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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대장님, 솔직히 꼰대인 줄 알았어요!

시골소방관 심바씨 | 마음은 UN, 현실은 집나간 가축 포획 전문 구조대원

요즘 출근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다. 우선 "아, 오늘 야식 뭐 먹지?"이다. 겨울이 되면 혹한의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지구 생명체들은 평소보다 많은 에너지를 몸에 저장한다. 사무실 온풍기가 영 시원치 않아서 그런지 우리도 야식 먹는 횟수가 여름보다 두 배나 늘어난 것 같다. 야간 근무 때 업무를 처리하다 파티션 너머 동료 눈을 3번 마주치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곤 돈을 걷어 치킨을 시켜 먹는다. 닭에게 우린 거의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다.

야식만큼이나 자주 하는 말이 "아, 구조대장님 보고 싶다"이다.

지난 1월 4일, 다른 소방서로 전보 간 구조대장님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아직 인사발령이 마무리되지 않아 구조대장 자리가 공석이기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 창가에 놓인 화분 속 식물들이 메말라가는 걸 볼 때마다 그의 부재를 또 한 번 떠올린다. 대장님은 식물을 유독 사랑했다. 사무실 냉장고 옆 자리, 고무나무를 한 그루 가져다 놓고는 예쁘게 자라라며 약도 주고 지지대도 꽂아놓으며 정성을 쏟았다. 우리는 먹다 남은 커피나 콜라를 장난으로 몰래 줬다. 대장님은 다 알면서도 시치미 떼다 전출 때 "야, 네들이 콜라 주는 거 내가 모르는 줄 알았지? 나 가거든 좀 잘해줘라" 했는데, 그 고무나무가 시들해져 간다. 그 나무를 볼 때 대장님이 떠오른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리움을 품을 만한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딱, 1년 전, 나는 소방서에 첫 출근을 했다. 37살 먹은 부담스러운 신입대원, '중고 신입'이 들어온 게 영 탐탁지 않은 분위기였다. 창가에서 팔짱을 낀 대장님과 불구경이라도 난 듯 파티션 너머로 고개만 빼꼼 내민 팀장님이 나를 쳐다봤다. 깔끔하고, 말끔하기도 한, 민머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야 너 머리가 왜 그래? 딱 보니 연식은 좀 됐구먼."

"아. 예...제가 사정이 있어서요. 나이는 37살입니다."

"결혼은 했고?"

"아뇨. 아직 안 했습니다."

"아니 지금까지 뭐하다가 이제 들어온 거야?

"예, 제가 외국에 좀 나갔다 왔다 해서요.."

'이건 뭔가?'하던 대장님 눈빛이 '요놈 오늘 잘 걸렸다'하는 눈빛으로 변했다. 그날이 내가 태어난 이후 가장 많은 질문과 조언을 들은 날이었다. 외국서 오래 살다 온 머리 빡빡 민 신입 구조대원 자체로도 수상스럽고 신비로웠는데, 하나하나 물을 때마다 '자격증도 없다', '수영도 못한다', '운전면허도 작년에 땄다' 하니, 정말로, 말만 통하는 아프리카에서 온 노동자와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편집자 주: 필자가 말한 '외국 경험'은 우간다에서 생활한 것을 말한다.) 이게 그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대장님의 눈빛이 또 한 번 바뀌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첫 회식 때였다. 대장님은 신입 소방사들에게 "건의사항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하셨다. "전혀 부담 갖지 말라"는 말과 "나 꽉 막힌 그런 사람 아니야"라는 말도 덧붙였다. 입사 동기 박 반장이 묵묵히 사이다 한 잔 들이켜고, 6개월 먼저 들어온 다른 반장님이 서글서글한 웃음을 짓는 사이, 미끼를 문 건 나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광주소방학교 학생장을 역임했고, 사업 경험도 있는,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이 순간 입을 닫는다면 내 삶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나는 믿었다. 사람은 관상 따라 간다고. 우리 대장님처럼 인자하게 생긴 사람은 절대 이런 것으로 사람을 떠보는 그런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저.. 저기 대장님. 제가 여기저기서 일을 해봤는데요. 어느 일터 건 식사 후 30분이라도 휴식시간을 갖는데 왜 우리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바로 업무를 보나요? 제가 지냈던 나라에선 '씨에스타'라고 낮잠 시간을 주거든요. 실제로 낮잠 30분이 일의 효율에 큰 도움을 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고 말입니다. 우리도 휴식 여건을 보장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오늘 또 잘 걸렸다'라는 눈빛으로 변한 대장님은 "하이 참.." 하며 말문을 열었다. 내 건의사항이 왜 안 되는지 설명하는 데에는 2시간이 걸렸다. 고기 판에 발갛고 짱짱한 불길을 쏘아 올리던 숯은 점점 힘을 잃어갔고 힘차게 이 반찬 저 반찬을 옮겨 다녔던 나의 젓가락질은 갈 길을 잃었다.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목을 사이다로 축이며 대장님 말씀에 경청하는 동안 나는 두 가지를 깨달았다. 경청은 계속 경청을 낳는다는 것, 그리고 나는 찍혔다는 것이다. 사실 소방서 경력이 쌓이고 저때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언제 튀어나갈지 모르는 출동 부대에게 대낮에 휴식을 보장해달라고 했으니 대장님한테 불판으로 맞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꾸지람이 아니었단 것을 대장님과 함께 생활하며 확실히 느끼게 됐다. 대장님은 그 후로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해줬다. 물론 '라떼' 이야기도 많았지만, 입영(수영)하는 법, 식물 이름, 재테크하는 법, 인생 노하우까지. 대장님은 메뉴 버튼이 엄청 많은 이야기 자판기 같은 분이었다. 처음에는 '간섭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역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진심으로 직원을 걱정하고 생각해서 하신 말씀이란 걸 깨달았다. 대장님과 사석에서 돈까스를 먹을 때, 유독 많은 조언을 남기는 이유를 듣게 됐다. 오래 전 소방은 워낙 주먹구구식 시스템에 누구 하나 제대로 후배인 자신을 살펴주지 않았다고 한다. 스스로 많은 부분들을 알아내야 했고 그로 인해 고민과 고충이 많았다고, 그런 자신의 과거를 후배들이 답습하지 않도록 최대한 알려주고 싶어 말이 좀 많은 거니 이해해 달라 했다.

내가 글을 쓴다고 했을 때도 누구보다 나를 지지해 줬던 분이 우리 대장님이셨다. 다른 지휘관 같았으면 지금 하고 있는 본업에나 충실하라며 질책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장님은 "소방관들 영웅으로 미화시키는 글 같은 것 쓰지 마라"며 뼈 있는 조언을 해주셨다. SBS에 인-잇 칼럼을 기고한다고 했을 때도 대장님이 먼저 관련 공문들을 읽어보고는 보고 경로를 알려줬다. 대장님은 지휘관 이전에 인생 선배였다.

빈 구조대장님실을 청소하다가 발견한 메모. 후배의 노력을 인정하고 도와주려는 따뜻함이 대장님실 벽면에 남아있었다.

소방서에서 일을 시작하고 한동안 공무원은 꼰대 조직이란 생각에 갇혀 살았다. 답답한 조직 문화와 숨 막히는 위계질서가 있는 곳, 두 번째 군 생활을 시작했다며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매일 구박만 당하고 이곳에 잘 섞이지 못하는 이유가 저들과 달리 나는 꼰대가 아니기 때문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보호했다. 돌이켜 보면 지지리도 못났다. 꼰대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알아도 모르는 척,어린 친구들에겐 방관자적 자세를 취했다. 그들의 인생을 존중해 준답시고 말이다.

나는 물론이고 다른 중년 관리자들 역시 그 꼰대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일터에서 함부로 말도 못 한다고 한다. 하지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우리 대장님 밑에서 1년을 같이 생활해보니 생각을 고쳐먹게 됐다. 꼰대라는 말이 듣는 게 무서워서 불붙은 집을 보고 지나치는 게 과연 옳은 일이겠는가. 진심이 담긴 적절한 조언과 격려는 조직과 개인을 더 끈끈하게 이어주는 접착제의 역할을 한다는 걸 몸소 느끼고 나니 그동안 입을 다물고 살아온 내가 부끄러워졌다. 말이 많고 없고 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진심으로 생각해서 하는 말인지, 단순히 뽐내기 위해서인지가 꼰대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대장님이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출입문 뒤에서 조용히 나를 불렀다.

"최 반장, 그동안 고생 많았어. 나이 먹고 들어와서 애쓰는 모습 내가 못 본거 아니야. 그래서 점수도 잘 주고 가니까 승진 시험공부 열심히 해서 꼭 진급하도록 해. 아직 나도 퇴직 멀었으니까 발령지 돌다가 또 보자고."

뒤돌아 평소 퇴근하는 모습으로 떠나가는 대장님의 뒷모습에 아쉬움이, 또 벌써 그리움이 찾아왔다. 앞으로 우리 대장님 같은 구조대장이 되어야겠다는 꿈이 생겼다. 항상 빈자리에 여운이 남는 사람, 그런 선배가 되고 싶다. '일터에선 웃어라', '하루 종일 우리끼리 얼굴 보고 사는데 찡그려서 좋을 게 뭐가 있느냐'는 말이 아직도 구조대 사무실에 남아 덜덜거리는 온풍기 덮개를 맴돌고 있다. 오늘따라 대장님이 보고 싶다. 커피 다 마시면 대장님께 전화 한 통 드려야겠다.

 

#인-잇 #인잇 #시골소방관심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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