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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17년 성폭행과 노동착취, 이게 '품앗이'입니까?

[인-잇] 17년 성폭행과 노동착취, 이게 '품앗이'입니까?

최정규 | '상식에 맞지 않는 법'과 싸우는 변호사 겸 활동가

SBS 뉴스

작성 2021.02.02 11:01 수정 2021.02.02 22:25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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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저 농로도 지난 여름에야 동네 사람들이 울력을 해서 낸 거란다.
<출처 : 서정인, 벌판>

아내 분통이도 아기의 두이레가 지나자 모 품앗이를 다녔다.
<출처 : 김정한, 축생도>


일손이 모자라 서로 돕고 협력하는 것을 의미하는 '울력' '품앗이'라는 단어는 과거 농촌을 배경으로 한 단편소설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서로 돕고 협력하는 것보다 각자 스스로 제 살길을 찾아가는 것이 더 익숙해져 버린 현대사회에서 이 단어는 우리의 기억 한 편에 자리 잡고 있는 푸근하고 따뜻한 마음을 떠올리며 미소 짓게 한다. 그런데 최근 이 단어가 어울리지 않은 곳에서 잇따라 튀어나와 우리의 얼굴을 찌푸리게 한다.

● 울력, 장애인 학대 가해자에 대한 면죄부?

2019년 여름, 50대 지적장애인이 서울 노원구에 있는 사찰에서 무려 32년 동안 청소, 잡일 등 노동력 착취를 당했고, 누구보다 앞장서 장애인을 보호했어야 할 주지스님이 지적장애인을 상습적으로 폭행하고 명의까지 도용하여 시세 차익을 노린 부동산 투기를 한 정황이 포착되었다. 2014년 신안군 염전 노예사건 이후 계속 발견되는 장애인 노동력 착취사건에 대해 발견 장소에 따라 '축사 노예사건', '타이어 노예사건' 등의 이름을 붙인 시민들은 종교기관인 '사찰'에서 일어난 이 사건에 대해 '사찰 노예사건'이라고 명명하며 분노했다.

수사기관은 2018년 피해 장애인의 피해 사실을 확인하고도 가해자의 12건의 폭행에 대해서만 기소했다. 32년간의 인권 침해가 단지 벌금 500만 원의 솜방망이 처벌로 덮어질 뻔했다는 것은 학대행위자의 행위만큼 우리를 분노하게 한다. 이후 시민단체는 전면적 재수사를 요청했지만 2020년 2월 관할 경찰서인 노원경찰서는 노동력 착취에 대해서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결정을 재차 내렸다.

그 결정에 대해 담당 수사관은 이런 말을 남겼다.

"피해자는 노동력 착취라고 주장하지만 절에서는 집안일을 하는 것처럼 스님들이 힘을 합쳐 잡일을 하는 '울력'이라는 문화가 있기에 처벌할 수 없다"

다행히 서울북부지방검찰청은 2020년 8월 경찰의 불기소 의견을 뒤집고 주지스님의 노동력 착취 혐의에 대해서 장애인 차별금지법으로 기소하여 정식 재판에 넘겼다. 그러나 최초 수사기관에서 다른 혐의는 덮어주고 폭행죄로만 기소한 사실, 전면적 재수사 요청에도 '울력'이라는 학대 행위자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사실은 우리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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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성폭력 학대 폭행 감금 구금 고립 우울 불안 무기력 (사진=픽사베이)
● 품앗이, 성폭행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돕고 협력하는 사이?

17년 동안 지적장애인이 이웃 주민으로부터 성폭력과 노동력 착취까지 당한 사건도 2019년 세상에 알려져 공분을 샀다. 시민들은 가해자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엄격한 처벌을 수사기관에 요청했지만 수사기관은 가해자의 성폭력 혐의에 대해서만 재판에 넘겼고, 노동력 착취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 가해자에 면죄부를 주었다.

"품앗이 개념으로 가내 농사일을 도와준 것에 불과하다"

가해자는 모든 혐의를 부정했지만, 피해 여성 장애인이 지적장애가 심하고 경제적, 심리적으로 가해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성폭력 혐의에 대해 재판에 넘겨진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력 착취도 당연히 처벌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사건을 수사한 수사기관은 성폭력 혐의와는 달리 노동력 착취에 대해서는 가해자의 '품앗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돕고 협력하는 품앗이로 농사일을 했다'는 아주 기괴한 결정이 탄생했다. 그런데도 이런 기괴한 결정이 대검찰청까지 이르는 불복 절차에서도 바로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를 소름 끼치게 한다.

● 국가가 배상 책임지고도 달라지지 않는 수사기관…울력과 품앗이 프로젝트

2014년 신안군 염전 노예사건에서 시민들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수십 명의 지적장애인들이 10년 이상 노동력 착취를 당했는데, 경찰, 근로감독관, 사회복지 공무원은 어떻게 몰랐단 말인가?"

그 질문으로 시작한 국가배상소송에서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학대 현장에서 가까스로 탈출하여 구조를 요청한 장애인을 다시 학대 가해자에게 돌려보낸 경찰공무원, 피해 장애인을 학대 가해자 옆에 앉혀두고 피해 사실을 진술하게 하여 2차 피해를 입게 한 노동청 근로감독관, 노동력 착취가 확인 되었지만 단순히 임금 체불사건으로 가해자를 벌금형 처벌로 넘긴 검사, 지역주민들의 신고로 현장에 나와 피해 장애인을 확인하고 장애인 등록을 시켰지만 그대로 학대 현장에 방치시킨 사회복지공무원 등 제대로 작동되지 않은 국가시스템의 행태가 낱낱이 밝혀졌다.

그러나 수사기관은 국가 배상 소송에서 패소 이후 피해 장애인에 대한 그 어떤 사과도 없었고, 아무런 재발 방지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오히려 '울력과 품앗이'라는 가해자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 어렵게 받아 낸 국가 배상 승소 판결문의 의미가 퇴색되어 가는 걸 보다 못한 국가 배상 소송 소송대리인단이 2020년 4월 다시 뭉쳤다.

● '울력과 품앗이 프로젝트'…기존 수사기관의 개선을 넘어 새로운 수사구조를 꿈꾼다.

2월 2일, 공익변호사 13명과 장애인권 활동가 2명이 8개월 동안 장애인 노동력 착취사건 10개를 심층분석하여 확인한 문제점과 대안으로 마련한 개선 방안을 발표하는 보고회가 국회, 대한변호사협회, 시민단체 공동주최로 진행됐다. 이번 프로젝트 결과에 대해 검찰청, 경찰청, 노동청 등 관련 사건의 수사를 진행하는 수사기관은 엄중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최근 정인이 사건을 통해 폭로된 아동 학대에 대해 기존 수사기관이 보여준 태도 또한 실망스럽다. 기존 수사기관의 잘못된 관행의 개선을 넘어서 아동,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새로운 수사기관의 탄생을 상상해보는 건 어떨까? 시민들의 삶과 직접적인 관련 없는 고위공직자 범죄 수사와 기소를 전담하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신설되었다면, 아동,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학대 범죄를 전문적으로 수사할 수사처 설립도 추진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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