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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서명 조작' 의혹…모습 드러내는 일본 우익의 추악한 민낯

2019년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에서 열렸던 '아이치 트리엔날레'의 기획전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를 기억하시는 분들 많으실 겁니다. 당시 기획전에 전시됐던 '평화의 소녀상'을 비롯해 몇몇 작품들에 대해 일본 우익 세력이 1만 건이 넘는 협박 전화와 메일, 테러 예고를 보내 전시가 중단됐다가 우여곡절 끝에 트리엔날레 폐막 1주일을 남기고 다시 재개됐던 사건입니다. 전시 중단 이후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사회와 예술계는 물론 전 세계에서 일본 우익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이를 의식한 아이치 트리엔날레 주최 측이 급히 전시를 재개하기로 하고 예술가들과 협의를 벌인 내용은 ▶ [2019.09.30 취재파일] '소녀상' 전시 재개되나…폐막 보름 앞두고 '상황 변화'로 전해드린 바 있습니다.

'평화의 소녀상' 전시를 반대하며 협박까지 일삼았던 일본 우익들은 그 후 기획전 전시 재개를 결정한 최고 결정권자, 즉 트리엔날레 행사의 실행위원장이었던 오무라 히데아키 아이치현 지사를 직접 겨냥했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농림수산성 관료를 거쳐 자민당에서 다섯 번 중의원으로 당선됐던 이른바 '우리 편' 오무라가 지사가 되더니 정치적 기반을 버렸다는 배신감이 작용했습니다. 2019년 당시 오무라 지사의 전시회 재개 결정은 아이치현 지사로서 자신의 '업적'에 흠집을 남기는 것을 피하려는 목적이 컸습니다만, 결과적으로는 우익 세력이 오무라 지사를 '동지'에서 '적'으로 돌리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 소녀상 (사진=연합뉴스)

그래서 지난해 여름에 시작된 것이 오무라 지사에 대한 '주민소환 운동'입니다. '평화의 소녀상'을 비롯한 전시 내용에 문제가 있다며 소환 서명운동을 주도한 것은 일본의 유명한 성형외과 의사 다카스 가쓰야입니다. 역시 아이치현 출신인 다카스는 본인의 이름을 딴 대형 성형외과 체인을 보유한 재력가로, 평소에도 트위터나 방송 출연 등을 통해 극우적인 시각을 숨김없이 드러냈던 인물입니다. 여기에 아이치 트리엔날레 당시에도 전시장 밖에서 우익들의 집회에 참석하며 전시를 반대했던 극우 성향의 가와무라 다카시 나고야시장이 '응원단'으로 참여하면서 처음에는 뭔가 일을 낼 것처럼 보였습니다.

일본 지방자치법에 규정된 '주민 소환' 규정을 아이치현의 인구 약 755만 명에 대입해 계산해보면 오무라 지사를 '끌어내릴' 수 있는 주민투표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아이치현 주민 86만 명의 서명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절반도 안 되는 43만 5천 명의 서명을 받아 제출하는 데 그쳤습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완전한 형태'의 트리엔날레 개최가 아이치현의 이미지에도 훨씬 도움이 된 것을 생각해보면 오무라 지사에 대한 퇴출 운동은 실현 여부보다는 우익들의 '존재 과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게 판명된 셈입니다. 그러나 결과가 이렇게 나오자 잔뜩 머쓱해진 다카스 원장은 건강 악화를 이유로 서명운동 종료를 황급히 선언하고 전면에서 퇴장했습니다.

그러나 '코미디' 같은 우익들의 한바탕 활극은 그대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서명운동의 실무를 담당했던 사무국에서 '서명이 부정한 방법으로 조작됐다'는 이른바 '양심선언'이 나온 겁니다. 아이치현 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해 12월에 제출된 서명 전체에 대해 유효 여부를 검증하기로 했고, 한 달에 걸쳐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지난 1일에 발표된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제출된 서명 43만 5천 건 가운데 83%인 36만 2천여 건이 '무효'로 판명됐습니다. 한 사람이 복수의 명의로 서명을 하기도 했고, 무려 17만 명분의 서명은 아이치현의 선거인 명부에 등록되지 않은 사람의 명의였습니다. 심지어 8천여 명의 서명은 명의자가 서명 시점 이전에 이미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대규모 '서명 조작'이 의심되자 아이치현 선관위는 지방자치법 위반 혐의로 사건을 경찰에 형사고발하기에 이릅니다.

경찰이 움직이면서 빠르게 진상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경찰은 소환 운동 사무국 관계자로부터 '서명 대필을 위해 사람을 모아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고 밝힌 나고야 소재 홍보대행사의 관계자를 불러 사정을 청취하며 수사망을 좁혀가고 있습니다. 또 24일에는 아이치현 내 64개의 선관위가 보관하고 있는 서명 명부를 압수했습니다. 용의자는 특정하지 않았지만 사건의 가장 중요한 증거인 명부를 일단 확보하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한 겁니다.

25일 서명 명부 압수에 나선 경찰 (사진=일본 NTV 캡쳐)

이에 앞서 지난 주에는 진상규명에 중요한 증언이 나왔습니다. 아르바이트 인력을 모집하는 스마트폰 앱을 운영하는 한 회사가 이번 서명 위조에 동원된 것으로 보이는 아르바이트 모집에 자사의 앱이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힌 겁니다. 앱 내 게시판에 구인 광고가 올라왔는데, 아이치현에서 멀리 떨어진 규슈의 사가(佐賀)현에서 '리스트에 기초헤 서명을 옮겨 쓰는 작업'에 나설 사람을 모집했다는 내용입니다. 서명운동이 진행 중이었던 지난해 10월 말에 이런 아르바이트 모집이 집중됐는데, 서명운동 기한이 끝나기 전에 목표 수치를 채우려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경찰이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경찰 수사가 본격화하자 서명운동의 실무를 담당한 사무국 측은 22일 급히 기자회견을 열고 사무국은 서명 조작에 대해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아는 것도 없다며 관련성 일체를 부인하고 나섰습니다. 은둔하던 다카스 원장도 기자회견에 나와 한껏 억울한 표정으로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며 한껏 격앙된 표정으로 항변했습니다. 오무라 지사를 공격해 정치적 입지를 다지던 가와무라 나고야시장 역시 '나는 모른다'며 발을 빼고 있습니다.

22일 기자회견에 나선 다카스 원장 (사진=일본 NTV 캡처)

소환 서명운동의 표적이 됐던 오무라 지사는 서명 위조에 대해 "법과 증거에 기초해 엄정하게 수사해달라"고 당국에 요청했습니다. 경찰은 이번에 압수한 서명록을 다시 분석하고 소환 운동 사무국 관계자에 대한 수사를 계속해서 부정행위의 실체를 밝히겠다며 의욕을 보이고 있습니다. 점점 속도를 높이고 있는 현지 경찰의 수사 결과에 따라 이번 아이치현 지사 소환 서명 위조사건은 일본 우익세력의 비상식적이고 저열한 행태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24일 기자회견에서 철저 수사를 촉구하는 오무라 지사 (사진=일본 NTV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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