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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재벌 회장 아들이 감기에 걸리면?

박용만 회장 산문집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 출간<br>재벌이 쓴 솔직한 수필…'경영 경험' 더 소개했더라면

[취재파일] 재벌 회장 아들이 감기에 걸리면?
재벌 기업 회장 아들이 감기에 걸린다. 회장은 인자한 어투로 아들에게 말한다. "이 녀석아, 체력 관리 잘하는 것도 능력이다." 뒤이어 왕진 의사를 호출한다. "여보, 김 박사 좀 다녀가라 해요." 흔히 보는 드라마 속 재벌 집 풍경이다. 현실 재벌은? 감기 걸린 아들 향해 이렇게 외친다. "아오, 야! 가까이 오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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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data-captionyn="N" id="i201525517"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210302/201525517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 v_height="1216" v_width="800">
대한상공회의소 박용만 회장이 최근 출간한 산문집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마음산책)의 한 대목이다. 평소 SNS를 통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소소한 일상과 지나온 시간을 글로 옮겼다. "내가 생각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쓰고 나누는 일이 내게는 즐겁다"고 박 회장은 책머리에 밝혔다.

재벌 이야기는 늘 그 자체로 흥미롭다. 범인들은 부의 규모가 남다른 부자들의 삶이 궁금할 것이고, 직장인들이라면 나를 고용하는 저들의 사고를 알고 싶다. 동료 기업인들도 남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나 의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 재벌들은 아예 은둔을 택해 대중과 소통 않거나, 신화적 영웅담으로 꾸민 자서전을 대필 출간하는 게 보통이다. 이런 점에서 <그늘까지도…>는 다른 기업인이 쓴 책과 구별된다.

솔직함이 미덕인 산문집이다. 파푸아뉴기니에서 봉사 중인 한국 수녀들을 위해 즉석에서 SUV 차량을 1대 사주는 거부의 면모 이면엔 목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집 안에서 멸치 똥 따는 일상이 있다. 대장 수술 뒤 겪었던 극심한 고통과 벌독 알레르기, 황반변성, 허리디스크 등 자신의 질병 상태는 물론, 툭하면 욱해서 뭐든 집어던졌던 나쁜 버릇까지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두산그룹 초대 회장 박두병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형들과 어머니가 달라 불안했던 유년의 기억도 담았다. 부자인 아버지를 만나 경제적 어려움은 없어도 "나이 많은 아버지가 내가 원하는 시점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버겁고 힘들었다고 술회한다. 18살 저자가 아버지 임종을 앞두고서야 처음으로 형들과 '큰어머니'가 사는 집에 발을 들이는 순간은 드라마틱하다. 비에 젖어 신호등을 기다리는 중학생 아들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던 엄한 아버지지만 "매를 무서워하지 말고 네가 옳다고 생각한 대로 살라"던 가르침이 오늘날 자신을 만들었다며 선친 향한 그리움을 책 곳곳에서 드러낸다.

저자를 기르다시피 한 외조모에 대한 추억과 첫사랑인 아내를 처음 본 순간처럼 가족과의 애정 어린 에피소드는 물론, 배우 메그 라이언과의 짧은 비행 같은 크고 작은 일화들이 지나간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정진석 추기경부터 기자와 웨이터, 도시빈민 등 각계각층과 만나 소통하며 배운 삶과 '육아 방침'까지 속사포처럼 이어진다. "그냥 친구의 즐거운 이야기를 듣듯 읽어주시기를 소망한다"는 저자 바람대로 읽다 보면 어느새 재벌도 우리 같은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전문 작가의 글이 아닌 만큼 책 속 수필들이 더는 가감할 게 없는 뚜렷한 구조와 문장들로만 이뤄져 있지 않은 건 사실이다. 독자에 따라선 저자가 중언부언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왕성한 독서가나 출판 관계자라면 흥미로운 마음에, 더 아쉬울 지점들도 있다. 한때 10대 민간 그룹에 속했던 대기업집단 총수가 저자인 '경영 서적'으로서의 가치 때문이다. 변화에 저항하기 마련인 경험 많은 직원들을 어떻게든 데리고 쓰는 게 중요하다는 '용인술'에서부터, 원망만 돌아오더라도 때론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다는 '리더십 이론'까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더구나 구조조정과 인수합병을 반복해 기업을 글로벌화 한 국내 기업인의 저서는 출판시장에서 그 자체로 희귀하다. 실제로 밥캣 인수 때 겪은 문화 차이 소개나 더 나은 조건을 얻으려 수 싸움을 벌인 협상의 일단 등 책에 담긴 경영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귀하기 때문에 더 아쉬움이 남는다.

박용만 회장 (사진=대한상공회의소 제공)

7년간의 대한상의 회장직을 곧 마치는 저자는 최근 정치권의 이른바 '경제3법' 입법 공세 앞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경영계 대표 단체 수장으로서 왜 세게 맞서지 않느냐는 것이다. 피상적이기 쉬운 SNS 소통을 넘어 한 권의 책에 담아낸 저자의 생각들은 이런 비판에 대한 답이 될 것도 같다. 저자는 개도국 청년에게 우리 산업화 경험을 전할 때 가슴 뜨거워지고, 후진국 환경에 시달리다 국적기에 오르면 벅차오르지만, 한편으론 오랜 외국 생활 끝 귀국해 마주한 80년대 민주화투쟁에 부채의식도 드러낸다.

"(기업을 둘러싼 환경이) 어리숙했기 때문에 기업이 편했던 시절도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기업이) 국가와 사회에 대한 부채의식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는 저자의 균형감각이 단순한 수사로만 여겨지진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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