가에 이어 아시안의 삶도 소중한지에 대한 질문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이번 사건이 개인적으로 너무 안타까운 건 피해자들이 목숨을 잃는 최악의 상황을 겪고도 그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한국계 피해자에 대해서는 미국 언론에 보도되면서 모금운동이 일고 있지만, 나머지는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도 알 길이 없습니다. 게다가 4명의 희생자 가운데 1명은 한국 국적을 가진 영주권자로 우리 국민임이 확인됐습니다. 애틀랜타총영사관에서 수사에 여러 가지로 협조하고 노력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큰 사건이 벌어졌지만 대사관 차원에서 피해자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브리핑은 물론 설명 자료조차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대사관 홈페이지에 여행주의보와 함께 대사 명의로 애도 성명이 올라온 게 거의 전부입니다. 대사관 차원의 계획을 물어보니 애틀랜타총영사관에서 대응한다는 답변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국민이 관련된 사건에 우리 정부가 지나치게 방관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미국 내 한국 교민사회 전체가 충격과 공포에 빠져 술렁이고 있는데 우리는 이번 사건을 이 정도로 대응하는 게 과연 최선인지 묻고 싶습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