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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우한 봉쇄 1년…우한에서 만난 한국인들

[월드리포트] 우한 봉쇄 1년…우한에서 만난 한국인들

김지성 기자 jisung@sbs.co.kr

작성 2021.01.08 09:46 수정 2021.01.08 10:52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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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우한에서 정체불명의 폐렴이 발생했다'고 국제 사회에 보고한 지 1년이 지났습니다. 정확히 언제, 어떻게 발병했는지는 아직도 제대로 규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코로나19'로 이름 붙여진 이 전염병이 전 세계를 전대미문의 상황에 빠뜨렸고, 올해 또 어떤 상황을 초래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발병 1년을 맞아 '진원지'로 알려진 우한을 직접 가봤습니다. 그곳에서 4명의 한국인들을 만났습니다. 당시 '공포의 도시'였던 우한을 지키거나, 우한에 남은 한국인들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분들입니다. 남다른 용기가 있었던 분들입니다. 이들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이런 상황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우한 교민들 상대로 '화상 진료소' 운영한 이상기 원장

김지성 취파용
성형외과 전문의인 이상기 원장은 지난해 1월 23일부터 76일 동안 우한이 봉쇄됐을 때 우한에 남아있던 유일한 한국인 의사였습니다. 당시 중국 SNS에는 병원에서 대기하다 쓰러져 실려가는 사람들의 영상 등이 올라왔고, 언론매체들은 매일같이 확진자와 사망자의 급증 소식을 전했다고 이 원장은 회상했습니다. 그 당시 우한의 확진자는 5만 명이 넘었고, 사망자는 3천869명에 달했습니다. 참고로 1월 7일 현재 중국 본토의 누적 확진자는 9만 7천여 명, 사망자는 4천795명입니다. 지금까지도 중국 본토 전체 확진자의 51%, 사망자의 80%가 당시 우한에서 발생했습니다.

이상기 원장은 당시 우한의 대형병원이 인산인해를 이루면서 병원에 가면 오히려 병을 얻는 상황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집에 격리돼 있다가도 의심 증상이 있으면 "잡혀갔고", '공기 중에 바이러스가 떠다닌다'와 같은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고 했습니다. 외국인 신분인 한국인들 입장에선 심리적 부담이 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원장은 "저도 인간인데 당연히 힘들었다"고 털어놨습니다. 세 차례에 걸쳐 정부 전세기가 우한 교민들을 태우고 떠날 때 자신도 짐을 싸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100여 명의 한국 교민들이 우한에 남는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의사가 한 명이라도 남아 교민들에게 심리적 안정을 주는 게 도리라고 느꼈다는 것입니다.

이 원장은 우한에 남은 교민들을 위해 '화상 진료소'를 열었습니다. SNS에 '한국 교민 임시진료소'라는 단체 대화방을 개설한 뒤 교민들이 증상을 호소하면, 화상전화를 통해 일일이 진료를 봐줬습니다. 다행히 일반 감기나 극심한 스트레스에서 오는 두통 등의 증상이었고, 실제 코로나 증상은 없었다고 전했습니다. 자칫 먼저 병원을 찾았다면 오히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병원에 갈 수 없다 보니 고혈압이나 당뇨와 같은 기저 질환을 앓고 있는 교민들의 약이 떨어졌던 것입니다. 이 원장은 한국의사협회에 부탁해 고혈압약과 당뇨병약을 전달받았고, 내친김에 독감 항바이러스제인 '타미플루'도 대량으로 공수해 교민들에게 나눠줬습니다. 우한에서 코로나19에 걸린 한국 교민은 없었습니다. 이 원장의 역할을 무시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 20대 나이에 교민 돕기 나선 정태일 전 한인회 사무국장

김지성 취파용
20대의 나이에 우한에 남아 교민을 도운 젊은이도 있습니다. 올해 29세인 정태일 당시 후베이성 한인회 사무국장.

정태일 씨는 지난해 1월 중국 정부가 전격적으로 우한을 봉쇄하면서 우한은 대혼란에 빠졌다고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우한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공항과 기차역이 모두 폐쇄된 데다 중국 공안이 도로까지 봉쇄하면서 대부분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우한에 있으면 바이러스에 감염돼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가 확산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교민들은 마음만 먹으면 정부 전세기로 우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상황. 왜 나가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정 씨는 "아무리 생각해도 우한 밖으로 나가는 건 아닌 것 같았다"고 답했습니다. 당시 우한에 있던 한인회 간부는 정 씨 한 명뿐이었는데, "그렇게 가버리면 남아있는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정 씨는 귀국을 종용하는 부모님을 설득하면서 우한총영사관과 협력해 교민 돕기에 나섰습니다. 우한에 몇 명의 교민이 있는지, 전세기로 귀국을 원하는 교민이 몇 명인지, 우한에 남은 교민들에게 필요한 물품은 뭐가 있는지 등을 파악하는 것은 고스란히 정 씨의 몫이었습니다.

정 씨는 "위기의 순간에 서로 힘을 모아 하나씩 극복해 나가는 모습을 현장에서 보게 됐다"며 "이게 한국인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 한국에서 고군분투한 최덕기 후베이성 한인회장

김지성 취파용
최덕기 후베이성 한인회장은 우한 봉쇄 때 우한에 없었습니다. 자의가 아니었습니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 지병 치료차 한국에 들어가 있었고, 우한 봉쇄 소식은 한국 병원에서 접해야 했습니다. 우한이 봉쇄되고 나서는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최 회장은 우한에 남은 교민을 돕기 위해 한국에서 백방으로 뛰었습니다. 청와대 담당자를 만나 필요한 물품과 요구사항을 전달했고, 우한의 상황을 알렸습니다. SNS를 통해 우한 교민들과도 교류했습니다. 코로나 사태 이전만 해도 300여 명 정도였던 단체 대화방 회원은 1천500여 명으로 늘었습니다. 이상기 원장이 화상 진료소를 개설하는 데도, 의약품을 우한으로 공수하는 데도 힘을 보탰습니다. 이 원장이 진료를 다 못 볼 때에는 최 회장이 한국에 있는 의사에게 물어 대신 회신해주기도 했습니다.

최덕기 회장의 역할은 특히 정부 전세기 추진 때 빛이 났습니다. 당시 중국 정부는 중국인들의 민심 동요를 우려해 전세기를 낮이 아닌 밤에 띄울 것을 요청했고, 중국인들은 자체적으로 자경단을 결성해 시민들의 이동을 막기 위한 바리케이드를 곳곳에 설치한 상태였습니다. 최 회장은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 지역별로 집결지를 정하고, 자원봉사자를 조직해 바리케이드를 통하지 않고 집결지로 모일 수 있는 루트를 사전 답사하게 했습니다. 총영사관이 제공한 버스를 집결지에 보내 교민들이 무사히 전세기에 탑승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1~2차 전세기 때 일부 교민들이 중국인 가족을 우한에 두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바람에 '이산가족'이 발생하자 3차 전세기를 띄울 수 있도록 최 회장이 앞장서 정부에 건의했습니다. 우한을 비롯한 후베이성의 교민 848명이 한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던 데에는 최 회장의 숨은 공로가 있었습니다.

최 회장은 공을 정부에 돌렸습니다. 한국 정부가 전세기를 띄우고 필요한 물품을 보내주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란 겁니다. 그는 "누가 나를 돌봐주고 있구나, 국가가 있구나 하는 것을 처음으로 피부로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 화물기 타고 우한으로 들어온 강승석 우한총영사

김지성 취파용
강승석 우한총영사는 우한 봉쇄가 한창이던 지난해 2월 20일 부임했습니다. 우한에 영사관이 있는 4개국 가운데 미국과 영국총영사관 직원들은 전원 우한을 떠나 본국으로 철수하던 상황이었는데, 강 총영사는 거꾸로 우한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봉쇄돼 있던 터라 여객기로는 입국이 불가능해 화물기를 타고 우한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화물기에는 한국 지방자치단체와 여러 단체에서 보낸 방역 물자 등도 함께 실려 있었습니다. 당시 우한총영사관에 근무 중인 영사는 강 총영사 외에 부총영사까지 모두 4명에 불과했습니다.

강 총영사는 "한국에서 우한의 심각한 상황을 접할 때는 심리적으로 위축된 부분이 있었지만, 영사들이 매일 출근하고 있었고 100여 명의 교민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부임하는 게 너무나 당연했다"고 심경을 밝혔습니다.

교민들은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어서, 필요한 식품과 물자, 의약품을 강 총영사와 영사들이 차에 싣고 가가호호 방문 전달했습니다. 멀게는 200km 떨어진 곳까지 방문했고, 교민들이 안전한지도 확인했습니다. 이상기 원장, 최덕기 한인회장, 정태일 사무국장 등과 함께 단체 대화방에서 교민들을 위로하고 서로 용기를 불어넣기도 했습니다.

봉쇄 이후 교민들의 경제활동을 지원하는 것은 총영사관의 남은 숙제입니다. 76일간의 봉쇄에 따른 여파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문을 닫아 식자재가 부패되거나 몇 달 만에 한국에서 돌아와 임대료와 인건비가 밀린 소상공인, 자영업자가 많다고 했습니다. 강 총영사는 "한국이나 중국 당국으로부터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4명 말고도 우한 봉쇄 당시 우한에서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은 한국인들은 더 있습니다. 이광호 당시 우한부총영사도 그중 한 명이지만 지금은 청두총영사로 자리를 옮겨 만나지 못했습니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베이징 특파원이라 중국에서 생활하다 보니, 한국의 방역 담당자들의 공로는 주로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됩니다. 한국의 방역 담당자들이야말로 최일선에서 분투하고 있음은 자명합니다. 각국의 상황이 공유돼 하루빨리 코로나가 극복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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