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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공사장에 버려진 시신, 핀란드 뒤집은 '학폭'

이보영│전 요리사, 현 핀란드 칼럼리스트

지난 주말, 한 소년의 죽음을 기리는 촛불 추도 모임에 다녀왔다. 친구 3명에게 집단 구타당한 뒤 소년은 공사장 한구석에 버려져 15년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코로나 시국이라 사람들이 직접 모이는 것을 자제했지만, 시민들이 가져다 놓은 촛불은 북방의 추운 겨울밤을 지펴 주었다.

한동안 촛불 앞에 서서 그 소년의 삶과 죽음에 대해 묵상했다. 그의 삶은 어쩌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웠을지 모른다. 유치원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집단 따돌림을 당했고 몇 년 전부터는 가정 문제로 아동보호단체에 맡겨져 그곳에서 생활해왔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내성적이고 착하며 재능있는 학생으로 기억된다. 죽기 몇 달 전부터 학생의 몸에서 상처가 여러 차례 발견됐지만, 그는 가해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사건 당일 쇠파이프로 몇 시간 동안 구타당하고 목까지 졸린 것으로 확인됐지만 단 한 번의 저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것으로 부검 결과 드러날 정도였다.

기도 희망 촛불 평화 소망 (사진=픽사베이)

추도회에서 돌아온 그 날 밤, 왠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 할 것 같아 소셜미디어(SNS)에 사진과 함께 간단한 설명을 올렸다. 금세 "교육시스템 좋다는 핀란드에도.. 충격이네..."라는 댓글이 달렸다. 요즘 우리나라 한국에선 핀란드라는 나라 자체와 핀란드 교육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히 좋아진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곳 역시 엄연히 선인과 악인이 공존하는 사회이고, 학교 폭력(학폭)과 집단 따돌림(왕따)이 존재한다.

내가 기억하는 한, 청소년 폭력 사건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이렇게 전국적으로 촛불 추도 모임까지 벌어진 것은 처음이다. 핀란드 사람들이 이번 사건에 더욱 주목하는 이유는, 16세 소년 3명이 저지른 살해 방식이 상당히 잔인했다는 점, 사디스트처럼 그 과정을 동영상으로 찍어 놓았다는 점, 게다가 피해자와 가해자가 4세 때인 유치원 때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는 점 때문이다.

가해 학생들은 1심에서 각각 12, 11, 9년을 선고받았다. 핀란드에도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미성년자 보호법이 있다. 15세 미만 학생은 처벌할 수 없고 15~17세는 살인을 저지르더라도 최고 형량이 12년에 제한돼 있다. 그런데 이번 학폭 가해자 측은 더 낮은 형량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컴퓨터 프로레슬링 게임을 즐기던 아이들이라 얼마나 공격해야 사람이 죽는지 현실감을 잃어버려 저지른 일이고 고의성은 없는 살인이었다는 주장이다.

핀란드 일부 언론은 이들을 악마를 상징하는 '파리대왕'(주: 1983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윌리엄 골딩의 소설로 문명과 동떨어진 곳에서 고립된 소년들이 힘만을 유일한 가치로 내세우고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과정을 잘 그려 냄)으로 부르기도 한다. 고의성을 밝혀내 엄중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현재 가해 학생들에 대한 정신감정이 추가로 이뤄지고 있는데, 이 결과가 반영될 선고심에서 어떤 형벌이 최종적으로 내려질지 핀란드 사람들은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지난해부터 핀란드 언론에 청소년들의 폭력과 살해 사건 기사가 유난히 자주 오르내린다. 지난해 청소년 범죄는 예년보다 몇 배 늘어났다고 한다. 건수는 늘어났고 연령은 낮아졌으며 행위는 더욱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변해 핀란드 사회가 큰 충격을 받고 있다. 이같은 현상의 원인을 코로나 때문으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온라인 수업을 하며 학생 관리가 소홀해진 점, 코로나로 갈 곳을 잃고 스트레스를 받은 학생들이 전보다 손쉽게 술이나 마약에 손을 대고 폭력을 휘두르게 된다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 핀란드의 가정 폭력 신고 전화가 많이 늘어나고 있는데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며 가족 간 문제가 더 심하게 불거진 점도 이유가 될 수 있다.
아동학대

핀란드 언론은 당장 가해 학생의 처벌 외에도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원인 규명과 더불어 장기적 해결책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살인의 책임은 물론 살인자가 져야하지만, 약자를 보호할 책임은 그가 속한 사회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각 분야 전문가들의 공통된 관점은 사후약방문보다는 사전 예방이다. 『악의 해부(The Anatomy of Evil)』라는 책의 저자이자 핀란드의 저명한 범죄 심리학자인 한누 라우에르마(Hannu Lauerma)씨는 폭력성과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 등의 성향을 보이는 아동을 10세 이하 조기에 발견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뇌는 20세까지 발달하지만, 반사회적이며 사이코패스적 특징은 3~4세부터 이미 드러난다. 충동적이며 거짓말을 잘하고 공감 능력이 부족한 아이들은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어릴 때부터 관리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공감 훈련 등 체계적 시스템을 통해 지원하면 범법자로 자라는 경로를 역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정부 차원에서 이런 아동들을 위한 많은 입체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한다.

때맞춰 핀란드 법무부도 올해 초부터 조기에 문제 청소년을 도와줄 수 있는 파일럿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Velitski'(벨리츠키)라 명명된 이 프로그램은 범죄자로 엇나갈 가능성이 있는 청소년을 조기에 발견, 지원하는 것이 목적이다. '조기 발견'이 여기서도 키워드다. 그래서 15세 미만의 범죄 기록이 없는 청소년이 그 대상이다. 선정된 청소년 1인당, 전담 사회복지 요원 1인이 붙는다. 감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밀착해서 그 청소년의 정상적 성장을 지원하기 위해서이다.

사무실이 아닌 집까지 청소년을 찾아가는 이유는 집에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아이들이 외부의 도움을 찾아 나서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서비스를 받게 된 청소년은 전담 사회복지사를 통해 필요한 모든 지원 서비스를 쉽게 받을 수 있게 된다. 전담 요원은 일반 근무 시간 외에도 청소년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문제 청소년을 돌아오게 하는 열쇠는 쉽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의 존재 여부와 그 사람과 청소년이 쌓은 신뢰라고 이 프로그램은 믿고 있다.

언뜻 생각하면 개인 전담 사회복지사를 운영하는 일에 많은 예산이 들 것 같은데 담당자는 오히려 장기적으로 보면 정부 예산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소개한다. 문제 청소년이 성인이 되어 사회에서 소외되고 해악을 끼치게 될 때 그가 속한 사회가 치뤄야 하는 비용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라는 이유이다. 현재 이 프로그램은 핀란드 4개 지자체에서 시범 실시되고 있다. 한 지자체에서는 청소년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가 모두 전문 상담을 받도록 주선하고 있다. 법무부 담당자는 이 프로그램의 성과가 빨리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라며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사람은 하루 아침에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며 계속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과 귀도 체육계와 연예계의 '학교폭력 미투(Me Tooㆍ나도 당했다)'에 쏠려있다. 이제는 이른바 '공인'들의 학교폭력 과거가 드러나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것이 거의 정해진 수순인 것 같다. 현재의 관용적 '소년법'을 개정해 더 엄중한 벌을 내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물론 학교폭력에 있어서 '무관용 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여론과 강력한 형벌이 학교폭력을 줄이는 데 일부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학교 폭력과 관련된 공론이 너무 처벌 위주로만 흘러간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보다 근본적이며 장기적인 해결책도 함께 공론화되기를 기대해본다.



인잇 이보영 네임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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