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그, 사람] 아들을 가슴에 묻고, 거친 세상 향해 발걸음

[그, 사람] 아들을 가슴에 묻고, 거친 세상 향해 발걸음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윤춘호(논설위원) 기자 spring84@sbs.co.kr

작성 2021.02.20 10:19 수정 2021.02.20 10:53 조회수
프린트기사본문프린트하기 글자 크기
1. 자랑할 게 없는 삶이었다. 오직 아들만이 자랑이었다. 그 아들이 죽자 모든 게 바뀌었다. 이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고, 이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난과 고통이 자랑이다. 이 사람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자신의 가난한 삶과 고통을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지 않았고 공백처럼 남아있는 부분도 있다.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울 것도 없지만 그리 내세울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다. 호적상으로는 1970년 출생이지만 실제는 1968년생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3대가 사는 집안의 6남매 중 둘째였다. 유일한 남동생이 고3 때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 말고는 평범한 유소년 시절을 보냈다. 쇠꼴 베고 나무하고 논에서 피 뽑은 이야기, 남자아이 여자아이 할 것 없이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논 이야기, 상급학교 진학을 일찍 포기한 사연 등은 그 또래 사람들에게는 흔한 이야기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10대 후반의 나이에 공장에 취업한 이야기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어렸을 때 이사장님 꿈이 뭐였습니까.
"꿈같은 것은 딱히 없었고 평범하게 잘 살자는 생각이었어요. 어떤 직업이 나에게 잘 맞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았던 거 같아요. 많이 배우거나 그랬으면 진로 방향이나 이런 선택지가 있었을 텐데…"

첫 직장으로 경북 구미에 있는 섬유공장에 취업한 이후 30년 동안 모두 세 곳의 직장을 옮겨 다녔다. 전문적인 기술이나 지식을 요구하는 업무는 아니었다. 하루에 12시간씩 서서 일하기도 했고 수당을 한 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 한 달에 120시간씩 잔업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회사가 잘 돼야 내가 잘 된다는 생각을 하며 살던 시절이었다. 첫 월급이 12만 원, 한 달 용돈으로 5천 원만 쓰면서 돈을 아껴 시골에 있는 부모님을 도왔다. 그런 딸을 아버지는 안쓰럽고 고맙게 생각했다. 이 역시 그 시절에 흔한 이야기다. 같은 공장에서 만난 동료와 26살에 결혼을 했고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 아들이 김용균이다. 아이 욕심이 많아 자식을 더 낳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그러지 못했다.

26살에 결혼해 하나 둔 아들, 김용균과 함께
스스로 책임감이 강하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놓친 불량을 잡아내 상사에게 칭찬을 듣고, 우수사원으로 뽑힌 이야기는 이 사람의 성실성이나 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긴 하나 이 역시 예외적인 스토리는 아니다. 회사를 세 군데 옮겨 다녔지만 노동조합이 있던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노동조합의 '노'자도 모르고 살았다. 특별히 지지하는 정당도, 정치인도 없었다. 정치는 TV에서나 나오는 딴 세상 일이라고 생각했다. 선거 때가 되면 마지못해 투표했고 몇 번은 아예 기권했다.

남편이 10년 전 심근경색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이후 김미숙이 사실상 가장 역할을 했다. 전셋집을 전전했지만 돌이켜보면 행복한 시절이었다. 남편은 자상했고 외아들 용균이는 '딸처럼 애교 많은' 아들이었다. 겉으로만 보면 억압당한 기억도, 저항의 기억도 그리 없다. 가난의 기억이 이 사람의 멱살을 틀어쥔 것 같지도 않다. 과거의 삶만 봐서는 지난 2년 동안 이 사람이 보여준 극적인 변화를 설명하기 어렵다.

남편, 용균이와 즐거운 한때
2. 지난 2018년 12월 14일 이 사람이 서울 SBS 본사 뉴스 스튜디오에 나타났다. 아들이 숨진 지 사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검은색 상복이 아니라 티셔츠를 입고 나온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난생처음으로 방송에 출연한 것일 텐데 낯선 상황에 긴장하거나 압도되지 않았다. 논리가 정연하지는 않았지만 슬픔 때문에 말이 엉키는 일은 없었다. 눈물을 쏟지도 않았다. 처연하지만 냉철한 모습으로 자기 할 말을 다했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아들이 사고로 숨진 직후 이 사람이 보여준 모습은 우리가 통념으로 알고 있던, 그리고 예상하던 자식 잃은 어미의 모습이 아니었다. 몇 번씩 혼절하거나 식음을 전폐하지도 않았고, 온몸으로 땅바닥을 뒹굴며 악다구니를 쓰지도 않았다. 슬픔에 젖어 있지만 평정심을 잃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들이 최후를 맞은 곳을 찾아 일일이 확인하고 점검하는 모습은 현장 검증에 나선 수사관 같다. 내 아들이 부끄러운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왜 얼굴을 가리고 이름을 지우냐고 했다.

-아드님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라고 언론에 요구했는데 그게 이전의 다른 산재사고 사망자들과 김용균 군이 결정적으로 다른 거 같습니다만…
"처음에 다 모자이크 처리를 하네 어쩌네 그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아들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모자이크를 해야 하나… 범죄자들을 주로 모자이크 처리하잖아요. 저 그거 못마땅했어요. 그래서 그냥 노출시켜달라 그랬지요."

김용균 어머니, <그사람>용
비정규직 청년들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던 시점이었다. 2년 전 서울 구의역에서 비정규직 청년 김 모 군이 참변을 당한 데 이어 그와 비슷한 사건이 또 벌어졌다는 사실에 대중들은 경악했다. 무엇보다 용균이와 같은 또래, 비슷한 처지의 청년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그렇지만 다른 숱한 죽음이 그랬듯이 며칠 호들갑 떨고 나면 잊혀질 수 있는 일이었다. 김미숙은 아들의 죽음을 절대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다.

-많은 산재 피해 유족들이 있지만 김미숙 이사장 같은 분은 드물잖아요. 다른 유족들과 본인이 어떤 점에서 다르다고 생각하세요.
"일반인이라면 이런 일 있더라도 큰 회사 상대로 혼자 싸우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여러 단체가 함께 해줘서 이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저는 어쩌면 운이 좋은 거 아닌가 싶어요. 저는 시민단체 사람들이 끝까지 해주면 고맙고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끝까지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대통령과의 면담 제의도 걷어찼다. 대통령 만나면 모든 게 해결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독하다는 말이 나왔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이 사람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내가 별난 건가, 내가 이상한 건가, 내가 왜 다른 사람과 다른 거지. 다른 사람들은 묻어두려 하고 잊으려 하고, 덮고 가려고 하는데 나는 왜 다르지, 내가 이상한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한 달쯤 지났을 때 남편이 이제 그만하자고 했다. 아이를 차디 찬 냉동고에 넣어둔 채 이게 무엇하는 짓이냐고 했다.

"한 달 지났는데도 해결이 안 되니까 애 아빠가 그만했으면 좋겠다 그래요. 제가 그랬어요. 지금 빨리 수습해서 불태우는 거나 조금 늦게 하는 거나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용균이 이렇게 만들어 놓은 사람들 처벌하고 진상규명 꼭 해야 되는 거 아니냐. 당신이 시댁 쪽 어른들 잘 설득해서 막아달라고 부탁했어요."

김용균 어머니, <그사람>용
두 다리 뻗고 주질러앉아 통곡하는 것 대신 언론사 한 곳이라도 더 만나 용균이의 억울함을 호소했고 악다구니 쓸 힘으로 핸드폰 메모장에 한 자라도 더 적어 마이크를 잡고 용균이의 죽음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용균이의 친구들에게 호소했다.

"용균이가 죽기 전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죽음은 조용히 묻혔어요. 그때 조용히 끝났기 때문에 우리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나 같은 사람도 싸웁니다. 저를 보고 '우리도 할 수 있구나,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구나' 이런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무슨 일이 생기면 두려워하지 말고 좀 해냈으면 좋겠어요." <2019년 1월 시사인 인터뷰>

김미숙의 싸움은 사고가 아들이 잘못해서 일어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책임자 처벌을 약속받고 나서야 끝이 났다. 아들이 죽은 지 60일 지나서야 장례가 치러졌다.

3. 여기에서 끝내는 게 정해진 수순이라면 수순이었다. 여기까지 온 것도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김미숙은 여기에서 끝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 사람은 더 싸우기를 원했다.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을 처벌해야 하고 그런 비극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까지가 자신의 일이라는 게 이 사람의 생각이었다.

-김용균재단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는 본인의 생각이었습니까.
"제가 마지막 대책회의 때 제안을 했죠. 김용균재단을 만들고 싶다, 도와달라. 나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이제 거기서 도와주면 만들 수 있을 거 같다"

김용균 어머니, <그사람>용
비슷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대책위를 만들고 사안이 정리되면 흩어지는 행태를 반복하지 말고 김용균 투쟁의 성과를 이어가자는 노동계 내부의 목소리가 김미숙의 주장과 맞아떨어졌다. 재단을 만들자는 생각은 같았지만 그 이후 과정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재단의 이름을 정하는 것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미숙은 재단 명칭에 아들의 이름을 넣고 싶어 했지만 노동계 일부에서는 그럴 경우 이 재단이 자칫 특정인만을 위한 것으로 비치는 것을 걱정했다.

-재단 이름에 아드님 이름을 넣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까.
"예. 저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용균이로 인해서 재단이 만들어진 거고 (이 재단을 통해) 용균이가 잊혀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재단의 대표 자리를 누가 맡을지를 두고도 적지 않은 말이 오갔다. 유족이 맡는 것은 전례가 없지는 않지만 흔한 일은 아니다. 대개 이런 자리는 노동계의 원로나 경험 많은 사람이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김미숙은 재단 이사장 자리를 남에게 미룰 생각도, 양보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 자신의 당연한 권리이자 피할 수 없는 의무라고 생각했다.

-이사장을 직접 맡은 이유는 뭔가요.
"거기서 만장일치로 저를 추대를 한 겁니다. 누구보다도 제가 원했고 그러면서 제가 하겠다고 이야기한 거잖아요."

-재단 이사장이라고 불리는 게 어색하지 않았습니까.
"처음에는 가정주부로서 정말 어색했는데 지금은 많이 듣다 보니 이제는 괜찮아요."

-사양할 생각은 안 하셨습니까.
"아뇨, 사양 절대로 안 하고 싶었습니다."

김용균 어머니, <그사람>용
이사장 자리를 사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 하도 단호해서 묻는 사람이 무안할 지경이었다. 조직의 책임자가 된다는 것은 의욕에 못지않게 능력이 필요한 일이다. 조직의 리더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구성원들을 이끌고 다른 단체의 대표를 만나 자기 조직의 이해를 대변하고 때로는 관철해야 하는 사람이다.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이 사람에게 있느냐는 질문과 의구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김미숙과 1년 반 이상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하고 있는 권미정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조직이 필요로 하는 리더는 우리가 같이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용균재단을 만드는 과정이 지금까지 1년 반이 좀 넘었는데 김미숙 대표가 중심에 없었다면 이 재단이 자리 잡기 쉽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김 대표가 자신의 역할과 중심을 잘 잡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권미정 김용균재단 사무처장>

김용균재단은 원청업체와 하청업체가 후원금 형태로 내놓은 4억 원의 돈을 종잣돈으로 지난 2019년 10월 출범했다. 정기 후원금 3천600만 원을 포함해 지난 4/4분기에 1억 2천만 원의 후원금을 확보했다. 안정적 궤도에 올랐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재단은 틀을 잡아가고 있다.

재단을 만들고 이사장에 취임하는 과정에서 이 사람은 두려움도 주저함도 없었다. 여기에서 주인공은 나라는 생각이 확고했다. 경험도 없고 배운 것도 많지 않은 내가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두려워하지 않았다. 남들이 기대하는 모습이 아니라 자기 주관에 따라 움직였다.

재단을 만들고 이 재단의 책임자가 되면서 김미숙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집도 구미에서 서울로 옮겼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고 과거로 돌아갈 생각도 아예 없다는 강력한 의사 표시였다. 이제는 더 이상 유족이나 비정규직 노동자가 아니라 상근 노동운동가로 살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울 영등포구 재단 사무실에 아침 10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에 퇴근한다. 주택가 골목길 연립주택 2층에 자리잡은 재단 사무실은 20평 남짓 했다. 방 세 개를 개조해 회의실, 사무실 공간으로 쓰는데 소박했다. 이 사람의 한 달 활동비는 190만 원, 이사장이지만 재단의 나머지 상근자 2명과 똑같은 보수를 받는다. 언론 인터뷰에 응하고 자신의 경험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달려간다. 산재 피해자 가족들을 위로하는 것도 이 사람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4. 이쯤에서 멈추지 않을까 싶은 지점에서 이 사람은 오히려 한 발 더 치고 나왔다. 재단을 만들고 이사장이라는 직함을 얻은 것에 그치지 않을까 싶었는데 지난해 말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의 최일선으로 나섰다. 이름만 올리고 투쟁 현장에 몇 번 얼굴 비치는 것으로도 족할 법도 한데 이 사람은 국회 앞 투쟁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자리를 지키는 것에 멈추지 않고 단식 투쟁으로 싸움의 열기와 강도를 끌어올렸다. 이런 일은 누가 권하고 시켜서 될 일이 아니다. 단식도 원칙대로 했다. 29일 동안 물과 소금, 효소만을 먹으면서 버텄다. 김미숙의 이런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지독하다는 말이 나왔다.

"저도 다이어트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으로 굶으면 잘 안되더라구요. 그때 제가 느낀 것은 절박하면 이것도 되는구나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절박하면…"

김태년 원내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지도부를 만나는 모습을 보니 단식하는 사람 치고는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김태년 원내대표한테 다른 건 다 혼자 하면서 이건 왜 야당과 협의하겠다고 하느냐고 소리 질렀잖아요?
"정말 저는 이해가 안 가죠. 이게 진짜 민중을 살리기 위한 가장 큰 사안인데 그걸 협상한다는 게 정말 이해가 안 됐고, 여당만으로도 충분히 통과시킬 수 있는데 결국은 자기들의 당리당략과 재계의 눈치를 보느라 그런 거잖아요."

김용균 씨 어머니 호소에 민주당 '입법 자체는 당론
민주노총 위원장이나 진보 정당 대표가 있어야 될 자리를 이 사람이 차지한 느낌이었다. 이 사람이 없었으면 중대재해처벌법이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란 말까지 나왔다.

"용균이 투쟁을 하면서 사람들이 동조를 해주었고 그런 힘이 있기 때문에 제가 법안 제정 운동의 대표자로 나서게 된 거고, 제 생각이 크게 불순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같이 힘을 모을 수 있었을 겁니다. 다 같이 한 거고 이런 큰일 하는데 누구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이 사람 존재 자체가 힘이다. 스스로 그 자리에 서겠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이 남의 힘에 떠밀려 그 자리에 가는 법이란 없다. 이런 것이 권력의지라면 이 사람의 권력 의지는 차고 넘친다. 본인에게 힘이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국무총리가 찾고 여야 의원들이 쩔쩔매고 청와대 높은 분들이 와서 고개를 조아리고 예전 같으면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았을 기업 사람들이 자신의 말 한마디에 전전긍긍한다. 자신의 말이 방송과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거리와 집회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눈길들이 늘어나고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들으려는 언론이 줄을 선다. 이게 힘이라는 것을 이제는 잘 안다.

"내 말에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조금이라도 불순하고 가식적인 말을 하면 금방 알아 차릴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 하나도 안 섞고 그냥 있는 대로 표현을 해요. 용균이가 요즘 청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공감대가 컸다고 봐요. 제 말에 힘이 생긴 것은 결국 그 때문인 거죠."

그렇지만 이 힘이 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 같지는 않다.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죽은 아들을 돌아올 수 있게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김용균 어머니, <그사람>용
5. 이 사람의 등장과 투쟁은 어디선가에서 본 듯한 모습이다. 1980년대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등이 이 사람의 모습과 겹쳐 보이고,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과 아예 판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자식이 못다 한 일을 내가 하겠다고 나서는 부모들의 모습은 물론 숭고하지만 본질은 슬픔이고 애통이고 비극이다. 그런 비극의 주인공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이 한국 사회가 나아진 증표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김미숙의 존재가 우리 사회가 몇십 년 전으로 돌아가는 퇴행으로 보일 것이다.

무엇이 평범한 삶을 살아온 50대 여성을 불과 2년여 만에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노동운동가로 변신시켰을까. 아들의 죽음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아들 잃은 어머니가 이 사람만은 아니었고 아들 잃었다고 모든 어머니가 이 사람처럼 변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지난 50년 넘는 세월 단 하루도 허투루 산 적이 없다지만 김미숙이라는 이름으로 산 시간, 자기만을 위해 산 시간은 많지 않았다. 큰딸 같은 차녀로 살았고 가장의 역할까지 짊어진 주부, 엄마로 살았다. 밖에 나가면 여공, 사원으로 불리는 존재였다. 화려한 무대에 오른 적도 없고 사람을 손짓 하나로 부려본 적 없고, 돈 걱정 없이 사고 싶은 거 마음대로 산 기억이 많지 않다. 김미숙에게 지워진 것은 늘 짐이었다. 가난한 부모를 도와야 하는 짐, 병든 남편을 대신해 가장의 역할을 하는 짐, 이제는 아들을 대신해 일하다 억울하게 죽는 사람만큼은 없는 세상을 만드는 짐이 이 사람의 어깨에 지워져 있다.

쉰이 넘어서야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일을 찾은 듯하다. 아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일이다. 내가 잘난 부모였다면 우리 아들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평생 지우기 힘들 테지만 애써 이렇게 자신을 스스로 위로한다.

"내가 좀 더 잘난 부모가 되었더라면, 좀 더 재산이 많았더라면 우리 용균이 제대로 교육시켜서 그런 회사 못 들어가게 했을 텐데 하는 자책감은 있지만 그것이 용균이를 죽음으로 가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런 말을 할 때 이 사람은 여전히 '용균이 엄마'다. 거기에서 한 발 더 앞으로 나가는 것은 부담스럽다고 했다. 자신을 비정규직 노동자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그리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고 이소선 여사와 비교하는 것도 기꺼워하지 않았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어머니라는 말을 들을 때 어떤 기분인가요.
"그건 본인들이 그렇게 말하는 거지 제 의사 하고는 상관없는 거잖아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 만큼 할 거예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해서 제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김용균 어머니, <그사람>용
자신이 혹시나 다른 사람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촉수를 날카롭게 세우고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용균이 엄마'로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어떻게든 할 거라는 의지가 강렬했는데 '노동운동가 김미숙'으로 자신이 해야 될 일에 대해서는 아직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그렇지만 김용균재단 이사장을 자임하고 나섰을 때 이 사람이 가야 할 길은 정해진 셈이다. 엄동설한에 목숨을 거는 단식을 불사하며 싸우는 모습은 '용균이 엄마'를 넘어 '노동운동가 김미숙'으로 변신 중이라는 증거였다.

6. 이 사람의 말에는 단박에 핵심을 찌르는 날카로움이 있다. 이런 것은 배움이 많다거나 경험이 풍부하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 만난 이후에 좋은 대통령 만나 다행이고 진심 느껴진다는 말씀 하신 적 있는데, 지금도 그 생각 변함없습니까.
"대통령도 정치인이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보여주기 식으로 언론을 몰고 가는 거 아닌가… 자기네들 이미지 관리만 하고 있는 거예요. 그때는 '대통령이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냥 자기네들 입지만 생각하고 한 거구나…"

웃기면 웃는 거고 슬프면 슬픈 거지 특별히 유가족이라고 해서 어떤 표정을 지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래도 웃음이 적었다. 3시간 이야기하는데 한 번도 파안대소하지 않았다. 활짝 웃는 모습을 기대하면서 농담을 던져도 옅은 미소만 지었다. 많이 웃고 지낸 날은 용균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아직도 자식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가 이 사람 가슴에서 아물지 않았다는 뜻이다. 얼마 전 한 방송에 출연했을 때 평소와는 달리 화장을 곱게 했다. 그 모습에 자기 스스로 어색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가장 편한 사람들이 같은 산재 피해자 유족들이고 올 설 연휴도 이들과 함께 보냈다.

"유족들이 유족들끼리 있을 때 가장 편안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거든요. 그때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내가 웃어도 나를 욕하지 않을 사람들이고 내가 울어도 지겹다고 말하지 않을 사람들이니까요." <권미정 김용균재단 사무처장>

필자의 대학 동기 가운데 군대에서 분신해서 숨진 친구가 있다. 친구의 어머니는 몇 년을 거의 넋을 놓고 지내다가 끝내 차가운 겨울 강물에 몸을 던졌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심정이란 그런 것인가 짐작만 할 뿐이다. 술이나 담배는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술이든 뭐든 그 아픔과 슬픔을 만 분의 일이라도 달랠 수만 있다면 그런 것을 누가 탓할 수 있을까 싶었다.

용균이와의 옛적 사진
"저는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그러는 것으로 회피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고통을 잊고 싶을 때도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절대로 잊고 싶지 않아요. 하나라도 기억을 놓칠까 봐 걱정"이라고 했다. 어미의 정이란 이렇게 모질다.

7. 이 나라를 저주한다는 이 사람 말은 섬뜩했다. 무엇으로도 풀릴 수 없는 깊은 원한을 그 단어로 표현하고 있었다. 가진 사람, 특히 많이 배웠다는 이유 하나로 높은 자리 차지한 사람들이 턱짓 하나로 노동자들을 아랫사람 부리듯 한다고 말할 때 이 사람의 눈에 싸늘한 냉기가 돌았다. 배운 사람에 대한 적의가 강렬했다. 내가 배우지 못해서 고생했고 내 자식이 욕심만큼 공부하지 못해 험한 곳에 취직해야 했고 그 때문에 죽었다는 생각이라도 하는 걸까.

"왜 이렇게 배운 사람들, 가진 사람들은 자기네들만 잘 살게끔 나라를 이렇게 만들어 놨을까. 너희가 공부 안 해서 그렇게 못 사는 거 아니냐. 이렇게 몰고 가는 거 너무 원통해요. 사실 공부는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말고 싶으면 마는 거고. 그렇게 안 해도 노동자로서 먹고살아야 되거든요."

용균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이 나라였고 이 나라에서 공부 좀 잘했다는 이유만으로 높은 자리 차지하고 자기들만 살기 편한 세상 만든 자들이 아들을 죽였고 지금도 아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힘든 노동을 강요한다고 말했다.

-내 아들을 지켜주지 못한 이 사회에 대한 분노가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이 분노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재단도 만들고 아들 같은 피해자를 막기 위한 법안도 만들어지고 있으니 이 사회가 조금씩 나아진다는 생각은 안 합니까?
"조금씩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체험을 통해서 확인하고 느끼고 있는데 제 스스로가 행복하지는 않아요. 행복을 꿈꿀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이 아픔을 매일매일 느끼고 있는 거라서…"

지난 2년 자신의 존재감이 이렇게 크게 느껴진 때는 없었을 것이고, 자신을 중심으로 관계가 만들어지는 경험도 거의 처음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동지로 부르는 새로운 사람들과 만났고 '노동자들의 어머니'라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표현을 얻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기쁨과 행복, 보람을 느낄 법도 하건만 이 사람 표정은 행복한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이 사람과 인터뷰 중에서 가장 마음 아픈 대목은 남편 김해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용균이 아빠는 그때 사고 난 이후로 심근경색 약을 안 먹고 있어요. 본인도 살 이유가 없다고 해서…그때 애 아빠가 얘기한 게 '우리 3명 같은 무덤에 들어가 있으면 제일 행복하겠다' 그랬어요. 지금도 애 아빠는 그런 심정이고."

김용균 어머니, <그사람>용
8. 누구의 어머니가 아니라 김미숙이라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고, 아들의 비극을 입에 올리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 사람에게 아들 이야기를 빼고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앞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중간중간에 누구의 엄마를 넘어 자신의 이름 석 자로 서겠다는 의지와 욕망이 느껴졌다. 이 사람이 김용균재단 대표 김미숙이라고 새겨진 명함을 건넬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김미숙이라는 이름 밑에 조금 작은 글씨로 '대표'라고 새겨진 명함이 이 사람 인생에서 첫 명함이다. 지금까지는 아들의 이름을 앞세운 싸움이었지만 이제부터는 김미숙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싸움이다. 자신도 비정규직 노동자였다는 뒤늦은 깨달음은 이런 싸움에서 얻어진 각성일 것이다. 이야기를 마칠 즈음 언젠가는 이 사람이 김용균이라는 이름도 떼내 버리고 김미숙이란 이름 석 자만으로 이 세상에 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가야 할 길이 멀다.

이제 말하는 것은 두렵지 않은데 글 쓰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고 했다. 같이 일하는 동지들에게 써 달라고 할 법도 한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가끔 대표님 글을 누가 대신 써주는 거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자기 손으로 써야 한다고 생각해서 대신 써드리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대표님이 힘들어 하실 때도 있지만 여전히 본인 글은 본인이 씁니다. 다 쓴 다음에 한 번 읽어봐달라고 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권미정 김용균재단 사무처장>

공부를 잘하지 못했고 책 읽기를 좋아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50살이 넘어서 현대사 책을 읽고 법안을 챙겨보려 한다. 이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닌데 피해 갈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동지'라는 말도 입에 붙었고 좋아하는 단어가 되었다. 이제 노동단체 회의에서 나오는 말들이 편하다. 그래도 회의에서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다.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다고 했다. 자기 이야기를 말할 때는 능숙하게 말을 풀어냈지만 남의 생각을 옮길 때는 종종 말이 엉켰다. 그런 것을 김미숙은 숨기려 들지 않았다.

그림을 그린다는 말은 이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 중에 가장 반가운 이야기였다. 슬픔의 수렁에서 자기 발로 빠져나오려는 의지가 생겼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

"제가 평소에 그림에 관심이 있었어요. 시간이 나면 그림을 좀 배워서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제가 학교 다닐 때 그림 잘 그린다는 소리를 한 번도 듣지는 못했어요.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그리는 것이고,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상관없어요."

이 사람 눈빛이 부드럽고 편하게 빛나지는 않았다. 이것도 많이 나아진 것이라고 하는데 표정은 웃음기 없이 내내 건조했다. 누구에게 고맙다는 표현도 거의 없었다. 이 사람 표정과 태도는 그 사건의 충격에서 완전히 회복된 것이라는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여전히 싸우는 것으로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겠다는 각오가 단단했다. 싸움을 중간에서 그만 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 사람과 만남은 의미가 적지 않았다.

※ 이 인터뷰는 양만희 논설위원과 함께 2대1 대담 형식으로 지난 8일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