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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어느 사냥꾼의 속사정

시골소방관 심바씨 | 마음은 UN, 현실은 집나간 가축 포획 전문 구조대원

사냥 사냥꾼 (사진=픽사베이)

한 점의 바람도 허락하지 않는 빽빽한 대나무 숲 한가운데서 나는 그 놈을 찾고 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건 마지막 한 발. 이 한 발에 나의 모든 걸 걸어야 한다. 손에 흐른 땀이 방아쇠에 묻어 미끌리는 게 여간 거슬리지 않는다. 이제 실수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이 마지막 한 발을 다 맞춘다 해도 그놈이 쓰러질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이미 두발을 맞고도 버티고 서있다. 그놈은 내게 단 한 번도 등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 두려움 없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던 게 머릿속에 잊혀지지 않는다. 쫓고 있지만 오히려 내가 쫓기는 기분이다.

"여깄다! 여기!"

대숲 언덕 너머로 동료의 소리가 들렸다.

"기다려!! 나 지금 가고 있어!"

나의 두 다리는 이미 내 몸의 일부가 아닌 듯했다. 이 험준한 대숲 언덕을 몇 번이고 돌아 나의 몸은 지칠 대로 지쳤다. 하지만 정신만큼은 그 놈의 눈빛보다 더 또렷하다. 왼손으로 거친 대나무 숲을 헤치며 길을 만들어 전진했다. 얇은 대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라 인간에게 쉽게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자연은 자연의 일부가 된 그 놈의 편인 것 같았다.

동료의 소리가 멈춘 곳에 다다랐다. 사방을 고개 돌려보아도 그 놈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곳을 눈으로 살폈다. 내 발자국 옆으로 그 놈의 발자국이 보였다. 저쪽 둥지처럼 보이는 대숲 뭉텅이로 좁은 길이 나있는 걸 보니 틀림없이 그곳에 있다. 한 번도 방아쇠를 떠난 적이 없는 손가락이 떨려왔다. 왼손으로 총구를 잡고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손의 긴장을 풀었다. 이제 곧 그 놈이 보일 것이다. 대숲 뭉텅이 사이로 총구를 집어넣고 무릎 앉은 자세를 취했다. 조준자에 나의 오른 눈을 고정하고 그 은밀한 뭉텅이에 나의 시선도 슬그머니 옮겼다.

거친 들숨날숨이 느껴졌다. 지친 듯 몸을 웅크리고 있는 그 놈의 뒷다리가 보였다. 까맣고 털이 빳빳한 그 다리엔 대나무 잎사귀에 베인 상처들이 있었다. 마지막 한 발을 낭비할 순 없다. 나는 저놈의 목을 노려야 한다. 총구를 옆으로 옮겨 조준자로 목을 겨냥했다. 특전사에서 4년 동안 선배들한테 맞아가며 사격술을 익혔다. 지금을 위한 인내의 시간이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숨을 참고 바람을 느낀다. 이 순간 내겐 오른쪽 눈과 오른손 검지 손가락 두 마 디가 몸의 전부이다. 바람이 멈추자 이내 곧 세상이 멈춘다.

"탕"

총소리에 놀란 새들이 황급히 대나무 숲을 떠났다. 내가 쏜 마취총 주사기는 그 놈이 떠난 자리에 꽂혀 있었다. 결국 신은 자연의 손을 들어줬다. 인간은 또다시 엄숙한 수련의 자리로 돌아간다.

"아니 저것이 인쟈 거의 산돼지여 산돼지. 집 나가서 두 달 동안 밭에 고구마나 해쳐먹고 아이고 못살것네잉. 소방관 아저씨들 이리 와 박카스나 좀 드셔요."

신고자 아주머니께서 언덕 중앙 묘당에 둘러앉은 우리에게 박카스를 건네며 하소연을 하셨다.

"잘 먹겠습니다. 아이고 힘들다. 이건 뭐 돼지가 아니고 노루네 노루."

"근데 이거 못 잡아서 어떡한데요.. 점심식사는 저 옆에 식당에서 잡수시면 되는데"

"아뇨. 저희 소방서에 식사 준비돼 있어서 가봐야 해요. 이따가 식사하시고 출동 또 걸어주세요."

마취약도 다 떨어지고 돼지도 못 잡고 신고자 아주머니와 어색한 대화만 이어졌다.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모두 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근데 최반장 어디 있었던 거야? "

"반장님 어디 있다가 나온 거예요?"

"아니 형! 형은 왜 무전을 안 받아? 무전기 안 가져갔어? 소리쳐도 대답도 안 하고"

내 동기까지 성화다 아주.

"어? 어.. 나 무전기를 놓고 갔더라고."

내가 말했다.

"형은 도대체 혼자 어디서 뭐한 거야?"

"일했지! 그럼 내가 이 복장으로 커피 마시고 왔겠니? 봐봐 나 지금 무릎 까졌다고. 생각해보니 너 무릎 까진 사람한테 말을 함부로 하는 못된 아이구나! 왜 구조대는 마취총을 하나밖에 안 사줘가지고 사람 힘들게. 그리고 내가 호주 있을 때 악어농장에서 일을 한 건 맞는데 악어랑 돼지랑 뭔 상관이냐고. 야 나도 돼지 무서워 뱀 징그러. 정 답답하면 네가 마취총 쏘든가"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꾹 밀어 넣고 참았다. 숨 넘어가도록 뛰었는데도 못 잡아 억울한데 연락 안 된다고 답답해하는 동기에게 살짝 서운했다. 사실 지난밤에 본 영화가 '대호'였던 게 화근이었다. 마지막 장면까지 못 보고 잠들었는데, 최민식 배우님의 스피릿이 수면 중에 스며들었나 보다. 뭐랄까 그…고독한 사냥꾼들의 정신적 교감이랄까. 덕분에 요단강 구경했지 뭐.

아프리카에 있을 때만 해도 UN을 꿈꿨는데 이렇게 사냥꾼의 삶을 살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 하지 못했다. 이런 나를 보면 진짜 사람 앞날 모르는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때 난 정말로 진지하게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었는데 말이다. 내가 가진 것은 없지만 아프리카보다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했고 삶을 살아왔기에 이것들을 나누어야 공평해진다고 생각을 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자본이든 교육이든 척박한 땅에 흘러가야 인류가 가진 숙제가 하나 지워지지 않을까 했다. 그러면 조금 더 많이 웃는 세상이 되겠거니 하는 게 나의 믿음이었다.

난 나의 믿음을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 인류의 숙제보다 최 씨 가문 3대 독자의 숙제가 훨씬 더 심각하고 중대한 사안이란 걸 깨달았다. 주위에선 30 중반 넘도록 결혼 안 하고 있는 나를 보며 자꾸 비혼 주의냐, 부끄러운 거 아니니 괜찮다고 하는데 그런 거 아니다. 그냥 아직 못한 거다. 한국 돌아올 때 어머니께 금의환향 퍼포먼스는 못 해 드렸지만 한국에 취직 했고 남원에 정착도 했으니 하나씩 풀어가려 한다. 그래도 다행히 천직을 찾았다. 내가 가진 능력으로 시민들의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준다는 생각에 보람이란 걸 느끼며 산다. 20대에 꿈꿨던 아름다운 세상까진 아니어도 안전한 세상에 일조를 한 거면 그걸로 됐지 않나 위안을 삼는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각자 사정이 있어서 집을 나가는 거겠지만 다시 집으로 들이는 게 왜이리 힘든지 모르겠다. 옛말에 집 나가면 고생이란 말이 있는데 곰곰이 그동안의 사건들을 떠올려보니 집 나가면 모두가(뛰는 놈, 잡는 놈) 다 고생이란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집힐지 안 잡힐지도 모르는 동물 잡겠다고 마취총 들고 뛰어다니는 소방관들을 혹시 보게 된다면 고생한다 말 한마디라도 해주시길 바란다. 그들도 다 사연과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랍니다.

 

#인-잇 #인잇 #시골소방관심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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