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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전·현직 청와대 대변인의 '블랙리스트' 정의, 그리고 '화이트리스트'

[취재파일] 전·현직 청와대 대변인의 '블랙리스트' 정의, 그리고 '화이트리스트'
청와대는 지난 10일, 이른바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 사건과 관련해 이례적인 입장문을 냈다.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 사건(논의의 편의를 위해 이하 '환경부 사건')은 '블랙리스트 사건'이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재판부 설명자료에 '블랙리스트'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근거로 들며, 문재인 정부는 前 정권에서 임명된 공공기관 임원들의 임기를 존중해 왔다고도 덧붙였다.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 명의의 입장문이 재판부의 판단과 사실인정에 근거한 것인지는 뒤에서 따져 보도록 하자. 그에 앞서 '블랙리스트'라는 용어에 집중한 입장문의 인상 내지 의도부터 살펴보자. 인상 내지 의도의 측면에서 청와대의 이번 입장문은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 사건'의 데자뷔다.

2017년 3월, 이탄희 전 판사(현 더불어민주당 의원)가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만 간다는 법원행정처 발령 불과 며칠 후 사의를 표명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위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이 일었다. 법원행정처가 판사들의 소속 학회나 성향 등을 담은 문건, 소위 뒷조사 문건을 작성해 왔다는 의혹이었다. 뒷조사 문건이 있다는 소문 때문에 해당 의혹에는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의혹의 핵심은 양승태 사법부의 법관 독립성 침해 여부였다.

경향신문 보도 이후, 사법부는 자체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조사에 들어갔다. 한 달여간 조사 후, 조사위원회는 특정 학회 견제를 위한 계획 문건은 있었지만, '판사 블랙리스트' 문건은 없었다고 밝혔다. 이때부터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판사 블랙리스트는 없다'는 식의 주장이 대대적으로 제기됐다. 추가 조사를 거쳐 판사 성향 등을 적은 문건이 확인됐지만, '판사 블랙리스트는 없다. 때문에 판사 블랙리스트 사건은 실체가 없다'는 식의 주장은 계속됐다.

이런 주장은 '판사 블랙리스트'라는 이름을 해당 의혹에 편의적으로 붙였던 것과 같이 '판사 블랙리스트'라는 개념 규정을 자의적으로 바꿔가며 내린 편의적 해석이었다. '블랙리스트'라는 용어에 집중해 '판사 블랙리스트는 없다'는 식의 주장을 줄기차게 이어간 건, 의혹을 문건 존재 여부로 축소시켜 '사법부에 의한 법관 독립성 침해 여부'라는 본질을 덮기 위한 시도였다.
(참고 : [취재파일] '판사 블랙리스트', 그리고 그보다 더한 것도 있었다)

이런 시도가 '촛불정부'를 자임하는 문재인 정부, 그것도 청와대에서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보수 일각에서 사용한 방법론을 문재인 정부가 차용 할 것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환경부 사건'의 본질은 전 정부에서 임명한 사람을 찍어내고, 현 정권이 원하는 사람을 내리꽂기 위한 시도가 있었느냐에 있다. 재판부 설명자료에 '블랙리스트'라는 용어가 없으니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이 아니라는 식의 청와대 입장문은 '판사 블랙리스트'라는 제목의 문건이 없으니 '판사 블랙리스트 사건은 허구'라고 했던 보수 일각 주장과의 씁쓸한 데자뷔다.

강민석 대변인 (사진=연합뉴스)

● 전·현직 청와대 대변인의 '블랙리스트' 정의

'블랙리스트'라는 용어에 대한 집착은 사안의 본질을 흐리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기왕 청와대가 '블랙리스트'에 대한 개념 규정을 했으니, 재판부의 판결 내용에 근거해 '환경부 사건'이 '블랙리스트 사건' 개념 규정을 충족하는지 한번 살펴보자.

'블랙리스트'에 대한 개념 규정은 지난 10일을 포함해 이번 정부 청와대에서 적어도 2번이 있었다. 우선 지난 10일,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블랙리스트 사건'을 '1) 특정 사안에 불이익을 주기 위해 작성한 지원 배제 명단의 존재 여부, 그리고 그에 뒤따르는 2)'감시나 사찰 여부'로 정의했다. 이를 '강민석 정의'라고 부르자.

또 한 번의 개념 규정은 2019년 2월에 있었다. 당시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서면브리핑을 통해 과거 정부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법원 판결을 통해 정의한 블랙리스트의 개념은 '1)지원을 배제하기 위해 2)계획을 세우고 3)정부조직을 동원해 4)치밀하게 실행에 옮길 것'이라며, 환경부 사건이 '네 가지 조항 가운데 어디에 해당하는지 엄밀하게 따져주시기 바란다'고 밝혔다. 이를 '김의겸 정의'라고 부르자.

'감시나 사찰 여부'를 포함했다는 점에서 '강민석 정의'가 '김의겸 정의'보다 충족 요건이 좀 더 까다롭다고 볼 수 있다. 까다로운 '강민석 정의'를 '환경부 사건'에 대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제25-1부(이하 재판부) 판결 내용은 얼마나 충족시킬지 우선 살펴보자.

● '환경부 사건'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과 사실인정

이하는 '환경부 사건'에 대한 재판부의 대표적인 판단 및 사실인정이다. (판결문 표현을 토대로 하되 일부 표현은 이해를 돕기 위해 수정했다)

①'정 모 환경부 운영지원과장은 김은경 장관에게 새 정부가 출범했으니 산하 공공기관 임원들에게 재신임 여부를 물어야겠다는 말을 듣고, 산하 공공기관 임원 중 연내 교체가 필요한 30명을 선정해 2017.7.9. 김은경 장관에게 보고했다'

②'환경부 운영지원과는 청와대 기후환경비서관실의 요청을 받아 산하 공공기관 임원들의 약력, 임기, 보수 등과 함께 각 임원들의 세평을 기재한 문서를 작성해 2017.7.17. 송부했다'

③'정 모 환경부 운영지원과장은 산하 공공기관 임원 교체 계획을 수립하라는 김은경 장관의 지시를 받고, 산하 공공기관 임원들에게 일괄적으로 사직서를 요구한 후 즉시/연내/2018년 이후 교체대상자로 분류해 임원들을 교체하는 방안을 수립하고, 2017.7.18. 김은경 장관에게 보고했다'

④'환경부 감사담당관이 김은경 장관을 만나고 온 뒤 서기관에게 작성을 지시해, 해당 서기관이 작성한 2018.2.20. 작성한 문건('조치계획 문건')에는 한국환경공단 강 모 이사와 김 모 감사가 사표제출을 거부하고 있고, 김 모 감사는 사표제출을 요구받은 뒤 자유한국당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현 정부와 환경부를 비판하고 공단 내부 정부를 제공하고 있으며, 강 모 이사의 경우 비연임 통보를 하고, 김 모 감사의 경우 비위조사 후 조치한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다'

⑤'김은경 장관은 사표제출을 거부한다는 이유만으로 사표를 받아낼 목적으로 환경부 감사담당관에게 김 모 한국환경공단 상임감사에 대한 감시를 지시했고, 그 지시를 받은 환경부 감사관실 직원이 김 모 감사의 업무추진비 내역을 조사하면서 사표를 제출하지 않으면 형사고발이나 다른 직원들에게 해가 미칠 수 있다는 식으로 협박하여, 김 모 감사로부터 사표를 받아냈다'


①,②,③,④ 등의 문건에는 '산하기관 임원 교체 후보', '조치 계획' '산하기관 교체대상', '산하기관임원교체계획' 등의 제목이 붙었다. 이외에도 날짜와 버전, 대상을 달리하는 다수의 산하기관 임원 교체 후보 및 교체계획 문건 등도 재판에서 증거로 채택됐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 재판부 판결 내용과 '블랙리스트' 정의 충족 여부

우선 위에서 ①,③,④는 前 정부에서 임명된 특정인에게 사표를 받기 위해 명단을 정리한 문건이 있었다는 것으로 '특정 사안에 불이익을 주기 위한 지원 배제 명단의 존재 여부'라는 '강민석 정의' 첫 번째 요건을 충족한다.

②에 나오는 세평이나 ④에 나오는 김 모 감사에 대한 동향은 특정인에 대한 감시나 사찰이 있었음을 추론하게 하는 것으로 두 번째 요건도 충족한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⑤에 등장한 표적감사 지시 및 이행, 그리고 위협은 '감시나 사찰' 보다 더 악질적이다. 이런 점을 볼 때 '환경부 사건'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은 강민석 대변인이 규정한 '블랙리스트 사건'에 부합하는 것으로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명명해도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김의겸 정의'에 따를 때, '환경부 사건'을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부를 수 있다는 점은 더욱 명확하다. ① 등에 등장하는 문건은 전 정부에서 임명된 사람들을 교체하기 위한다는 점에서 '지원 배제'라는 목적을 충족하고, ③에서와 같은 문건들은 전 정부에서 임명된 공공기관 임원들에게 사표를 받기 위한 '계획'이 세워졌음을 입증한다.

이외 판결문에는 환경부 공무원들 또는 환경부 운영지원과(정부 조직)가 사표를 받아 내기 위해 대상 공공기관 임원 등을 직접 찾아가 사표 제출을 요구하거나 대상자가 소속된 기관의 인사담당자나 해당 기관 담당 환경부 공무원 등에게 사표 제출 요구를 부탁해 결국 사표를 받은 사실이 소상하게 적시 되어 있다. 이런 재판부 판결 내용은 '김의겸 정의'를 넉넉하게 충족시키는 것으로 '환경부 사건'을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라고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다.

● '환경부 사건'은 '블랙리스트 사건'이면서 '화이트리스트 사건'

재판부 판결문에 따르면, '환경부 사건'은 치밀하게 실행된 '화이트리스트 사건'이기도 하다. '화이트리스트 사건'은 특정인 혹은 특정단체에 이익을 주기 위해 일련의 준비나 실행이 이뤄진 사건으로 정의할 수 있다. 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 20여 곳에 수십억 원을 지원하도록 전국경제인합회를 압박한 혐의로 징역 1년 형이 확정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사건이 대표적이다.

위와 같이 '화이트리스트 사건'을 정의할 때, '환경부 사건' 은 '화이트리스트 사건'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아니, 기존 화이트리스트 사건을 뛰어넘는다.

'환경부 사건' 판결문에 따르면, 청와대가 내정 또는 승인한 사람에 대한 공공기관 임원 내리꽂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진행됐다.
 
'청와대 인사수석실 관계자, 공모 절차 시작 전 환경부에 특정 공공기관 임원 내정자(혹은 승인자) 전달' → '환경부 공무원, 내정자에게 서류 준비를 위한 (비)공개 참고 자료를 전달'→ '환경부 인사담당 공무원, 당연직으로 공공기관 임원추천위원으로 들어가는 환경부 공무원에게 내정자 통보 및 지원 지시(요청)' → '임원추천위원 참석 환경부 공무원, 내정자에 월등히 높은 점수 주고 좋은 평가받도록 임원추천위 분위기 유도'→'청와대 내정자(승인자), 정해진 자리 임명'

때로는 환경부 공무원이 청와대 내정자의 자격 요건을 보완해 주거나, 자기소개서와 직무수행계획서를 대필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면접예상문제를 미리 전달하기도 했는데, 특정 내정자에게 전달한 면접심사 질문지 총 29개 중 27개가 실제로 임원추천위원회 위원들에게 제공된 면접심사 질문지 38개에 포함된 경우도 있었다. 환경부 공무원들이 청와대 내정자를 위한 컨설팅을 넘어 시험 문제 사전 유출까지 한 셈이다.

청와대 내정자가 서류심사에서 탈락하자 다른 응시자들이 참여한 면접심사에서 '적격자 없음'으로 임원 공모를 무산시킨 일도 있었다. 그리고 서류심사에서 탈락한 청와대 내정자를 위해 다른 공공기관 임원 자리를 물색해 결국 내정자가 원하는 자리에 임명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행위를 재판부는 2백 여 페이지가 넘는 판결문에 상세히 적고 있다.

신미숙 전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

● 청와대 지시 또는 요청에 따른 내정자 지원

김기춘 前 청와대 비서실장 사건 때와 같이 '환경부 사건'도 청와대의 지시나 요청에 따라 진행됐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김 모 환경부 운영지원과장은 "청와대 인사균형비서관실 행정관이 '후보자가 정해지면 그 후보자가 최종 합격할 수 있도록 사전 서류지원, 임원추천위원회 구성 및 임원추천위원에 위원으로 들어가는 환경부 실·국장에게 말을 잘 해서 추천 후보자가 떨어지지 않게 하는 등 임명까지 잘 지원해 달라'고 구체적인 요구를 했다"고 진술했다. "특정 내정자가 (서류심사에서) 탈락한 이후, 신미숙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은 환경부 운영지원과에서 임원추천위원회 위원들을 접촉하지 않은 것을 질책했다"고도 진술했다.

재판부는 이런 진술과 증거 등을 토대로 신미숙 전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의 직권남용권리행사 방해 등 혐의를 인정해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그러면서 "청와대 비서관이라는 지위에 비추어 내정자를 확정하고, 그에 대한 지원결정을 하는 것은 피고인(신미숙)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는 없는 점"을 참작해 형량을 결정했다고 재판부는 판결문에 적었다. 신미숙 전 청와대 인사균형비서관의 윗선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다.

특정 내정자 지원을 위한 일련의 행위만으로도 '환경부 사건'은 '화이트리스트 사건' 개념에 부합함은 모자람이 없다. 그런데 '환경부 사건'에는 더한 것도 있었다. 청와대 내정자가 서류심사에서 떨어진 것의 책임을 물어 관련 해당 공공기관 임원추천위원으로 들어갔던 환경부 공무원을 좌천시킨 것이다. ' 특정인사 지원'을 위해, '계획을 세우고', '환경부 공무원들(정부 조직)을 동원해', '자소서 대필과 예상문제 유출 등 치밀하게 실행에 옮긴 것'에 더해 '목적 달성 실패의 책임을 묻는 것'까지 이뤄졌다는 점에서 '환경부 사건'은 기존 '화이리스트 사건'을 넘어선다.

●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였을까.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 이유를 재판부는 판결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임원추천위원회는 공공기관 임원을 추천하는 경우 공모절차를 거쳐 후보자를 추천하는 이외에도, 공모 없이 위원회 의결만으로도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다. (공공기관운영법 제30조) 따라서 임원추천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석하는 환경부 실·국장들은 청와대와 환경부가 내정한 후보자를 추천해 줄 것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청와대와 환경부는 소위 '낙하산'논란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임원추천위원회 위원들에게 내정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숨긴 채 형식적인 공모절차를 거쳐 내정자를 예정된 직위에 임명했다"

재판부는 이렇게 형식적인 공모절차와  '적정성·공정성을 상실한 임원추천위원회로부터 추천'돼 공공기관 임원으로 임명된 사람이 15명, 청와대 공직 검증에서 탈락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17명으로 판단했다. 이 과정에서 들러리 세워진 임원추천위원회 위원은 80여 명, 형식적 공모절차 지원자는 130여 명에 달한다.

결과적으로 들러리 세워진 임원추천위 위원들은 내정자가 사전에 있고, 내정자에 대한 은밀한 지원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을 것"이라거나 "내정자를 탈락시켰을 것", "해당 공공기관 노조위원장에게 그 사실을 알렸을 것"이라고 진술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한 문재인 정부 였지만, '기회는 특정인에만 부여됐고, 과정은 특혜와 불법 지원의 연속이었으며, 결과는 지극히 부정의 했다'는 것이 '환경부 사건'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이다.

청와대 전경

● 물갈이 위한 사표 요구였다는데 "임기 존중했다"는 청와대

'환경부 사건'은 "'블랙리스트 사건'이 아니다"거나 "문재인 정부에 '블랙리스트'는 존재하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밝힌다"며 서면 입장문을 낸 청와대 사정을 완전히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블랙리스트'라는 뭔가 음험해 보이는 이미지가 촛불정부에 덧씌워지는 걸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블랙리스트'를 비판해 왔던 문재인 정부 아니었던가. 더구나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보궐선거도 앞두고 있다.  과거 정부의 '블랙리스트 사건'과는 사안의 성격과 규모 면에서 차이가 있다는 점도 일견 수긍할 측면은 있다.

하지만, 사건의 네이밍 보다 본질이 중요하다는 점, 그리고 재판부의 판결 내용에 근거할 때 "이번 사건('환경부 사건')은 블랙리스트 사건이 아니다"라고 청와대가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자신에 찬 대응은 판결 내용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의구심을 자아낼 뿐이다. 재판부 설명자료 어디에도 '블랙리스트'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으니 '블랙리스트 사건이 아니다'는 대목에서는 숨겨진 의도성이 있다고 의심해야 할지, 판결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냈다고 한숨을 내 쉬어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 정도다.

더더욱 이해하기 힘든 건, "문재인 정부는 前 정부에서 임명한 공공기관장 등의 임기를 존중했다"는 대목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산하 공공기관 임원들에게 사표를 요구한 건 "단지 前 정권에서 선임된 임원들을 소위 '물갈이'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청와대 입장문은 판결 내용을 의도적으로 오독하지 않았다면 나오기 힘든 내용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자신감은 지식보다 무지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찰스 다윈의 말에서 찾아야 할지 고민스러울 정도다.

청와대는 "이번 사건에서 사표를 제출했다는 환경부 산하 공공기관 임원 13명 역시 상당수 임기를 끝까지 마쳤다"며, 재판부가 해당 사항을 양형 결정 때 고려한 부분을 인용하기도 했다. 이건 마치 마라톤 결승점을 앞두고 앞서 가던 사람을 넘어뜨리려고 밀었는데, 그 사람이 오히려 탄력을 받아 1위로 결승점을 통과한 걸 두고 내가 앞서 가던 사람을 도왔다고 주장하는 꼴이다. 미수에 그쳤다고 고의가 사라지는 건 아니며, 이번 판결에서 청와대가 인용한 부분은  유·무죄 판단 때가 아닌 유죄 판단 후 형량 결정 때 고려한 부분이기도 하다. 

사표를 받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임기를 마친 건 후속 절차 등이 이뤄지지 못해 발생한 의도치 않은 결과일 뿐이다. 임기 보장을 의도했다면, 사표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환경부는 산하 공공기관 임원들에 대한 일괄 사표 징구(내 놓으라고 요구함) 계획을 수립했지만,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실에서 인사검증이 몰려 산하 공공기관 임원들에 대한 인사가 어렵다고 하여 2017.12 이전까지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다"고 적고 있기도 하다. 결국, 청와대의 입장문은 판결 내용을 의도적으로 오독한 결과로 보인다.

● '적폐 정부'와 점점 닮아가는 듯한 문재인 정부

재작년 2월, 김은경 전 장관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김의겸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 검찰수사를 계기로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는 현재 운영되고 있는 공공기관의 장과 임원에 대한 임명 절차를 보다 투명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나가겠다'는 입장문을 냈다. 비록 아직 확정되지 않은 1심 결과지만, 공공기관 임원 채용의 불공정성을 법원에서 한번 평가한 만큼, 이번 청와대의 입장문은 '공공기관 임원 임명 절차 개선'으로 채워졌어야 한다.

'이번 사건은 블랙리스트 사건이 아니다' 라는 본질을 흐리는 듯한 입장이나, '문재인 정부는 전 정부에서 임명된 공공기관 임원들의 임기를 존중했다'는 식의 생뚱맞은 입장을 낼 것이 아니었다. 청와대가 '이번 사건을 블랙리스트 사건이 아니다'는 논거로 판결 내용이나 표현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재판부는 "이 사건과 같이 계획적이고 대대적인 사표 징구 관행은 찾아볼 수 없다"고 판시하고 있다.

청와대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공공기관 임원 사표 받아내기와 정권 사람 심기는 오래된 관행이었고, '환경부 사건'은 검찰 수사로 드러났을 뿐 이전 정부에서는 더 한 일도 있었을 것이라며 억울해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관행화 된 불법행위를 단죄해야 한다는 게 촛불정신이었고, 그 촛불정신으로 태어났다고 자임하는 게 문재인 정부다. 여권 일각에서 실제로 "억울한 면이 있다"는 반응들이 나오고 있다는데, 억울함 토로 전에 관행화 된 불법행위를 답습한 것에 대한 반성이 선행됐어야 한다.

언젠가부터 문재인 정부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와 곳곳에서 닮아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비교의 준거를 스스로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두는 경우도 잦아지고 있다. '환경부 사건'은 사건 내용 측면에서나 판결에 대한 반응 등의 측면에서 이런 경향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 건설을 출범 일성으로 내걸었고,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적폐로 규정했던 정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안타까운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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