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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북적] 새해에도! '힘들 때 먹는 자가 일류'

[북적북적] 새해에도! '힘들 때 먹는 자가 일류'

권애리 기자 ailee17@sbs.co.kr

작성 2021.01.17 06:59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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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북적북적] 새해에도! 힘들 때 먹는 자가 일류


[골룸] 북적북적 275 : 새해에도! '힘들 때 먹는 자가 일류'

"먹는 일이야말로 가장 투명한 유희이니, 개인의 성격이 덕지덕지 묻어날 수밖에."

신축년 새해! 어떻게 맞이하고 계신가요. 연초부터 혹한과 폭설로 큰 불편을 겪은 분들이 많았는데, 이걸로 새해의 액땜은 끝이었으면 좋겠네요. 뒤로 갈수록 술술 풀리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는 한국을 떠나기 전에 걱정했던 것보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뉴욕 미스터리] 보시고 제가 1년 자리를 비우는 걸 아쉬워해 주시고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 정말 감사했습니다…)

미국은 지역마다 코로나19를 받아들이는 분위기의 차이가 크다고는 하는데, 제가 있는 지역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조심하는 편입니다. 외식업에 대한 제한은 한국보다 여전히 엄격합니다. 뉴욕은 모든 식당들에 대해서 배달/포장과 야외 테이블 운영만 허용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낯선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그 어느 때보다 '집밥'을 열심히 해 먹게 됩니다. 안 해본 요리에도 도전하게 되고, 부엌에는 늘 요리책이 있습니다. (오늘의 '북적북적' 표지는 어느 아침의 결과물입니다.) 그러다가, 오늘 함께 읽고 싶은 이 책 [힘들 때 먹는 자가 일류]를 만났습니다.

"결국 내가 택하는 가장 극단적인 다이어트 방법은 하루 한 끼를 먹고, 하루 한 잔만 먹는 '1일 1식 1잔' 다이어트다.

극단적이라는 말은, 그간 누려온 많은 즐거움을 녹슨 칼로 살을 도려내듯 아주 괴롭게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갑자기 찾아가는 한밤의 포장마차, 먹고 싶을 때 곧바로 주문하는 배달음식, 뷔페도 아니면서 뷔페처럼 여러 가지를 시켜놓고 천천히 다 먹어 치우는 만찬까지 모두 끊어야 한다.

1일 1식에 왜 1잔을 덧붙이냐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이 한 잔을 도통 포기할 수가 없다. 하루 일을 끝내고 돌아와, 조립이 좀 엉성하게 된 이케아 소파에 몸을 구기고 앉아 혼자 마시는 술 한 잔… 손바닥에 폭 안기는 작은 잔에 따라 마시는 싱글 몰트위스키 한 잔, 냉장고에 두 달이고 세 달이고 넣어 놨다가 달콤하게 홀짝일 수 있는 주정강화 와인, 코 밑에 두고 향부터 즐기는 레드와인, 혀끝이 꼬부라질 정도로 새콤해서 기분 좋은 자극을 주는 사워 맥주, 입에 짝짝 들러붙는 달큰한 맛의 약주까지."


[힘들 때 먹는 자가 일류]는 GQ에서 음식과 술 전문 에디터로 일했고, 지금은 술 중심의 문화공간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라꾸쁘'를 공동운영하면서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는 손기은 님의 에세이집입니다. 짧고 굵직한 책이에요. 100페이지 남짓한 분량으로 금방 읽을 수 있지만, 뒷맛이 진하게 남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들려주는 '그때 그 시절 고생한 이야기'는 늘 전래동화처럼 아득하게 느껴지지만, 딱 하나 아직도 잘 잊히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어린 시절 엄마가 할머니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귤 한 알 이야기다.

그때 받은 귤이 어찌나 귀하고 맛있는지, 껍질을 모두 깐 뒤 귤 한 점을 떼어먹고 다시 동그랗게 붙여 빈 자리를 메운 뒤 새것처럼 머리맡에 뒀단다. 그러다 생각나면 또 한 점 떼어먹고 다시 동그랗게 만들어두고…

요즘도 귤을 먹을 때마다 그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어떤 날은 그 어린 마음이 귀여워서 웃고 어떤 날은 그 궁상이 짜증나서 웃는다. 이러나저러나 요즘 시대 화법으로 말하자면 어린 시절의 엄마는 '맛있는 것에 꽤 진심인' 사람이 아니었을까? 맛있는 걸 먹고 먹이는 일에서 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아닐까?

아직도 엄마는 '아빠랑 빅맥세트 사 먹는 날'을 한 달에 한 번 정해두었다. 패스트푸드는 콜레스테롤에 좋지 않으니까 시내 맥도날드까지 왕복 2시간 정도 걷는다는 기준을 세워두고서."


손기은 작가는 먹고 마시고… 이를 즐기고 사랑하는 일에 '진심을 다하는' 분이고요. 작가로서는 행간에 싣는 말이 좀 더 많은 분 같습니다. 책 제목은 [힘들 때 먹는 자가 일류]이지만, 정작 에세이에는 얼마나 열심히 먹고 마셨는가에 대한 이야기만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맛깔나는 순간들을 독자들과 손님들, 사랑하는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해 왔는가, 솔직하면서도 수줍게 덧붙입니다.

아마도 눈물을 흘리는 대신 국물을 우리고, 술잔을 기울였던 날들이 적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드는 대목들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처럼요. 그래도 '이러저러한 일들이 힘들고 슬펐다, 괴로웠다'고 앞세워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열심과 진심을 다해 먹고 마시고 요리하고 공유하면서 최선을 다해 삶으로 돌아온 그 소중한 시간들을 아주 맛있게 나눠주고 있습니다.

"요리학원을 다니다 만난 사이라서 데이트의 9할이 '같이 요리해 먹기'였다.
…….. 그는 뒤도 한번 안 보고 돌아섰다. 그런데 쿨했던 그 뒷모습과 달리, 너무나도 진득한 흔적을 남겨 놓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텅 빈 부엌에서 홀로 계란 프라이라도 하나 부치려고 하면, 팬이건 뒤집개건 손에 닿는 물건마다 기름기가 치덕치덕이었다."


손기은 작가는 "먹는 일이야말로 가장 투명한 유희"라고 표현합니다. 적확한 표현이다, 무릎을 쳤어요. 그 '가장 투명한 유희'를 바탕으로 사람들과 만나고 교류하는 장을 만드는 외식업 종사자들. 손기은 작가님 본인을 포함해서, 함께 먹고 마시는 자리를 마련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 분들은 당장 가장 중요한 경제적인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삶의 기준 자체가 헷갈리고 흔들리는 시간을 지나고 계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이 가장 원초적인 유희라는 끈으로 이어지는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기억하면서 기다리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그런 고민의 흔적들이 책 곳곳에서 엿보입니다.

"우리 네 식구가 모두 모여 살던 그때, 말티즈 한 마리를 키웠었다. 태어나자마자 우리 집으로 와서 18년을 살던 뭉치는 몇 해 전 노환으로 죽었다.
뭉치의 숨이 넘어가려는 마지막 순간에 엄마가 한 일은 갈치 한 토막을 굽는 거였다. 온갖 병치레를 달고 살던 말년의 뭉치에게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이지 못해 마음 아팠다며, 갑자기 생갈치 한 토막이라도 먹여 보내고 싶었단다. 그 다급한 순간에 프라이팬을 꺼내 불을 붙이고 갈치를 뒤집어가며 굽던 엄마의 마음을 나는 너무 잘 안다."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새해에도 미리 감사드립니다. 신축년 새해에도 [북적북적] 함께 해요.

*출판사 '드렁큰에디터'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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