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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마스크 쓰세요"…마지막 히피의 마지막 앨범

Max | 뭐라도 써야지. 방송사 짬밥 좀 먹은 저널리스트, 프로듀서.

그분이 CBS 라디오에서 아침방송 DJ를 할 때만 해도 회사 근처라 종종 먼발치에서 뵙곤 했다. 물론 일방적인 관찰. 그분은 트레이드 마크인 호방한 너털웃음을 짓고 있을 때가 많았는데 때로 혼자 걸을 때보면 고독하고 무뚝뚝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래도 그분을 이따금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힘이 됐다. 조하문이 노래했던 것처럼(원곡은 이정선)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좋아~"의 느낌. 유명(有名)하고도 무명(無名)한 님, 그분은 내게 스타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런데 4년 전 그분, 한대수 선생은 홀연 뉴욕으로 떠나버렸다. 나는 슬펐다. (그가 자주 쓰는 표현. 그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요"라고 말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발음으로 심플하게 "썰퍼요"라고 말한다) 그가 이 땅을 떠나버렸다는 사실이. 한대수 선생은 생활의 예술가이자 일상의 철학자이고 무엇보다 밥을 위해 육체노동을 꺼려하지 않는 생.활.인.이다.

때로 노래는 시(詩)다. 노랫말이 산문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잘 쓴 가사에는 비유나 상징이 풍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들이 한국대중가요사에도 오선지의 음표처럼 박혀있다. 그 중에서도 한대수 선생의 노래는 특별히 빛난다. (그러고보니 밥 딜런은 노랫말로 노벨문학상까지 받았지 않은가! 한대수도 밥 딜런처럼 포크가수이다)

한대수 선생이 얼마 전 뉴욕에서 코로나를 뚫고 잠깐 돌아왔다. 45년 음악 인생 마지막 앨범이라고 선언한 15집 앨범을 내기 위해서다. 발매된 음반을 들어보니 포크와 포크 록은 물론 퓨전 재즈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Money Honey>까지 한대수 선생의 음악적 스펙트럼과 탤런트에 다시 놀라게 되는데 그중 <마스크를 쓰세요>는 그야말로 한대수다운 풍자와 블랙 유머의 한판이다. 시대상과 뉴스를 놓치지 않고 위트 있는 노랫말로 눙쳐낸다. (그런데 또 선생은 목소리가 시다. 노래에서 분리할 수 없다.)

'포크 거장' 한대수, 사진은 원춘호 작가 제공, 연합뉴스

사랑하자 미워하자 기도하고 집회해도
마스크를 쓰세요 마스크를 쓰세요

짜장면을 먹고 나서 스타벅스 가기 전에
마스크를 쓰세요 마스크를 쓰세요

사랑하다 들켰구나 마누라는 도망갔네 그래도
마스크를 쓰세요 마스크를 쓰세요

신랑신부 첫날밤에 실패하고 울기 전에
마스크를 쓰세요 마스크를 쓰세요

진달래꽃 개나리꽃 사진 찍고 기뻐할 때 그래도
마스크를 쓰세요 마스크를 쓰세요

너도나도 고소하자 재판장에 가기 전에
마스크를 꼭 쓰세요 마스크를 쓰세요

후진 국가 뉴욕에서 선진국가 서울 오니
마스크를 썼네요 역시 모두들 마스크를 썼네요
..... (중략)

여러분 마스크를 쓰세요 마스크를 쓰세요
마스크를 쓰세요 마스크를 쓰세요
Corona go away Corona go away


어려운 말 있는가? 못 알아듣는 말 있는가? (심지어 영어 마저도 쉽다) 그래서 유치한가? 놉. Here comes HahnDaeSoo again! 가사만 떼어놓고 보면 "이게 뭐야?" 싶을 수도 있지만 선생 특유의 목소리 색깔과 박자감, 리듬감과 함께 들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한번 들어보시길 권유한다.

내가 꼽는 한국 대중가요 가사의 최고봉은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라고 노래하는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그리고 "곱게 쓴 미사보 손때 묻은 묵주. 야윈 두 손 모아 엄만 어떤 기도를 드리고 계셨을까?"라고 읊조린 조동익 <동경> 앨범에 나오는 <엄마와 성당에> 같은 곡들이다. 이런 노래는 대중가요 가사일 뿐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격이 다르다. 거의 시적 경지. 그런데 한대수 선생의 가사는 섬세한 감정과 상황을 미려하게 서사(敍事)한 위 두 노랫말과는 다른, 솔직하고 직선적이며 야생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맛이 있다.

오래 전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는 다큐를 만들면서 한대수 선생의 <행복의 나라로>를 BGM으로 쓴 적이 있다. "장막을 걷어라"하며 한국 포크의 역사를 열어 제친 이 노래를 깔면서 편집을 하는데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심지어 '산들바람'과 '풀밭', '행복의 나라'가 나오는데도 말이다.

장막을 걷어라
나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 번 또 느껴보자

가벼운 풀밭 위로 나를 걷게 해주세
봄과 새들의 소리 듣고 싶소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 주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

(중략) 광야는 넓어요 하늘은 또 푸러요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같은 앨범에 실린 유명한 곡 <바람과 나>도 홀연히 여행을 할 때면 느닷없이 듣고 싶어지는 노래다.

끝. 끝없는 바람
저 험한 산 위로 나뭇잎 사이 불어 가는

아~ 자유의 바람
저 언덕 넘어 물결 같이 춤추던 님

무명. 무실. 무감한 님
나도 님과 같은 인생을 지녀 볼래. 지녀 볼래


이 곡들을 18살의 한대수가 만들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한대수 선생이 평생 만든 노랫말은 <사랑은 사랑, 인생은 인생-가사로 읽는 한대수의 음악과 삶>이란 책으로 나올 정도로 외따로 읽을 만 하다. 하나도 어려운 말이 없지만 다 듣고 나면 나는 누구인가 성찰하게 된다. 또 한대수 선생 노랫말의 매력은 약간씩 문법과 어법을 비껴간다는데 있다. 서울과 부산, 뉴욕을 넘나들며 살아와 맞춤법과 어휘에 약할 수 밖에 없나 하고 생각해본 적도 있지만 언어의 길과 틀을 슬쩍 허무는 쾌감이 한국 최초의 히피이자 최후의 히피스럽다.

불경스러운 말이지만 "마스크를 쓰세요"라고 노래하는 이 할배가 나는 너무나 귀엽다. 인생과 사랑을 쉬운 말, 돈오돈수(頓悟頓修)할 수 있는 말로 노래하고 그 어떤 트렌디한 가수보다 시대상을 잘 포착해낸다. 그리고 이를 예술로 승화해낸다. 15집이 마지막 음반이라니. 그리고 한대수의 은퇴 음반이 *박용택의 은퇴 경기만큼도 주목을 못 받다니. 박용택은 논란이라도 있었는데 하다못해 그 흔한 논란도 없다니. 썰프다.

(* 박용택 선수의 업적과 은퇴 경기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LG팬은 아니지만 멋진 선수라고 생각한다. 오해 없으시길)
 

※ 지난 2015년 손무현을 필두로 조영남, 전인권, 강산에, 신대철, 김도균, 김목경, 윤도현, 이상은, 이현도, 장기하, 호란 등이 한대수 선생의 1집 <멀고 먼 길> 발매 40주년 기념 '한대수 트리뷰트 콘서트'를 열었다. 이 공연을 관람한 뒤 당시 내가 진행하던 문화 팟캐스트 <목동살롱> 첫회 게스트로 모셨다. 녹음 시간을 잊어 버리 셔서 한시간 정도 늦으셨다. 신촌 오피스텔에서 주무셨다든가 암튼 그렇다. 그래도 약 1시간 반 동안 선생의 살아온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주셨다. 한대수 선생의 육성으로 듣고 싶으시다면 ▶http://asq.kr/EiE1De5kclP8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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