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인-잇] 돈보다 훨씬 의미 있고 소중한 것들

시골소방관 심바씨 | 마음은 UN, 현실은 집나간 가축 포획 전문 구조대원

[인-잇] 돈보다 훨씬 의미 있고 소중한 것들
최근 우연한 계기로 만난 진수 씨는 발 관리 샵을 운영하는 원장님이다. 나와 비슷한 구석이 많아서인지 요즘 들어 가장 대화를 많이 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내가 써온 글을 읽고서 소방관이란 직업 자체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 나란 사람이 이해가 잘 안 되는 눈치였다.

"심바 씨, 심바 씨의 부모님은 어떤 분이세요?"

"음…아버지는 좀 일찍 돌아가셔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어머니가 좀 프리한 편이세요. 진수 씨는요?"

"저희 엄마는 저랑 성격이 똑같아요! 날개 없는 천사?…제가 하고 싶은 걸 막진 않으셨어요. "

"저희 어머니랑 비슷하네요. 전 어머니의 교육방식이 매우 마음에 들어요. 왜냐하면 공부하라는 말을 안 하셨거든요. 그저 제가 뭔가를 하고 싶다고 하면 허락해주고 어머닌 묵묵히 기도를 해주셨어요."

난 학창 시절 공부를 그다지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는 공부를 잘했고 중학교에 올라오면서 성적이 바닥을 탁 소리 나도록 쳤다. 그 충격에 맘 잡고 공부를 하여 전교 수준으로 성적이 수직 상승하는 그런 드라마 같은 일은 16살 인생까지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유유히 심해층에서 해류에 몸을 맡긴 채 유영하는 눈 튀어나온 물고기처럼 하위권 성적을 맴돌았다. 그 당시 난 딱 세 가지에 심취한 오타쿠였다. 오락실, 라디오, 합기도. 합기도를 얼마나 좋아했냐면, 중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장 합기도장으로 가서 유치부반에 6살, 7살 아이들과 함께 발차기를 시작으로 초등반, 중고등반, 성인반까지 마치고 나서야 관장님과 같이 문밖을 나섰다. 지금 생각해보면 쬐그만한 놈이 나름 열정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고 어머니께서는 집안 사정상 더 지원을 해줄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나라를 잃은 백성 같은 표정을 하고 관장님께 말씀드리고 나오는데 관장님께서 그럼 돈 내지 말고 너 다니고 싶은 만큼 다니라며 프리패스권을 끊어주셨다. 어쩌면 그때 운동이 지금의 나를 결정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턱걸이로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온 나는 이번엔 전략을 달리했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을 옆에 두고 그 친구들을 따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성적이 오른다는 걸 티브이를 통해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똑똑해 보이는 친구들을 내 주변에 하나둘씩 만들어갔다. 그러곤 고등학교 첫 중간고사 성적은 놀라웠다. 친구들과 다 함께 바닥을 탁 쳤다. 나의 영향력이 이 정도 일 줄이야. 훗날 나의 자서전에 이 사건을 '심바 효과'로 명명해야 하겠다. 그즈음 방과 후 학습활동으로 만난 택견 선생님이 내가 운동에 재능이 있다며 택견을 전공 삼아 배워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1초의 고민도 없이 어머니께 달려가 훌륭한 택견인이 되어 한국 전통무예의 명맥을 잇겠노라 선언을 했다. 어머니는 저노무자식이 또 시작했구나 하는 눈빛으로 나를 한번 보시곤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 아들을 위한 기도를 하나님께 올리셨다.

"저희 언니는 공부를 엄청 잘했고 똑똑했는데 저도 공부에 별로 흥미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머니 손을 붙잡고 미용학원에 등록을 했어요."

"그럼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길만 걸어온 거예요?"

"예. 한 16년? 정도 된 거 같아요. 처음엔 14시간, 15시간 일을 해도 월급이 고작 30만 원이었어요."

"우와~ 엄청 대단해요. 저는 그렇게 한 가지 일을 진득하게 해 본 적이 없거든요."

대학교 시절 나는 동기들 사이에서 재미있고 특이한 친구로 통했다. 사람을 좋아해서 무리의 중심에 내가 항상 있었지만 오후 3시만 되면 신데렐라처럼 사라졌다.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도 저녁 7시 30분만 되면 또다시 사라지기 일쑤였다. 마치 방송국 녹화 직전에 방청객들의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사라지는 사전 MC 같은 친구였다. 그 이유는 오후 3시엔 목욕탕 청소를 하고 저녁 7시 30분엔 택배 상하차를 위해 버스를 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나는 돈 되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 했다. 방학이 되면 나의 단짝 동기와 함께 교차로를 책상에 촥 펼쳐놓고 시급이 높은 순서대로 밑줄을 쳐가며 연락을 돌렸다. 일이 힘들고 안 힘들고는 나의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그저 돈 되는 일이면 그곳이 어디든 이 한 몸 던져 노동과 돈을 맞바꾸었다. 그러다 보니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건설현장, 공장, 택배는 기본이고 텔레마케팅, 룸살롱 웨이터, 방문판매, 치킨집 주방장, 야채장사, 푸드트럭 등 30여 종의 일을 경험했다.

"진짜 다양한 일들을 했네요. 그럼 그 일들 중에 어떤 일이 가장 의미가 있었어요?"

"음…예전에 학원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일을 했던 적이 있어요. "

이 일 역시 시급이 높아서 시작한 일이었다. 밤새 쌀포대를 트럭에 옮겨 실으면 시급이 1만 원인데, 학원은 쌀포대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무게의 책을 들고 칠판 앞에 서면 한 시간에 1만 3천 원을 주었다. 그동안 육체 노동계의 메시로 군림을 했었는데 동네 조기축구 실력으로 발을 디딘 학원계는 내게 신세계였다. 그래도 잘하고 싶은 마음에 쉬는 날 대학도서관에서 열심히 연구를 했었다.

"최 선생님은 학원 일이 처음이라고 했죠? 우리 학원이 인근에선 성적 잘 올려주는 학원으로 소문이 났어요. 선생님의 열정 기대할게요." 열정이란 단어가 원래 이렇게 싸한 느낌의 단어였던가. 처음 접하는 일이다 보니 원장님 앞에서 뒤통수에 구멍이 나도록 긁다가 사무실을 나왔다. 교회 동생이 며칠만 땜빵을 하면 된다고 왔다가 얼떨결에 정직원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외국 좀 돌다가 왔다고 하니 원장님은 내 청바지에서 느껴지는 자유로움이 좋다고 하셨다. 난 정장 바지가 없어서 청바지에 모자를 쓰고 간 거였는데 원장님은 날 그냥 외국인 취급하듯 대하셨다. 훗날 몇몇 학부모님들이 학원에 오셨다가 '저 선생님은 복장이 왜 저러냐고 우리 아이들이 뭘 보고 배우겠느냐'는 컴플레인을 걸었다. 그때 원장님께서 '저 유학파 선생님 말씀하시는 거냐'고 되물었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하며 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프리카 우간다 교환학생 1년의 힘이란.

첫 아이들, 첫 수업, 처음 올라본 단상. 영어회화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영어를 분해하여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았다. 나도 모르는 걸 질문할 때 살짝 이런 생각도 들었다. 학창 시절 동그란 안경을 쓰고 조용조용 살던 친구가 가끔 수업시간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때가 있었다. 그때 당황한 선생님은 '넌 그것도 모르냐'며 역정을 냈던 기억이 있다. 그 맘이 새삼 이해가 갔다. 선생님도 모든 걸 알지 못하는 동네 어른일 뿐인데, 뭐든 모르면 안 되는 자리에 섰으니 가끔 얼마나 숨고 싶었을까. 한동안 내가 그랬다. 쥐구멍에 라도 들어가 숨고 싶은데 대한민국 학원엔 쥐구멍이 없다. 있다한들 세상 어디에도 나만한 크기의 쥐구멍은 발견되지 않았다. 처음엔 가르치는 일에 적응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시간이 지나자 말 안 듣는 제자들에 치여 기절할 것 같았다. 시간당 1만 3천 원이 거저가 아님을 깨닫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최 선생님, 아이들한테 화를 좀 내세요. 선생님이 그렇게 무르니 아이들이 시끄럽고 말을 안 듣잖아요. 오늘 최 선생님의 미션은 아이들한테 화를 내는 겁니다. 지켜볼 거예요."

원장님의 꾸지람을 듣고 나오는데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한 학기란 시간을 아이들과 지냈더니 이젠 친구와 선생님의 경계가 사라진 상태였다. 나를 '심바'라 부르는 아이들이 그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런 아이들에게 화를 내야 한다니 마음이 천근만근이었다. 문을 스르륵 열고 단상에 올라가 분위기를 잡았다. " 야, 너희들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들어왔으면 공부할 준비를 해야지, 지금 돌아다니는 사람 뭐야? 학원이 너희 놀이터야?"라는 말로 운을 떼었다. 화를 내고자 하니 제자들의 모자란 점들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점들을 하나하나 지적하니 맨 앞줄에 앉은 하영이가 눈물을 터트렸다. 늘 미소 띤 얼굴에 천사 같은 마음씨를 가진 하영이었다. 대답도 잘하고 공부도 제일 열심히 하는 아이를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혼을 내고 있었다. "너희들은 오늘 수업들을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 다들 반성하면서 문제집 풀고 있도록 해. 알겠어?" 그 말을 하고 교실을 나와 화장실로 간 나는 벽을 짚고 울기 시작했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아이들인데 그저 일자리를 잃지 않으려 아무런 이유도 없이 화를 낸 내 모습이 너무 밉고 속이 상했다. 내게 필요했던 돈 몇 푼이 아이들을 향한 내 마음보다 컸나 보다.

다음날 난 사표를 냈다. "저는 아이들이 너무 좋아서 앞으로는 화를 내지 못할 것 같아요. 저의 꾸지람을 듣는 아이들을 보는 게 너무 괴롭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원장님." 짧은 이유를 남기고 학원을 떠났다. 이틀 동안 원장님의 전화를 받지 않고 홀로 마음을 다스리는 동안 원장님이 쓴 장문의 편지가 도착했다. 아이들이 최 선생님을 너무 보고 싶어 한다고,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을 테니 학원에서 마음대로 하라는 요지의 글이었다. 그렇게 다시 복귀한 학원에서 난 쉬는 날도 없이 매일 출근하여 아이들을 눈에 넣었고 온 맘 다해 사랑해주었다.

그 시절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이라…그것은 사치였다. 돈을 벌면 의미가 생기는 것이지 처음부터 의미 있는 일이란 세상에 없다고 생각을 했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틈이 없다고 나는 일의 의미를 따질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집안에서 자란 아이의 생각은 성급했고 편협했다. 그랬던 내가 처음으로 일을 사랑했다.

생각해보면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나의 말투, 행동, 생각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하니 처음엔 책을 읽어주는 게 가장 편했다. 그러다 아이들의 고민을 알게 되고 나의 경험을 일러주며 우린 서서히 마음을 열었다. 함께한 시간이 쌓여가며 나는 내가 하는 일과 아이들을 그냥 온몸으로 사랑하기로 했다. 깨질까 혹 망가질까 조심할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한다면,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좋은 직업은 몰라도 따뜻한 마음을 지닌 어른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했다. 유의미한 결정이었다.

그 후로 난 세상엔 돈보다 의미 있고 소중한 게 있다며 입에 거품을 물고 퍼트리고 다녔다.

아직도 이걸 못 고쳤다. 작은 걸 깨닫고도 크게 널리 퍼트리는 오지랖.
나 역시 소방서에 들어와 초반에 많이 방황을 했다.  (사진=연합뉴스)
세상엔 많은 일과 직업이 존재한다. 의미 있는 일을 처음부터 찾아서 한다면 좋겠지만 대부분 그렇게 직업이 결정되고 일을 하고 있지 않다. 생계와 꿈은 늘 어긋난 나의 첫사랑처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니까. 하지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그건 입에 거품 물고 소문낼 만한 큰 사건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나 역시 소방서에 들어와 초반에 많이 방황을 했다. 내 인생 계획에 소방관은 없었다. 심지어 나 같이 뼛속까지 도시남자가 쉬는 날 냇가에서 물수제비나 날리며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게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먹고 살자니 외로움에 죽을 것 같았다. 그나마 글쓰기가 나의 친구가 돼 외로움을 덜어주고 일에 의미를 찾게 해주는 것 같다. 요즘 나는 학원에서 느꼈던 마음을 또 떠올리고 있다.  

#인-잇 #인잇 #시골소방관심바씨

# 본 글과 함께 읽어 볼 심바씨의 '인-잇', 지금 만나보세요.

[인-잇] 옷에 피 묻히는 내 직업, 후회하지 않습니다    
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