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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살인자만 동정한 백인 보안관…트럼프가 남긴 '혐오 바이러스'

[월드리포트] 살인자만 동정한 백인 보안관…트럼프가 남긴 '혐오 바이러스'

'성 중독'에만 집착한 보안관…너무나 허술한 수사 브리핑

조지아주에서 발생한 총격사건으로 8명이나 숨졌다고 AP가 1보를 보도한 것을 봤을 때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애틀랜타 일대에 한국인들이 얼마나 많이 사는지 대략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망자 가운데 6명이 아시아계 여성이었고, 4명이 한국계였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아시아계에 대한 미국 내 폭력행위가 워낙 폭증해 이 문제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는 상황에 터진 이 사건은 누구나 처음부터 아시안 혐오범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 사건은 범행이 크게 보면 두 군데에서 발생했습니다. 첫 번째 범행은 체로키카운티 보안관이, 두 번째 범행은 애틀랜타 경찰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도심 외곽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보안관(Sheriff) 조직이 경찰과 같은 수준의 공권력을 행사합니다. 이들은 교통 딱지를 끊는 업무부터 강력범죄에 대응하는 일까지 모두 처리합니다. 보안관은 선거로 선출되기 때문에 무서울 게 별로 없는 조직입니다. 얼마 전에는 주지사의 자택 대기명령을 집행하지 않겠다고 반기를 든 보안관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명령 불복종을 선언해도 주지사는 예산 삭감 등으로 간접적으로 통제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우리로 치면 지역 경찰청장이 도지사의 행정 집행을 안 하겠다고 선언하는 꼴인데 우리 국민들이 이해하기에는 다소 낯선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 범행에 대한 첫 합동수사 브리핑은 여러모로 이상했습니다. 바이든이 한때 부통령 후보군으로도 고려한 것으로 잘 알려진 케이샤 보텀스 애틀랜타시장이 브리핑을 진행하며 애틀랜타 경찰서장과 체로키 보안관이 번갈아가면서 첫 수사 진행 상황을 발표했습니다. 애틀랜타 경찰서장은 "수사가 아주 초기여서 범행 동기를 단정하기 어렵다" 정도로 발표를 했습니다. 사실 체포한 지 얼마 안 되는 상황이라 이 정도 톤이 적절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레이놀즈 체로키 보안관이 마이크를 받아 브리핑을 하면서 "피의자는 성 중독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해 이목을 사로잡았습니다. 체포한 로버트 롱의 진술을 듣고 거의 그대로 전달하는 수준이었는데 레이놀즈 보안관은 "그가 이런 장소에 과거에 자주 갔을 거라고 믿는다"며 "그곳에 화풀이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여 브리핑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얘기가 진술 형태로 나왔을 수 있지만, 브리핑에서 언급하기에는 대단히 부적절했습니다. 이런 업소에 갔다는 진술이 나오면 적어도 수사기관이라면 카드 사용 내역, 휴대폰 위치추적 자료 등을 근거로 그 진술이 사실인지는 확인하고 발표하는 게 정상입니다.

총격사건 수사 브리핑하는 레이놀즈 보안관

보텀스 시장도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마이크 앞에 다시 나와 "우리는 희생자를 비난하거나 부끄럽게 느끼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망자가 나온 마사지 업소의 업태에 대한 논란을 의식한 듯 "우리가 아는 한 그들의 사업은 합법적이었다"며 논점이 흐려지는 것을 막으려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피의자에게는 나쁜 날이었다"…피해자는 안중에도 없는 대변인

가장 큰 문제는 체로키 보안관실 대변인 제이 베이커 발표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보안관실 계급은 캡틴(Captain)이었는데 공보 창구 기능을 했던 인물입니다. 레이놀즈 보안관이 발표를 끝내고 "제가 빼먹은 거 없죠?"라고 되물을 정도로 언론 브리핑을 막후에서 주도했던 인물입니다. 베이커 대변인은 "피의자가 범행을 순순히 자백했다"라고 설명하면서 "인종적인 이유로 범행을 한 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마사지숍을 보면서 유혹을 느꼈고 이를 없애버리기 위해 범행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피의자가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있는데, 그에게는 참 나쁜 날이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발언으로 SNS가 폭발할 정도로 비난이 폭주했습니다. 이런 표현 자체가 미국에서는 애들이 말썽 부렸을 때나 쓰는 거라는 지적이 많았는데, 피의자가 사람을 8명이나 죽인 살인마라는 인식 자체가 아예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플로리다로 가서 포르노산업 분야에 가서 비슷한 범행을 하려고 했다는 전망까지 덧붙였습니다.

제이 베이커 체로키 보안관실 대변인

보텀스 시장이 이번에도 다시 나와 "이 사람의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희생자 대부분이 아시아계 여성이다"면서 "이런 일은 나라 전체에서 벌어지는 문제로 용납될 수 없다"라고 브리핑 방향을 다시 정리했습니다. 성 중독을 꺼내 든 보안관과 피의자를 동정하는 듯 한 발언까지 한 대변인의 브리핑 사고를 막기 위해 옆 동네 시장이 고군분투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던 겁니다.
 

"중국에서 수입된 코로나"…백인 보안관 본인이 아시아 비하?

베이커 대변인의 페이스북이 털리면서 수사를 진행하는 그가 아시아 혐오 글을 남겼다는 게 들통났습니다. 중국에서 수입된 코로나19라는 티셔츠 사진을 올리면서 재고가 남아 있을 때 사라는 독려 글을 올렸던 게 확인된 것입니다. 이들이 인종 혐오범죄 가능성을 왜 이렇게 빨리 배제했는지를 설명해주는 단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진술이 나오면 증거를 가지고 진위를 따져야 한다는 수사 기본조차 이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결국 베이커는 대변인 직에서 경질됐습니다.

사실 백인 경찰들의 백인 피의자에 대한 온정적인 태도를 자주 봤었습니다. 의회 폭동이 벌어졌을 때 흥분한 트럼프 지지자들이 의사당에 몰려가도 별 제지도 안 했던 경찰도 있었고, 의사당 내부에서는 같이 사진도 찍어주는 장면까지 나왔었습니다. 반면 흑인 조지 플로이드 목을 무릎으로 밟아 죽인 백인 경찰의 무자비한 모습은 미국인들에게 깊게 각인돼 있습니다.

미국 남부 정서가 있는 조지아주에서도 체로키카운티는 백인이 전체의 90% 가까이 되는 지역입니다. 반면 애틀랜타는 백인이 40%, 흑인이 51%로 인종 구성이 상대적으로 다양합니다. 서로 멀지 않은 지역이지만 체로키카운티 자체가 백인 순혈주의를 온전히 가지고 있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체로키카운티에서는 아시안은 물론 흑인조차 구경하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러다 보니 백인 보안관들의 무의식 속에는 백인 살인마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려 했던 게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트럼프가 남긴 혐오 바이러스…폭행당하는 아시안들의 비극

미국 사회에서 인종이라는 뇌관이 폭발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는 지난해 여름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경험한 바 있습니다. 워싱턴DC가 한동안 마비될 정도로 격렬한 시위가 이어졌고, 일부는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는 것을 눈앞에서 보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을 앞두고 표를 긁어모으기 위해 극단적으로 인종주의를 자극하면서 미국 사회가 폭발했습니다. 이번 이슈도 수면 아래에 있었던 아시안들의 인종 차별 문제를 건드리는 거라 파장이 결코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사건 다음날 바로 바이든 대통령이 "아시아계의 걱정을 잘 알고 있다"라고 말했고, 해리스 부통령도 "아시아계 미국인들과 연대할 것"이라고 공개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백악관은 조기 게양을 했고 연방 건물에도 조기를 내걸도록 포고문까지 나온 상태입니다. 대통령, 부통령이 아시안들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모두 나설 정도로 이 문제는 미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사 초기부터 성 중독이라는 피의자의 일방적인 주장이 전면에 떠오르면서 수사의 공정성 자체를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습니다. 이걸 시골 보안관들이 자기들끼리 대충 피의자 주장을 전하는 수준으로 수사를 마무리했다가는 더 큰일이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애틀랜타 경찰의 수사 보고서에도 사건이 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표시해놨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번 사건은 결국 FBI 같은 연방 차원의 수사기관이 더 깊게 개입해서 결론을 내야 하는 상황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아시안들에 대한 혐오범죄는 심각하다는 표현을 넘어서는 상황이 됐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얻어맞는 아시안들이 갈수록 늘고 있어, 관련 뉴스가 거의 매일 쏟아지는 상황입니다. 특히 아시안 노인, 여성처럼 취약계층을 골라 폭행을 가하는 야비한 짓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거의 매일 실명이 걱정될 정도로 맞아서 눈이 퉁퉁 부은 노인들의 인터뷰가 영상으로 들어오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울 지경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취재하면서 중국 기자로 생각한 트럼프 지지자들의 공격적인 언행을 여러 번 경험한 적도 있습니다. 이런 언어 폭력이든 물리적인 폭행이든 미국에서는 아시안들의 수난 시대가 펼쳐지는 상황입니다.

애틀랜타 아시아계 총격 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워싱턴DC에서 열린 밤샘 집회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이런 일이 왜 벌어지게 된 거냐고 하면 트럼프가 뿌린 혐오 바이러스가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코로나 초기 미국 상황이 괜찮을 때만 해도 트럼프는 시진핑을 칭찬하면서 그가 잘 해낼 거라는 응원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 코로나 확산의 불이 붙으면서 책임론이 거세지자 중국 때리기로 반전을 시도했습니다. 트럼프와 일체감이 큰 지지자들은 '쿵푸 바이러스', '차이나 바이러스' 등 격한 트럼프의 선동을 듣고 아시안들이 재앙을 가져온 원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지키기도 너무 괴로운 코로나 봉쇄가 모두 아시안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며 원망했습니다. 과거에는 이런 생각이 들어도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웠다면, 노골적인 아시안 비난을 일삼던 트럼프 시대 이후에는 혐오를 드러내는 게 어렵지 않게 됐습니다. 이제 미국 사회는 이번 사건으로 흑인의 삶이 소중한가에 이어 아시안의 삶도 소중한지에 대한 질문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이번 사건이 개인적으로 너무 안타까운 건 피해자들이 목숨을 잃는 최악의 상황을 겪고도 그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한국계 피해자에 대해서는 미국 언론에 보도되면서 모금운동이 일고 있지만, 나머지는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도 알 길이 없습니다. 게다가 4명의 희생자 가운데 1명은 한국 국적을 가진 영주권자로 우리 국민임이 확인됐습니다. 애틀랜타총영사관에서 수사에 여러 가지로 협조하고 노력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큰 사건이 벌어졌지만 대사관 차원에서 피해자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브리핑은 물론 설명 자료조차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대사관 홈페이지에 여행주의보와 함께 대사 명의로 애도 성명이 올라온 게 거의 전부입니다. 대사관 차원의 계획을 물어보니 애틀랜타총영사관에서 대응한다는 답변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국민이 관련된 사건에 우리 정부가 지나치게 방관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미국 내 한국 교민사회 전체가 충격과 공포에 빠져 술렁이고 있는데 우리는 이번 사건을 이 정도로 대응하는 게 과연 최선인지 묻고 싶습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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