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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작고 시시한 것들이 주는 행.복.

김지미 | 영화평론가

# 영화 <소울(Soul)>

2020년이 저물고 2021년이 왔다. 가는 해가 아쉽지 않았던 적은 아마도 작년이 처음이었다. 새해를 카운트다운 하는 미국 TV 프로그램들은 2020년이 얼마나 최악이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떻게 버텨냈는지에 대한 특집으로 가득했다. 지난 해에는 BTS가 등장해 설레게 했던 늘 발디딜 틈 없는 인파 속에 치뤄진 타임스퀘어의 새해맞이 행사도 한산한 길거리 풍경 속에 비접촉 방식으로 치러졌다.

자정 무렵 우리 동네 주민들도 와인이나 맥주 등 각자 마실 것을 들고 나와 멀찍이 떨어져 축배를 들고 서둘러 들어왔다. 어둡고 마스크를 쓴 채 멀찍이 떨어져 있어 알아보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여러모로 썰렁한 새해맞이였다.

새해 첫날 떡국을 나눠 먹는데 막내가 물었다.

"엄마는 새해 결심이 뭐야?"

결심이라… 솔직히 세워본 기억마저 너무 오래되었다. 바라는 바가 결심과 노력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아예 세우는 일을 그만 두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초롱초롱한 아이의 눈망울에 그런 대답을 줄 수 없어 시간을 벌어볼 양으로 질문으로 답했다.

"글쎄. 너는 뭔데?"

꼬마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피규어 다 모으는 거."

중학생인 언니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새해 결심은 그런 게 아니야. 네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게 노력하는 내용이어야지."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 아, 너무 좋은 말이다. 내가 결심을 그만 둔 것은 결심 자체의 무용함때문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데 너무 집중한 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작년 크리스마스날, 픽사의 새 애니메이션 <소울>이 디즈니플러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한국에서는 1월 20일쯤 극장 개봉 예정이지만 극장문이 언제 열릴 지 모르는 미국에서는 디즈니플러스 유료 구독자를 대상으로 크리스마스에 맞춰 공개되었다. 지루한 코로나 시대에 기대했던 볼거리라 아이들과 환성을 지르며 시청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소울>은 어른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다. 물론 아이들이 보아 거리낄 장면이 하나도 없고, 재미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말하는 미묘한 삶의 전율을 느끼려면 계절의 변화가 왜 아름다운지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야 한다.

영화 소울 포스터

어른이 되기 전 계절은 그냥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어떤 시스템이 굴러가도록 책임을 지거나 그 일부가 되어 소모되기 시작하면서 때가 되면 모든 일을 알아서 하는 자연이 그리고 그 변화가 눈에 보이는 계절의 신기함이 비로소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울>은 그런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본성 그리고 그것을 아우르는 삶의 아름다움에 대한 깨달음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말하면 쓸데없이 심오하고 무거워 보이지만 정작 영화는 픽사 특유의 귀여움과 재치로 잘 무장되어 있다.

심드렁한 중학생 아이들의 음악 선생이었던 재즈 피아니스트 조 가드너(제이미 폭스)는 평생 소원이었던 뉴욕 최고의 재즈 클럽에서 연주할 기회를 얻은 그 날, 사고로 이 세상을 뜬다. 저승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억울함에 몸부림치던 그는 거기서 떨어져 얼떨결에 세상에 태어나기 위한 영혼들을 교육하는 멘토로 배치된다. 링컨, 간디, 테레사 수녀도 포기한 '22호'가 그의 멘티가 된다. 자신만의 관심사(spark)를 발견해야만 태어날 수 있는 뱃지를 완성할 수 있는데 22호는 그것을 거부하며 수천 년을 밍기적 거리는 중이다.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평생을 살았던 조에게 22호의 심드렁한 태도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는 평생 고대해 온 연주를 마치기 위해 22호의 교육 기회를 이용해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을 모색한다. 우여곡절 끝에 돌아가기는 하지만 22호의 영혼이 조의 몸으로 들어가고, 조는 조력자가 된다. 조가 원래 몸을 되찾으려 온갖 노력을 하는 동안 22호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수천 년간 찾지 못했던 관심사를 찾아낸다.

22호가 일상의 작은 순간에서 삶의 열정을 발견했을 때, 조는 그것을 단순한 들뜸이나 즐거움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유명 무지션과 제대로된 무대 위에서 재즈 공연을 하고 싶다는 자신의 오래된 '꿈'이나 음악인으로서 '소명'과 같이 중요한 '열정'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조의 태도는 '꿈'과 '소명'에 대한 우리의 강박과 닮았다. 누구나 자라면서 "꿈을 크게 가져야 한다"라거나 "돈, 명예보다는 자신의 소명을 따른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좋은 의도와 취지지만 실제로 누구에게나 모두 가능한 일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직업이 꿈이나 소명과 일치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우리에게 꿈을 북돋아주려던 그 명제들이 어느 순간 오히려 내 삶을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 때도 있다.

영화 소울

꿈이 무엇인지 찾는 데 오래 걸리는 아이들도 있지만 나는 행운인지 어린 시절부터 영화와 글쓰기에 푹 빠져 들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마흔이 넘어 한국을 떠날 때까지 학생에서 선생이 될 때까지 학교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학교가 작은 우물같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 밖으로 나가는 것은 뭔가 소명을 버리는 일 같았다.

미국에 와 경력이 원점이 된 상태에서 직업을 찾다 보니 학교와 전혀 관련 없는 작은 식품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꿈'이나 '소명'의 강박이 살아날 때마다 내가 이 일을 하기 위해 그렇게 오래 공부했나 하는 생각에 무기력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일은 의료보험과 생활비를 충당해 줄 뿐 아니라 재밌기도 했다. 주문서를 받고 고객에게 상품이 전달되도록 처리하는 과정은 틀리지 않게 처리하는 일이 게임 같기도 했고, 경제 상황과 작황에 따라 달라지는 수요와 공급을 보는 일도 흥미진진했다. 무엇보다 창살 없는 감옥 같았던 코로나 상황에서 내가 세상과 연결되 있음을 인식시키는 활력이 되어 주었다.

스포일러가 될까 봐 구체적으로 기술할 수 없지만 22호가 찾아낸 관심사도 내가 일하면서 느끼는 것처럼 아주 작고 일상적인 것들이다. 어쩌면 너무 시시할 수도 있는 것들. 하지만 22호의 열정과 조의 뒤늦은 깨달음은 원대한 포부나 꿈에 짓눌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주는 작은 즐거움을 놓쳐버리는 것이야말로 삶을 허비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져준다. 게다가 코로나가 빼앗아 간 지난 1년은 그 너무도 평범한 것들이 가진 커다란 축복을 깨닫게 해주었다.

언니의 타박에도 아랑곳없던 막내의 새해 결심은 꼬마를 새로운 길로 이끌고 있다. 피규어를 살 돈을 모으겠다며 사업을 구상한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꼬마는 그림을 온라인으로 팔아보겠다며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려댄다. 올해 안에 그림을 팔아 소원 성취하기는 힘들겠지만 그림 실력은 틀림없이 늘어 있을 듯하다.

<소울>을 관람하고, 막내의 모습을 보며 이제야 나도 막내의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되었다. 사소한 스트레스들을 먹는 것으로만 풀었더니 새해 벽두에 받은 건강검진에 온통 적신호 투성이다. 올해는 조금 덜 먹고 더 많이 움직이고, 무엇보다 코로나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그만 불평하고 일상에서 작은 즐거움을 놓치지 않아야겠다. 올해 나의 결심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한 '소울'이 되는 것이다. 그럼 첫째의 말처럼 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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