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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영원한 재야(在野) 백기완의 호통

[취재파일] 영원한 재야(在野) 백기완의 호통

거리에서 한평생 바친 자부심…오늘날 시민사회단체는?

노동규 기자 laborstar@sbs.co.kr

작성 2021.02.16 10:20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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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선생 별세
한국 기자 가운데 고 백기완 선생과 마주한 적 없는 이는 드물 것 같습니다. 한 번씩 거치는 수습 기간과 사회부 시절, 추우나 더우나 도리 없이 가야 하는 각종 거리 시위 현장에 선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자 갈기 같은 머리칼에 굳게 다문 입으로 언제나 행렬 맨 앞에 있는 선생은 단연 눈에 띄었습니다.

기자가 백 선생을 처음 본 것도 한 신문사 대학생 인턴기자를 할 때였습니다. 재개발 보상 관련 불만으로 건물을 점거한 철거민과 경찰의 대치 끝에 7명이 숨진 이른바 '용산 참사' 이튿날이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중앙대학교 용산병원 응급실 앞을 지키며 드나드는 주요 인사를 좇고 이들이 남긴 말을 보고하는 게 일이었습니다.

추운 날씨 속 이런 저런 정치인과 사회단체 인사들이 응급실에 있는 철거민 부상자를 위문한다며 취재진 앞을 오갔습니다. 백 선생도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 선생은 몸이 불편했던지, 아니면 북받치는 슬픔에 힘겨웠던 건지, 철거민단체 관계자의 부축을 받고 있었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훔치며 한겨울에 물대포를 쏜 경찰의 진압 과정을 비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제는 그 짧은 방문과 발언 뒤에 일어났습니다. 선생을 둘러싼 일군의 언론사 수습기자들 중 한 명이 '용감하게' 선생의 이름을 물은 겁니다. '아니, 기자씩이나 하겠다는 사람이 저 사람을 모르나?' 하는 아연함을 느낀 이가 대부분이었고, 더러는 '나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잘 됐다'고 안도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가장 황당했던 건 백 선생이었을 겁니다. 그 역시 이게 무슨 질문인가 싶었는지, 이름 물은 기자에게 "뭐라고?" 되물었던 기억입니다. 해당 수습기자가 다시 또박또박 "성함이 어떻게 되시느냐"는 질문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를 노려보던 백 선생이 별안간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마! 어디 신문 기자야?! 내가 누군지 몰라?!"

선생은 "자네가 손녀딸 같아서 얘기하는 거야. 할아버지가, 자네 요만할 때부터 거리로 나가 독재와 싸워왔어"라고 말을 이었습니다. 해당 수습기자를 데리고 온 선배 기자가 "얘가 오늘 처음이라 잘 몰라서 그렇다"며 사과했고, 백 선생도 "실수할 수 있다"며 수습기자를 다독이고 떠나며 상황은 마무리됐습니다.

황당했던 게 사실입니다. 처음 보는 젊은 사람한테 대뜸 반말로 호통을 치는 명망가의 모습이라니요. 요즘 같았다면 구설에 오를 수도 있는 일이지요. 하지만 동시에 들었던 감정은 묘하게도 어떤 '통쾌함' 같은 것이었습니다. 동종업계 사람의 실수에 낯 뜨거웠지만, 이를 오히려 화끈하게 대거리한 거물의 박력이 좀처럼 잊히질 않습니다. 평생을 약자 편에 서 권력에 맞선 영원한 재야(在野)만이 낼 수 있는 자부심이었습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별세
다소 길게 선생의 일화를 풀어놓은 건 선생이 상징하던 재야의 위신이 우리 사회에서 더는 예전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공직도, 권력도 누리지 않지만 누구보다 뜨겁게 현장을 살피고 입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대신해주는 삶, 그것이 재야라는 생각입니다. 백 선생의 삶처럼, 스스로 존귀한 자들입니다. 권력과 금력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는 올곧은 이런 삶을 시민들도 응원하고 존중했습니다. 그런데 근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재야가 시민사회의 믿음을 배신하는 걸 봐왔던가요.

제국주의 전쟁범죄에 희생된 할머니들을 돕는다며 재야 행세해온 인사는 진실이 드러나고도 부끄러움 없이 국회로 갔습니다. 여성 권리 신장을 위해 싸운다며 재야 행세해온 인사들은 살아 있는 권력 집단의 성범죄 앞에 줄줄이 입을 다뭅니다. 시민단체가 스스로 정부와 한 몸이 돼 청와대와 정부, 산하기관 등에 진출하고도 당당해 합니다. 전국 지자체에 기생하며 각종 보조금 사업을 주무르는 '재야'까지 부지기수입니다.

한때 재야단체로 호명됐던 오늘날 시민사회단체가 이제 이권 단체와 다를 게 뭐냐는 말이 나온 지 오래입니다. 권력과 하나 되거나, 혹은 권력을 대신한 이들이 치는 호통은 백 선생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시민 둘 중 한 명 꼴로 시민단체를 불신한다는 조사까지 있는 게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백 선생 같은 이들이 부딪치고 깨지며 쌓아 올린 시민의 존중과 신뢰를, 후대가 무너뜨리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학창시절 따라다녔던 강연과 문화공연에서 백 선생은 자주 '새뚝이 정신'을 언급했습니다. 맞고 울더라도 언제나 판을 깨고 새 장을 열어내고야 마는 행동가의 표상입니다. "정치가 질곡에 빠지고,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는 법"이라며 선생이 단돈 5천 원, 1만 원짜리 문화공연까지 한 이유였을 겁니다. 새뚝이는 울뚝밸을 못 삭여 우회로를 찾으면 찾았지 권력에 기대진 않았습니다. 민중의 거리에서 이목을 끌고 다만 희망을 얘기했던 영원한 재야, 백기완 선생의 죽음이 '재야의 종언'이 되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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