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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하늘이 준 '숙제' 기회, 너무 안일했던 삼성의 대응

[취재파일] 하늘이 준 '숙제' 기회, 너무 안일했던 삼성의 대응

원종진 기자 bell@sbs.co.kr

작성 2021.01.19 09:30 수정 2021.01.20 14:45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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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하늘이 준 숙제 기회, 너무 안일했던 삼성의 대응
정준영 부장판사 : 오늘 변호인 측에서 제출해주신 삼성의 새로운 준법감시제도. 이 부분은 기업범죄 양형기준의 핵심적 내용으로 1991년 제정된 미국의 연방양형기준 제8장에 언급된 양형 사유입니다. 여기 의하면 준법감시제도가 실효적으로 운용돼야 한다고 합니다. (...) 다만 이런 제도는 실질적이고 효과적으로 즉 실효적으로 운영돼야만 양형 조건으로 고려될 수 있습니다.
-2020년 1월 17일 이재용 파기환송심 4차 공판 중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어제(18일) 다시 감옥으로 돌려보낸 서울고법 형사1부 정준영 재판장은, 정확히 1년 하고도 이틀 전, 삼성이 출범시킨 준법감시위원회를 양형 조건으로 고려할 수 있다는 의중을 처음 내비쳤습니다. 특검과 진보 시민단체들에겐 어처구니없게 받아들여졌던 재판장의 이 말은 이재용 부회장에겐 하늘이 준 기회였습니다. 이날 이후, 재판부의 심중에 '집행유예'가 자리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정설처럼 굳어졌습니다. 법원 주변에선 진보 시민단체들의 시위가 매일같이 벌어졌고, 특검은 이 재판부에서는 집행유예 외 다른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보고 두 번의 재판부 기피 신청을 냈습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어제 법에서 정한 형량의 최소한인 징역 2년 6월을 이재용 부회장에게 선고하면서도 끝내 집행유예는 주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이재용 부회장을 다시 감옥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판결문에 자세히 적었습니다.

● '실효성 있는 준법감시위', 첫 단추도 안 잠근 삼성

이재용 부회장 집행유예의 필수 요소, 삼성준법감시위원회 실효성에 대해 재판부가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징후는 지난해 말, 재판 막바지부터 본격적으로 감지됐습니다.
▶ [2021.01.11. 취재파일] 이재용 운명의 1주일…재판부가 던진 마지막 질문의 의미는?

재판부는 다양한 문헌을 제시하며 삼성준법감시위 실효성의 핵심은 '발생 가능한 법적 위험의 유형화'라고 강조해왔습니다. 이러한 '법적 위험의 유형화'가 중요하다는 것은 <상장회사준법감시통제 기준> 등 재판부가 1년 넘는 재판 기간 동안 참조하고 언급해온 문헌들에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도 '법적 위험의 유형화' 작업이 준법감시위 실효성 평가의 '첫 단추'였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실효적인 준법 감시는 법적 위험의 평가로부터 시작된다. 상장회사 표준준법통제기준에 따르면 실효적인 준법 감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① 법적 위험의 크기·발생 빈도 등을 검토하여 위법의 발생 가능성 등을 판단하고 주요한 법적 위험 행위를 유형화하는 방법으로 법적 위험을 평가한 다음(제12조)…
-이재용 부회장 파기환송심 판결문 중
삼성
하지만 삼성 측은 이 '첫 단추'에 해당하는 핵심 작업을 판결 선고 전까지 완료하지 않았습니다. 삼성 측은 대신 '위험 유형화 작업을 세계적 컨설팅업체인 BCG에 의뢰했고 결과는 내년에 나온다'는 대답을 내놨습니다.

본격 활동을 시작한 지 10개월이 넘었음에도 삼성준법감시위원회가 실효성 평가의 핵심이 되는 작업을 직접 하지 않았고 외주를 줬다는 점, 그리고 그 결과가 내년에야 나온다는 점을 재판부는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삼성 측 주장대로 이재용 부회장 선처가 삼성 경영은 물론 국가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었다면, 다르게 임했어야 했습니다.

● 재판부가 내준 '나머지 공부'마저도…

첫 단추도 잠그지 않은 삼성에 대해 재판부는 그래도 기회를 주려고 한 걸로 보입니다. 지난해 12월 21일 마지막 석명준비명령에서 재판부는 '앞으로 발생할 법적 위험 유형화를 못했다면, 과거 발생했던 위법 사안의 재발을 막기 위해 어떤 대책을 마련했는지 설명하라'는 취지의 요구를 했습니다.

삼성 측은 이와 관련한 답변서를 여러 차례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이 답변서를 입수해 읽어보니 취재기자로서도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들이 있었습니다. 재판부는 과거 삼성전자 임직원들이 이건희 회장의 차명주식을 보유했던 범죄를 언급하며 재발 방지책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삼성 측은 '현재 차명주식이 존재하지 않아 재발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답변한 겁니다. '옛날에 일어났던 이런 일들이 또 발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질문에 '그 일은 옛날에 이미 다 끝난 사안이다'라고 답한 격입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 같은 삼성 답변을 꼬집었습니다.

관리되어야 하는 법적 위험은 현존하는 법적 위험에 한정되지 아니하므로, 임직원을 동원한 차명주식 보유 역시 관리되어야 할 법적 위험으로 보아야 한다. (…)다만, 변호인은 현재 차명주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위험의 발생 가능성을 평가하여 우선순위를 정하는 과정에서 고려되어야 할 사정이다.
-이재용 부회장 파기환송심 판결문 중

재판을 앞두고 있는 삼성물산-제일모직 불법 합병 의혹 사건에 대해서도 삼성 측은 줄곧 '1심 판결도 나오지 않아 준법감시위원회 조사 대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해왔습니다. 재판 과정 내내 '범죄 예방'을 강조해 온 재판부는 이런 주장 또한 납득하기 어렵다고 판결문에서 밝혔습니다.

삼성 준법감시위원회가 출범 전의 사안이라거나 법원의 1심 판결이 아직 선고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사건에 대하여 조사에 착수하지 않은 부분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준법 감시의 본질이 제재가 아닌 예방이며, 준법감시에 있어 해당 기업의 전력(前歷)을 분석하는 것은 향후 발생이 예상되는 법적 위험의 분석과 그에 대한 대응 방안을 마련함에 있어 필수적인 작업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재용 부회장 파기환송심 판결문 중

재판부는 숙제를 내줬는데, 삼성은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거나 때로는 숙제의 주제에 대해서도 다른 주장을 내세웠던 셈입니다. '봐주기 판결을 하려고 너무 많은 기회를 준다'는 특검과 시민단체들의 비난에도 여러 차례 기회를 얻었던 삼성은 이렇게 기회를 모두 살리지 못했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연합뉴스)
● 벌써 고개 드는 사면론…'미완의 숙제' 마무리하는지부터 살펴야

이재용 부회장이 재수감된 어제, 이 부회장을 3·1절 특사로 사면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왔습니다. 경제단체들은 연달아 '삼성의 경영 공백과 국가 경제 타격이 우려된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최근 이슈가 된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사면 논의와 맞물려 이재용 부회장 사면론도 앞으로 돌아올 주요 국경일마다 회자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삼성이 미완의 숙제들을 마무리하는지부터 지켜봐야 합니다. 막대한 예산과 조직이 배정된 준법감시위원회를 삼성이 출범 당시의 다짐처럼 계속 유지·발전시켜나가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재판부는 이와 관련해 ▲미래전략실 등 그룹 컨트롤타워를 통한 위법 행위 방지책 마련 ▲현재 준법감시위에 가입된 7개 계열사 외 다른 계열사의 위법 행위를 막기 위한 대책 마련 등 5가지 요소가 보완돼야 한다고 판결문에 적었습니다.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난 삼성은 총수의 명운이 걸린 마지막 재판에서 그간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룹 총수가 집행유예를 받아온 관행에 안주한 탓인지, 아니면 총수 중심의 제왕적 커뮤니케이션 구조에서 변론 전략이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탓인지, 재판부와 특검의 질문에 내놓은 삼성 측의 대답들 곳곳에선 '치밀함' 대신 변화된 상황을 읽지 못하는 '안일함'이 읽혔습니다.

준법 경영 과제 앞에서 노출된 이런 안일함이 삼성은 물론 우리 경제에 또다시 부메랑처럼 돌아와선 안됩니다. 설익은 동정론이나 사면론이 아닌, 새로운 삼성준법감시제도에 대한 지속적 감시와 비판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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