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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어머니날에 죽어간 아이, 핀란드판 정인이 사건

[인-잇] 어머니날에 죽어간 아이, 핀란드판 정인이 사건

이보영│전 요리사 현재 핀란드 칼럼리스트

SBS 뉴스

작성 2021.01.14 11:00 수정 2021.04.02 15:27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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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정인이가 있다면 핀란드에는 에리카(Eerika)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인 2012년, 당시 8살이었던 에리카는 아버지와 그 여자친구에게 죽임을 당했다. 핀란드는 아동 보호와 복지와 관련해 잘 알려진 선진국으로, 1984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정에서의 체벌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나라에서도 부모의 학대 끝에 숨지는 어린이들이 있다. 2003년부터 2013년까지 핀란드에서 부모에 의해 숨진 15살 미만 어린이들은 모두 61명에 이른다.

이들 중 한 명인 에리카는 화창한 5월, 핀란드의 '어머니날'에 짧은 생을 마쳤다. 에리카 몸에서는 상처가 무려 89군데나 발견됐다. 하룻밤에 생긴 상처가 아니었다. 아이의 아버지와 그 여자친구는 2년 동안 에리카를 끊임없이 학대한 것으로 드러났다. 에리카에게 폭력을 먼저 행사한 사람은 여자친구였다. 의사를 사칭했던 그녀는 에리카 아버지가 아이를 제대로 훈육하는 방법을 모른다며 그녀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강제로 밥을 먹이거나 때리기 일쑤였고 앞마당에서 끊임없이 뛰는 체벌을 수시로 주었다. 이런 학대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기까지 했다.

여자친구는 소름끼치는 진술을 내놓았다. 아이를 강제로 뛰게 한 이유가 '아이의 비만을 걱정해서'라고 했지만 강제로 밥을 먹인 이유는 '아이의 섭식장애 때문이었다'라며 조사 내내 모순된 변명으로 일관했다. 여자친구는 에리카가 집안 물건을 망가뜨리고 옷을 험하게 입어 벌을 줬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물건을 망가뜨리고 에리카의 옷에 구멍을 낸 것은 여자친구 자신이었다.

아동학대, 폭력 (사진=픽사베이)
에리카가 숨을 거두던 날, 그들은 에리카의 손을 테이프와 케이블타이로 묶은 채 입과 코는 테이프로 막았고, 담요로 몸을 둘둘 말았으며 두꺼운 천으로 아이를 한 번 더 말아 꼼짝 못하게 했다. 아이가 움직이자 여자친구는 아이의 배를 주먹으로 때리고 전기 콘센트를 이용해 아이의 발바닥을 찔렀다. 둘둘 말려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던 아이는 4~6시간 동안 천천히 질식사했다. 죽은 아이의 머리에는 왕관이 씌어져 있었다. 그들이 '공주 놀이'를 하자며 아이를 유인했기 때문이었다.

검찰은 이들을 살인죄로 기소했다. 의사를 사칭하던 여자친구에게는 신분 위조죄가 추가됐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하려고만 했고 아이를 훈육하고 흥분한 아이를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고 강변했다. 변명이 먹히지 않자 자신들의 행위가 아이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인정하지만 살해할 의도가 있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천 내부 온도가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으며, 아이 머리 위쪽에 난 구멍으로 공기가 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둘러댔다. 법원은 이들에게 모두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판결문에는 피고인들이 그들의 행위가 아이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아이에게 끔찍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안겨준 잔인한 살해 방식을 택해 죄질이 무겁다고 언급됐다.

에리카가 숨을 거두기 전까지, 에리카를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에리카 주위에는 마당에서 계속 뛰고 있던 아이를 이상하게 생각했던 이웃, 멍든 얼굴로 등교하는 에리카를 걱정했던 학교 교사, 에리카에게 가해진 여러 학대 흔적을 본 생모가 있었고, 이들은 모두 11번에 걸쳐 관할 기관에 신고했다. 하지만 에리카 아버지에 대한 조사 결과는 모두 '혐의 없음'이었다.

한 번은 에리카가 아버지와 분리되어 다른 곳에 위탁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에리카는 아버지 집에 가기 싫다고 저항했지만 소용 없었다. 집으로 돌아간 후 상황은 더 악화되어 아이의 몸에서는 더 많은 상처가 발견됐다. 에리카 어머니가 양육권을 달라고 법원에 요청 했지만, 법원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렇게 국가 기관이 사실상 방관에 가까운 행태를 보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헬싱키 아동보호 및 의료 관련 공무원 11명이 무더기로 기소됐고, 2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면서 핀란드 국민들은 분노했고 미디어는 연일 들썩였다. 결국 핀란드 정부도 이 사건을 통해 핀란드 아동보호 시스템에 큰 허점이 드러났다는 점을 시인하고 사상 처음으로 단일 사건 조사를 위한 워킹 그룹을 만들었다.

대대적인 조사 결과 우선 핀란드 역시 아동 보호와 관련해 인력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복지사 1명이 담당하는 아동의 숫자는 20명에서 50명 정도가 적절하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160명을 담당할 정도였다. 또 아동보호와 관련된 여러 공공 기관의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를테면 경찰이 신고를 받아 아동보호 기관에 사건을 넘기면 이후 진행상황을 경찰이 알지 못하는 식이었다. 아동의 권익보다는 해당 기관의 정보 보호가 더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학교, 경찰서, 의료기관, 아동보호기관 등 많은 기관이 관여했지만 전체 상황을 제대로 다 파악한 기관은 단 한 곳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아이의 상처를 학대의 흔적으로 제대로 파악해내지 못한 점, 아이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았던 사례 등도 지적됐다.

에리카 사건 이후, 핀란드는 아동보호 관련 물적/인적 자원을 한층 강화하고 아동 보호 관련 정책과 법안을 개선했다.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아동 보호와 관련된 여러 기관의 긴밀한 협력
2. 보다 적극적인 학대 흔적 관찰
3. 상시적이고 포괄적인 아동 거주 적정성 평가
4. 사망 아동 가정에 대한 학대 여부 전수 조사
5. 학대 관련 단서 전수 보고 등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핀란드 국민이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아동 보호의 성공은 법 제정과 정부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It takes a village to raise a child)는 유명한 아프리카의 속담처럼, '꺼진 불도 다시 보는' 마음으로 우리 주위의 아이들을 살피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발견되면 곧장 신고하는 시민 의식이 절실하다. 핀란드에서는 매년 아동 보호 관련 신고가 늘고 있다고 한다. 학대 받는 아이가 느는 것이 아니라 아동의 문제라면 눈에 불을 켜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경우 신고하는 시민들이 늘어난 것이다.

꽃으로도 때리면 안 되는 우리 아이들, 피기도 전에 꺾이는 꽃이 되지 않도록 이제는 우리도 함께 지켜내야 한다. 에리카를 겪은 핀란드는 앞서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던 영국을 참고 삼아 사회 시스템을 뜯어고쳤다. 정인이를 잃은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하다.
 
인잇 이보영 네임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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