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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자존심 접은 '데이코쿠 호텔'…코로나 비상 일본 특급호텔의 '고육지책'

[월드리포트] 자존심 접은 '데이코쿠 호텔'…코로나 비상 일본 특급호텔의 '고육지책'

유성재 기자 venia@sbs.co.kr

작성 2021.02.01 15:55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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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호텔은 도쿄 지요다(千代田)구에 있는 '데이코쿠(帝國, Imperial) 호텔'입니다. 일왕의 거처인 '고쿄' 남쪽 히비야(日比谷) 공원의 길 건너편에 있는 데이코쿠 호텔은 지난해 창립 130주년을 맞이한 일본 최초의 근대식 호텔로, 오랜 역사에 걸맞게 외국의 유명 인사들이 일본을 방문하면 대개 이곳을 숙소로 선택해 왔습니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망 전에는 미국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 프랑스의 유명 작가 장 콕토,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 등이 숙박했고, 전쟁 후에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과 비틀즈도 투숙객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도쿄 밖의 일본인들에게는 데이코쿠 호텔에 여장을 풀고 바로 옆 데이코쿠 극장에서 공연을 본 뒤 긴자(銀座)에서 럭셔리 쇼핑을 즐기는 것이 일종의 '로망'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건물 자체는 증축, 이전 등으로 부침을 겪었지만 데이코쿠라는 이름과 특유의 꼼꼼한 서비스는 그 자체로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잡아 여전히 명성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일본 최고의 호텔이라는 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이 데이코쿠 호텔이 오늘(1일) 코로나19로 인해 지금까지 전례가 없었던 형태의 영업을 시작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본관 옆 타워 건물의 객실 99개를 보수한 뒤 이를 '서비스 포함 아파트(Serviced Apartment)', 즉 레지던스 형태로 판매하겠다는 겁니다.

레지던스형 서비스를 소개하는 데이코쿠 호텔 홈페이지
데이코쿠 호텔 홈페이지에는 '풍요로운 녹음을 바라보며, 긴자와도 가까운 히비야의 땅에서 새로운 생활의 가치를 체험하지 않겠습니까'라는 광고 문구가 올라와 있습니다. 레지던스는 데이코쿠 호텔의 전속 직원이 담당자로 배치되고, 호텔 주차장이 무료로 제공됩니다. 숙박객은 호텔의 피트니스 센터와 수영장, 사우나, 그리고 회의실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객실 타입은 세 가지입니다. 31제곱미터 넓이의 스튜디오형 객실과 객실 두 개가 연결된 커넥팅 스튜디오, 50 제곱미터 넓이의 프리미어 스튜디오입니다. 최소 숙박일수는 5박 6일부터인데, 가장 작은 스튜디오형 객실의 경우 5박 6일은 15만 엔(약 160만 원)을 받고, 30일은 36만 엔( 약 380만 원)을 받습니다. 단독 객실로는 가장 큰 프리미어 스튜디오는 5박에 25만 엔(270만 원), 한 달에 60만 엔(630만 원)으로 책정돼 있습니다.

'스튜디오' 객실 구조와 이용 요금
도쿄를 방문하는 전 세계 부자들의 '1번' 숙소였던 데이코쿠 호텔이 이른바 '품격 떨어지는' 레지던스 영업을 시작하는 건 코로나 사태로 경영 상태가 급격히 악화됐기 때문입니다. 데이코쿠 호텔은 코로나 감염이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확산한 지난해 4월부터 12월까지 86억 엔(약 900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2019년 같은 기간에 30억 엔의 흑자를 냈던 것에 비하면 코로나로 인한 타격을 정면으로 받은 셈입니다. 매출액도 2019년 같은 기간 대비 62%나 줄어든 166억 엔으로 쪼그라들었고, 지금까지 객실 가동률이 10%대를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호텔 방 10개 가운데 1개만 손님을 받고 있다는 얘깁니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데이코쿠 호텔 측이 원격근무를 하는 기업 CEO 등의 비즈니스 수요와, 지방 부유층의 도심 거주 수요를 흡수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말은 그럴듯해도, 살아남기 위해 자존심을 던져버리고, 팔을 걷어붙였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이런 움직임은 또 있습니다. 역시 일본을 대표하는 고속철도 신칸센(新幹線)이 오늘(1일)부터 도호쿠(東北) 노선에서 '신칸센 오피스'를 시험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속철도 객차 1개 내부에 화상회의나 통화가 가능한 시설을 설치해 운영하면서, 실제 비즈니스 수요가 얼마나 되는지를 파악하는 실험입니다.

사진 : NHK 뉴스 홈페이지 캡처, '신칸센 오피스' 실증실험, 1일부터 시작… 도호쿠 노선에 전용차량
저도 도쿄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여러 차례 신칸센을 타고 오사카(大阪)나 교토(京都) 등에 출장을 다녀온 경험이 있습니다만, 일본인들은 전화가 오면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객실 밖으로 나가 서 통화를 하는 게 일종의 '매너'로 인식돼 있어서 객실 안은 적막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코로나로 원격 근무를 하는 사람이 신칸센으로 이동을 할 경우 새로 만들어진 '사무실용 객실'을 이용하면 그 안에서는 전화 통화도 가능하고, 차내의 와이파이를 이용해 화상 회의도 가능하게 하겠다는 게 이번 시험 운영의 내용입니다. 사무실 전용 객실로 예약을 하면 철도 요금 외에 별도의 추가요금은 받지 않고, 객실 안에서 쓸 수 있는 와이파이 중계기도 무료로 제공한다고 합니다. 화상 회의나 전화 통화를 할 때 옆자리 승객에게 말소리가 들릴 수도 있는데, 이건 차내에 적당한 소리를 흐르게 해 정보 유출을 막는다고 합니다.

도호쿠 신칸센을 운영하는 JR동일본 역시 코로나의 영향으로 작년 12월의 경우 신칸센 이용자 수가 지난해 12월 대비 40%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출장 같은 장거리 이동 자체가 줄어든 데다가, 어쩔 수 없이 열차를 이용하는 '귀한 손님'들도 객실 안에서 침묵을 지켜야 하는 상황을 보다 못한 회사 측이 고심 끝에 짜낸 고육책인 셈입니다.

일본에는 2월 1일 현재 도쿄와 오사카 등 11개 광역 지방자치단체에 코로나 긴급사태가 발령돼 있습니다. 지난달 8일 도쿄 등 수도권 4개 지자체, 13일에 오사카 등 7개 지자체로 확대 발령됐던 긴급사태는 오는 8일까지로 일단 예고돼 있지만, 니혼게이자이와 TV도쿄의 공동여론조사(1월 29일~31일, 전화 방식으로 1,014명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0%가 긴급사태를 연장해야 한다고 답변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오늘(1일) 전문가 의견 취합을 거쳐 내일쯤 긴급사태의 해제 시점을 당초 예정보다 한 달 더 연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발령 지역도 도쿄 북부의 도치기현 정도만 빠지고 그대로 유지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되면 기업들의 원격 근무, 출퇴근 자제도 당분간은 계속 유지될 것이 거의 확실해 주요 서비스 기업들의 '코로나 경영난'도 쉽사리 해소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전통의 데이코쿠 호텔도, 신칸센도 앞다투어 새로운 서비스를 도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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