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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적군마저 이성 잃은 맛, 나라 지킨 '소시지 수프'

[인-잇] 적군마저 이성 잃은 맛, 나라 지킨 '소시지 수프'

이보영│전 요리사, 현 작가 지망생 (1999년부터 핀란드 거주)

SBS 뉴스

작성 2021.02.19 11:04 수정 2021.02.19 11:10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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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지' 하면 보통 독일을 떠올리지만 핀란드도 만만치 않은 소시지 대량 소비 국가다. 어느 행사에서든 소시지는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다. 호수, 숲, 어디든 함께 한다. 호숫가에서 사우나를 한 후 하이킹을 하다 멋진 경치를 보며 배고픔을 달랠 때, 소시지보다 더 좋은 간식은 없다. 게다가 소시지를 모닥불에 굽는다면 불 내음과 육즙이 그대로 머물러 머스터드 소스만 발라도 고급 레스토랑 음식 부럽지 않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나는 구운 소시지를 만나고 서야 핀란드에서 처음으로 "더 주세요!"를 외칠 수 있었다. 핀란드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시골 마을 한 유지분의 집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는데, 환영의 의미인지 여사님은 갓 구운 소시지부터 먼저 건넸다. 어리둥절하며 한 입 베어 문 소시지는 그야말로 '저세상' 맛이었던 것이다. 게 눈 감추듯 다 먹고 여전히 아쉬워 얼굴에 철판을 깔고 "하나 더" 부탁드렸다. 아시아에서 온 체구 작은 여성이 의외의 식성을 보이자 자못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친절하게도 하나 더 구워 주었다. "소시지는 핀란드 남성의 채소랍니다"라는 재미있는 말과 함께!


이 말은 소시지 등 육류만 좋아하고 채소를 멀리하는 핀란드 남성들의 편식 습관을 풍자한 핀란드의 '국민 유행어'이다. 보통 싱글 남성은 혼자서 채소까지 다 챙겨 먹기 귀찮은 경우가 많은데, 이때 소시지를 '채소'라고 자기 최면을 걸며 먹는지도 모르겠다.

소시지는 호불호 없는 음식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핀란드에서는 아주 어릴 때부터 소시지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한국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젓가락질을 가르쳐주듯, 핀란드 부모는 소시지 굽는 기술을 가르쳐준다. 숲을 걷다 보면 아빠와 어린 아이가 함께 소시지를 굽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 종종 뜻하지 않게 대화를 조금 엿들을 때가 있는데, 어김없이 소시지 잘 굽는 '집안 비기'를 전수 중인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김치 레시피가 집집마다 다르듯, 핀란드의 소시지 굽는 방법도 제각각이지만, 대체로 이런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활활 타고 있는 모닥불 위에 소시지를 그대로 올려놓으면 안 된다. 겉만 타고 속은 하나도 안 익기 때문이다. 이른바 '겉바속촉'(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으로 잘 구우려면 장작이 타서 숯으로 변할 무렵, 꼬챙이에 꽂은 소시지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돌려가며 오랫동안 인내심을 가지고 구워야 한다.

세대를 아우르며 핀란드 식생활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소시지는 핀란드 역사에서도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39년 겨울, 소련이 120만 대군을 이끌고 불시에 핀란드를 침공했다. 겨울에 벌어져 '겨울 전쟁'(핀어: Talvisota)으로 불리는데, 전쟁 초반,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소련 군대에 핀란드군은 속수무책 당하고만 있었다.

그런데 파죽지세였던 소련 군대의 발길이 어느 날 갑자기 멈춰버렸다. 핀란드의 저항 때문도, 본국에서 온 급보 때문도 아니었다. 막 점령한 핀란드 부대 어디에서 맛있는 냄새가 폴폴 났기 때문이다. 냄새의 정체를 뒤지던 소련 병사들이 발견한 것은 막사 부엌 대형 솥에서는 맛있게 끓고 있는 소시지 수프(핀란드어: 마까라 게이또 Makkara Keitto)였다. 붉은 군대 장병들은 한순간에 먹성 좋은 청년이 돼버렸다. 이성을 잃고 미친 듯 소시지 수프를 먹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소련군은 제대로 보급을 받지 못해 며칠째 마른 빵과 차가운 음식으로만 버티며 강행군 중이었다.

반대로 소련군이 무서워 줄행랑했던 핀란드 병사들은 소련군이 공격을 멈추자 이상하게 여기고 다시 막사로 돌아왔다. 혹시나 싶어 살금살금 막사에 재진입한 핀란드 병사와 오랫동안 굶주리다 먹을 것을 발견한 소련 병사가 마주한 것이다. 핀란드 군은 소시지 수프에 혼이 팔린 소련군에 총칼로 역습, 결국 그들을 괴멸시켜버렸다.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소련군은 역습을 당하면서도 소시지를 여전히 입에 가득 넣고 씹고 있었다고 한다. 소시지 수프가 일등공신인 셈이다. 그래서 이 전투 이름도 '소시지 전투(the Sausage War)'로 불린다. 오합지졸로 평가받았던 핀란드군은 이 전투를 통해 자신감을 얻게 됐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중요한 전투에서 패배한 소련은 급격히 수세에 몰리게 됐다. 핀란드가 소련에 합병되지 않고 독립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가 소시지에 있었던 것이다.

이쯤 되니 정말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시장이 반찬이라지만, 소련군의 정신줄을 놓게 만든 소시지 수프의 맛은 과연 어땠기에 목숨과도 바꾸게 되었을까? 힌트를 공개하자면, 우리에게도 조금 익숙한, 종종 핀란드인이 가장 맛있다고 말하는 '한식'과 비슷하다. 바로 부대찌개다. 소시지 수프도 '부대'와 밀접하기 때문일까?

핀란드의 가장 흔한 '집밥'이기도 한 소시지 수프는 만드는 방법도 상당히 쉽다. 라면을 끓이는 것과 같은 난이도이다. 사실, 소시지가 들어갔는데 맛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하나 주의할 점은 되도록 소금을 많이 넣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시지 자체로도 충분히 짜다. 그렇지만 뭐, 조금 짜면 어떤가. 물 좀 더 넣고 또 끓이면 되지!

"라면 먹고 갈래?"라는 말이 조금 진부해 보인다면
"핀란드 소시지 수프 먹고 갈래?"는 어떨까? 아래 레시피를 소개한다.

소시지 수프 (사진=픽사베이)
# '핀란드 소시지 수프' 레시피 (4인분 기준)

재료:
소시지 500g, 당근 1개, 대파 1대, 감자 5개, 셀러리 2대, 양파 1개, 무 200g, 소고기 육수 1.5리터 (소고기 부용 2 큐브 + 물 1.5리터로 대체 가능), 월계수 잎 2개, 통후추 5개, 버터 2큰술, 소금, 후추, 파슬리

만드는 법:
1. 당근, 감자는 씻어서 껍질을 벗긴 후 작은 주사위 모양으로 썬다. 양파도 같은 모양으로 썬다
2. 셀러리는 조금 더 작은 크기 (두께 0.5cm)로 썰어 둔다
3. 대파는 어슷썰기로 준비한다.
4. 무는 얇은 나박썰기로 준비한다.
5. 소시지(껍질이 있는 소시지는 껍질을 벗긴다)는 채소와 같은 크기(혹은 조금 크게)로 먹기 좋게 썰어 놓는다.
6. 모든 채소를 냄비에 넣고 버터에 잠시 볶는다.
7. 육수를 붓고, 통후추와 월계수 잎을 넣은 후 15~20분간 끓인다
8. 적당히 끓으면 소시지를 넣는다.
9. 10~15분 후 소시지가 다 익으면 소금과 후추로 추가 간을 한다. 불에서 내린 후 파슬리(또는 파슬리 가루)를 다져 장식해도 좋다. 파슬리가 없다면 한국식으로 파를 다져 올려도 좋다.

* 핀란드에서는 보통 호밀빵과 함께 먹지만 밥과 같이 먹어도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된다.

요리 쿠킹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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