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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권력자만 보호하는 피의사실 공표 금지 원칙

[취재파일] 권력자만 보호하는 피의사실 공표 금지 원칙
"사건을 수사 중인 경북 구미경찰서에 따르면 A 씨가 참고인 조사에서 아내가 임신과 출산을 한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지난 3월 14일 연합뉴스가 보도한 [구미 3세 여아 친모의 남편 "아내 임신·출산 몰랐다" 진술]이라는 기사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포털 사이트를 검색하면 같은 내용을 다룬 기사 수백 건이 쏟아진다. 이밖에도 이른바 '구미 3세 여아 사망 사건 미스터리'와 관련해 내밀한 사생활과 관련된 수사 정보를 다루는 기사가 매일 같이 경쟁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3세 여아 사망 사건'에는 적용되지 않는 피의사실 공표 금지 원칙

구미 3세 여아 가족

놀라운 점은 이 사건 보도와 관련해 피의사실 공표 금지 원칙을 언급하는 미디어 비평가나 진보적 학자들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미 3세 여아 사망 사건 미스터리' 관련 피의자들은 아직 기소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사건과 관련된 진술 내용을 외부에 알리는 것은 피의사실 공표 금지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다. 피의사실 공표는 공판 청구 이전에 범죄 혐의와 관련된 정보를 외부에 알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국 전 장관이나 울산시장 선거 청와대 개입 의혹, 라임과 옵티머스 관련 의혹, 대전지검의 원전 폐쇄 의혹 관련 수사에 대한 보도가 나올 때마다 검찰이 피의사실 공표 금지 원칙을 위반했다고 비난하던 사람들 대부분은 구미에 살았던 힘없는 어린이의 죽음과 관련한 피의사실 공표 앞에서는 침묵하고 있다.

피의사실 공표 금지 원칙은 무엇이기에 사람과 경우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것일까? 피의사실 공표 금지 원칙의 법률적 근거는 형법 126조다. 수사기관 종사자가 직무상 알게 된 피의자의 범죄와 관련된 사실을 공판청구 이전에 외부에 알렸을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하는 조항이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문화된 조항이다. 이 법을 실제로 적용받아 처벌된 사례가 없다는 뜻이다. 세계적으로도 피의사실 공표를 형사처벌하는 국가는 극히 드물다. 그럼에도 수사기관이 수사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피의사실을 전략적으로 공표하는 문제점과 자극적인 피의사실을 무분별하게 유출해 수사받는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는 문제점이 꾸준히 드러나면서 피의사실 공표 금지 원칙의 필요성이 강조되어 왔다.

 

조국 사태와 피의사실 공표의 '내로남불'

조국-정경심 부부

극적인 변화가 생긴 것은 2019년에 검찰이 조국 전 장관 일가에 대한 수사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조국 전 장관 관련 의혹은 검찰 수사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여러 언론사가 자체적으로 발굴한 사실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었지만, 검찰이 강제수사에 착수한 이후부터는 수사 내용과 관련된 기사를 중심으로 보도가 이어졌다. 그러자 집권 여당 정치인들과 조국 전 장관의 지지자들은 피의사실 공표 금지 원칙을 거론하며 조국 전 장관 관련 의혹 보도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피의사실 관련 보도가 쏟아진 것이 이때 처음 있었던 일은 아니다. 조국 일가 수사를 총괄했던 윤석열 검찰총장이나 한동훈 검사장이 이보다 불과 1~2년 전에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할 때나 사법농단 사건을 수사할 때도 피의사실 보도가 쏟아졌다. 하지만 당시엔 피의사실 보도에 오히려 갈채를 보냈던 사람들이 조국 사태가 발생하자 피의사실 공표와 피의사실 보도는 문명사회에서 있어서는 안 될 반인권적 행태라고 꾸짖기 시작한 것이다. 조국 사태와 '내로남불'은 떼어놓기 힘든 관계지만, 피의사실 공표 금지 원칙에 대한 어떤 사람들의 태도만큼 '내로남불' 행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많지 않다.

 

정보 통제 수단이 된 '형사사건 공개 금지 규정'

법무부

조국 사태 직후 법무부는 수사 정보를 외부에 알리는 일을 원천 봉쇄하는 규정을 새로 만들었다. 2019년 12월 1일 자로 "형사사건 공개 금지 등에 관한 규정"(이하 '형사사건 공개 금지 규정')을 시행한 것이다. 종전까지의 명칭이 "인권보호를 위한 수사공보준칙"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규정의 이름만 봐도 정보 공개 금지에 방점을 두고 있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새 규정의 취지는 간단하다. 이 규정에서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소 제기 이전의 수사 관련 정보 공개를 금지하고, 수사 정보를 공개하기 위해서는 수사정보공개심의위를 소집한 후 심의위원회에서 허가한 사항만 공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이 규정은 도입될 때부터 검찰, 더욱 정확하게는 인사권 등으로 검찰을 통제하는 법무부와 청와대 뜻에 따라 정보 공개 여부를 자의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새로운 규정의 도입으로 형사사건 관련 정보 공개는 원칙적으로 차단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알리고 싶은 정보가 있다면 검찰은 수사정보공개심의위원회 소집을 요청한 후, 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서 일정 범위의 정보를 공개할 수 있다. 문제는 검찰이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는 사건, 감시의 시선에서 벗어나 처리하고 싶은 사건이 있을 경우 수사정보공개심의위원회 소집을 요청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점이다. 검찰이 수사정보공개심의위 소집을 요청하지 않으면 어떤 수사정보도 외부에 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느슨한 과거의 수사공보준칙에 근거해 공개가 허용되던 정보나, 관행에 따라 언론이 접근할 수 있었던 정보마저 검찰이나 법무부가 원할 경우 이제는 완전히 차단할 수 있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검찰을 투명한 정보공개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양심적 조직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검찰이 어떤 사건의 공개를 원하고 어떤 사건의 공개를 꺼릴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구체적 사례를 살펴보자. 지난해 검찰은 n번방 성착취 사건과 관련해 수사 실무자가 기자들을 만나 수사 내용을 상세하게 브리핑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불법 승계 의혹 사건을 수사한 이후에도 수사 실무자가 카메라 앞에서 수사 결과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후 기자들을 상대로 수사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대전지검이 원전 폐쇄 의혹과 관련해 현직 공무원 3명을 구속 기소 또는 불구속 기소할 때는 기자들을 상대로 수사 내용을 브리핑하지 않았다. 라임 관련 의혹 사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n번방 성착취 사건이나 삼성 불법 승계 사건의 경우 법무부와 청와대의 그 누구도 수사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원전 폐쇄 관련 의혹이나 라임 의혹 사건의 경우에는 수사 진행 과정에서부터 법무부와 정부 여당의 여러 관계자들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트렸던 사안이다. 형사사건 공개 금지 규정 이후 정보 공개 여부가 권력의 취향에 따라 자의적으로 결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수원지검과 임은정, 원칙은 공정하게 적용되는가?

임은정 검사 (사진=연합뉴스)

그나마 이런 문제는 형사사건 공개 금지 규정 자체의 태생적 한계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한계가 분명한 형사사건 공개 금지 규정 자체도 어떤 경우에는 적용하고, 어떤 경우에는 적용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 입장에서 탐탁하지 않은 기사가 나올 경우에는 형사사건 정보 공개 금지 규정을 근거로 담당자를 추궁하고, 법무부 입장에서 이견이 없는 기사가 나올 경우에는 정보 유출이 있어도 담당자에게 아무런 불이익도 주지 않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불과 며칠 전 있었던 두 사건만 비교해 봐도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공수처장과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 면담 사실에 대한 수원지검의 정보공개와 한명숙 모해위증 의혹 사건과 관련한 임은정 검사의 감찰 관련 정보 공개에 대한 법무부의 반응은 같지 않았다.

김진욱 공수처장이 지난 16일 국회에 출석해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을 면담한 사실이 있지만, 면담 사실을 수사보고로 작성해 수원지검에 사건을 재이첩하면서 같이 보냈다.'라고 발언했다. 김진욱 처장의 발언 직후 수원지검 공보관은 공수처가 면담 관련 수사보고를 보내온 것은 맞지만 이 수사보고에 정작 면담 내용은 기록돼 있지 않다고 발표했다. 공수처장과 피의자인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이 나눈 대화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을 공개한 것이다. 수원지검 발표 이후 공수처장과 이성윤 지검장의 만남이 부적절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러자 법무부는 수원지검의 발표와 관련해 경고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형사사건 공개 금지 규정에 위반될 소지가 있다는 취지였다. 박범계 장관도 다음날인 지난 17일 출근길에 기자들을 만나서 수원지검 관련 보도에 대해 "정확한 경위는 알지 못하지만 면담 내용이 쉽게 공개될 수 있나 의문이 있다. 하지만 감찰은 아직 생각한 바 없다."라고 말했다.

반면 임은정 검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한명숙 모해위증 의혹 사건 감찰과 관련된 여러 정보를 공개한 것에 대해서는 법무부가 경고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 임은정 검사는 대검이 아니라 "대검 감찰부 입장"이라며 한명숙 모해위증 의혹 사건과 관련해 감찰부장과 감찰3과장 그리고 자신의 결론이 어떻게 달랐는지 공개했다. 또한 과거 한명숙 수사팀 관계자의 주장이 인용된 언론보도가 나오자, 이를 반박하면서 감찰과 관련된 여러 사실 관계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했다. 그러나 법무부가 임은정 검사에게 경고를 했다거나, 법무부 장관이 공개적으로 의문을 표시하는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바 없다.

수원지검의 입장 표명은 공보관이라는 공식 창구를 거친 것인데 비해 임은정 검사는 검찰총장 직무대행이나 대변인실의 허가를 받지 않고 "대검 감찰부 입장"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직접 올린 것인데도 그렇다. 설사 법무부의 누군가가 임 검사에게 경고를 했다고 치더라도, 바로 다음날 법무부 장관이 임은정 검사의 이름을 여러 차례 언급하며 조남관 검찰총장 직무대행의 결정을 뒤집고 임 검사의 손을 들어준 상황에서 이것이 의미 있는 조치로 여겨졌을지 의문이다. 과연 형사사건 공개 금지 규정과 관련된 원칙이 수원지검과 임은정 검사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전한 정파적 비난…힘없는 사람들에겐 무관심


피의사실을 보도한 기사가 수용되는 태도 역시 여전히 지극히 정파적이고 불공정한 건 마찬가지다. 대전지검 원전 폐쇄 의혹과 관련한 극히 사소한 사실관계에 대한 기사마저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나 '검언유착'이라고 비난하던 사람들이 한명숙 모해위증 의혹 사건과 관련해서는 대검 감찰부의 기록이 사실상 통째로 언론에 보도되어도 오히려 갈채를 보낼 뿐 비판하지는 않는다. 국정농단 사건이나 사법농단 사건 당시에는 피의사실 보도에 찬사를 보냈지만, 2019년 조국 사태가 벌어진 이후 비로소 피의사실 보도의 문제점을 새롭게 깨달았다는 어떤 사람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국 사태 이후에는 정치적인 유불리를 떠나서 일관된 기준을 가지고 피의사실 보도를 비판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까? 자신이 지지하는 세력에 대한 피의사실 보도는 반인권적 검언유착이고, 자신이 비난하는 세력에 대한 피의사실 보도는 참된 언론인의 용기 있는 저널리즘이라고 규정하는 정파적 행태는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정파적 수용보다도 더욱 나쁜 것이 있다.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피의사실 보도는 지금도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사실상 제한 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글의 첫머리에 언급했던 '구미 3세 여아 사망 사건 미스터리'가 대표적 사례다. 도대체 민정수석과 법무부 장관을 지낸 인물과 관련된 피의사실에 대한 기사는 보도의 공익성과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지만, 구미에 살았던 여자 아이의 사망과 관련된 가족의 사생활에 대한 보도는 허용될 수 있는 논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법무부 장관의 아내가 미공개정보를 이용해 주식 투자를 했다는 의혹에 대한 기사는 반인권적 보도이고, 공무원들이 감사원 감사를 앞두고 조직적으로 증거를 인멸했다는 사실에 대한 보도는 부적절한 것인데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3살 여자아이의 친어머니 누구인지에 대한 수사 상황을 공개하는 것은 허용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권력자를 위해 작동하는 '피의사실 공표 금지 원칙'


피의사실 공표와 관련된 이 모든 '내로남불'과 기회주의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칙이 있다. 피의사실 공표 금지 원칙이 권력자를 위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힘 있는 사람에게 불리한 기사가 보도되지 않도록 입막음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동시에, 힘 있는 사람의 적대자나 힘없는 사람에게 불리한 기사에 대해서는 전혀 적용되지 않고 있다. 피의사실 공표 금지 원칙이 보호해야 하는 인권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기본권이다. 그러나 지금은 피의사실 공표 금지 원칙이 힘 있는 사람의 기본권만 두텁게 보호하고 있다. 조국 사태 이후 어떤 사람들이 정파적인 이유로 피의사실 공표 금지 원칙을 강조할 때부터 예상됐던 우려가 현실에서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수사기관의 피의사실 공표 금지 원칙과 국민의 알 권리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 두 가지 가치다. 수사기관이 수사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피의사실을 선택적으로 공표하는 행위의 문제점은 분명하지만, 피의사실 공표 금지를 이유로 사실상 수사기관과 정부의 뜻대로 국민의 알 권리를 자의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드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할 일이다. 더구나 그런 규정조차 권력과의 거리에 따라 서로 다르게 적용되는 것은 가장 피해야 할 일이다.

피의사실 공표 금지 원칙은 힘 있는 이들을 위한 입막음 수단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피의사실 공표 금지 원칙을 자의적으로 적용하며 활용하고 있는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 언젠가 정부가 교체되고, '우리 편'이 힘을 잃으면 자의적인 원칙 적용의 피해자는 자신들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모두가 공평하게 피의사실 공표 금지 원칙의 보호를 받는 동시에 모두의 알 권리를 적절하게 보장되기 위해서는 피의사실 공표 금지와 공익적 피의사실 보도를 현실적으로 절충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피의사실 공표 금지 원칙을 자의적으로 적용해 입막음 수단으로 활용하는 행태부터 중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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