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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신중함' 택한 법관들, 이 싸움 속 생산적 논의는 가능할까

[취재파일] '신중함' 택한 법관들, 이 싸움 속 생산적 논의는 가능할까

원종진 기자 bell@sbs.co.kr

작성 2020.12.08 09:26 수정 2020.12.08 10:08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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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사찰 의혹 문건'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주 목요일. 서울중앙지법 508호 법정에 여느 때처럼 양복을 빼입은 백발의 노신사들이 들어와 피고인석에 앉았습니다. 한때 높은 법대에서 사람들을 굽어보던 이들은 그들이 내려다보던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몇 시간을 구부정히 앉아있었습니다. 인생에서 성취한 거의 모든 것들을 잃을 위기에 서 있는 이들은 사법부의 빛나는 자리에 올랐다 급전직하한 '사법농단' 사건 피고인들입니다. 이들에 대한 수사가 한창 이뤄질 때, 이들과 함께 검찰 조사를 받은 경험이 있는 한 판사는 "검찰이 이렇게 무지막지한 기관인 줄 수사받기 전엔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피고인석 반대편, 검사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보통의 재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세세한 재판 절차, 연이어 선고되는 사법행정권 남용 기소 법관들에 대한 무죄 판결. 수십 개월째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 공소 유지를 담당하고 있는 검사들은 재판 진행에 이의를 제기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을 땐 목소리를 높이다가도,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곤 합니다. '어차피 법원은 갑, 검찰은 을'. 공소 유지를 담당하고 있는 한 검사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지만 사명감으로 일한다"고 말합니다.

판사 사찰 의혹이 터진 상황 속, 당사자로 이 사태를 바라보고 있는 법원과 검찰 양 기관엔 이처럼 서로에 대한 상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법원
● "검찰은 어마무시한 기관"

전국법관대표회의를 앞두고 법원 내부망인 코트넷에는 몇몇 현직 판사들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일선 공판 부서도 아닌, 대검찰청이 판사 정보를 수집하고 공유한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수집된 정보들이 공소 유지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검찰이 판사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를 보이는 것이 온당한가', '이는 결국 재판의 독립성 침해로 귀결된다'는 의견 등이었습니다.

검찰의 문건 작성에 비판적인 일선 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이들은 여러 비판 지점들 중에서도 검찰 '조직'이 어떻게 이 문건을 만들고 관리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한 현직 판사는 "대법원장을 수사해 구속시키는 데 성공할 정도로 큰 힘을 갖고 있는 검찰 '조직'이 수사정보를 수집하는 계통으로 판사 정보에 접근했다는 데 상당히 위협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판사는 법원 조직에 큰 상처를 남긴 사법농단 수사의 이후를 이야기했습니다. "판사 사찰 의혹 문건 보도를 봤을 때 처음 들었던 생각은 '압수수색 자료를 활용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는 그는 "검찰이 압수수색 자료를 어떻게 관리하고 보관하는지 법관들이 모르는 상황 속, 판사 사찰 의혹이 터져 나오니 사법부의 일원으로 위협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격앙된 반응은 조금 잦아들었지만, 아직 검찰의 태도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는 법관들의 시각은 여전합니다. 추미애 장관의 행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라는 한 판사 또한 "검찰이 법관 정보를 무단 수집해놓고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는다는 추 장관 지적만큼은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검찰은 이 문건이 별 것 아니라고 하지만 그러기엔 문건을 생산한 검찰 조직은 별것 아닌 조직이 아니기에, 부적절하다는 사과 한마디 없는 검찰의 태도를 마음 편히 넘길 수만은 없다는 겁니다.

추미애, 검사들 요구 사실상 거부..윤석열 '불법 문건 아냐
● "검사는 판사님들에게 불이익 줄 수 없는 지위"

사상 초유의 총장 직무정지 사태를 맞은 검찰 구성원들은 사태가 불거진 초기, 매우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판사 사찰 의혹 문건'이 탄도미사일처럼 날아와 검찰 조직을 풍비박산 낸 도구로 사용됐기에, 자동 반사적인 방어태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측면도 큽니다.

의견을 표명한 검찰 구성원들은 해당 문건은 판사들에게 실질적 해악을 가할 수 없으며, 학생들이 교수님 출제경향을 파악하는 정도 차원에서 만든 거라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문건 작성자인 성상욱 부장검사가 검찰 내부망에 올린 글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대학생 선배가 후배에게 B교수의 출제경향을 알려주면 사찰인지요" 하고 되물으며 "검사는 판사님들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다"고 적었습니다. 차호동 검사 또한 내부망에 올린 글에서 "경찰이나 국정원이 법관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것과, 재판 당사자인 검찰이 법관 정보를 취합해 분석하는 건 논의의 차원이 다르다"고 주장했습니다. 윤 총장 측 이완규 변호사는 "해당 문건은 판사 인사를 앞두고 1회성으로 공개된 정보를 위주로 작성한 것이며, 판사들이 우려하는 지속적인 정보 수집은 없었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또 "물의야기 법관 리스트와 같은 정보들은 재판부-변호인-검사 간 합의에서 나온 말을 보고한 것일 뿐 법원 압수수색 자료를 정보 수집에 일절 활용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이에 더해 윤석열 총장 징계위가 미뤄져 법관대표회의에서 나올 판사들의 반응이 검찰 조직에 미칠 영향이 커지게 된 상황이 벌어지면서 검찰의 방어적인 자세는 계속됐습니다. 특히 야당인 국민의 힘 측에서 '민주당 김남국 의원이 판사들의 집단행동을 유도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뒤 한 검사는 "코트넷에 올라온 글을 글자 그대로 바라보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7일 열린 전국법관대표회의 (사진=연합뉴스)
● 추 장관 연이은 과속 사고 뒤…'신중함' 택한 법관들

재판과 관련해 만들어진 문건을 두고 첨예한 시각 차를 보이던 양 기관이 서로에게 말을 건넨 건 다름 아닌 법관의 재판을 통해서였습니다. 지난 1일, 윤석열 검찰총장 직무정지 집행정지 신청을 인용한 서울행정법원 조미연 판사는 결정문에 검찰의 공적 기능과 역할에 대해 적시했습니다. 조 판사는 결정문에서 '검찰총장이 법무부 장관 지휘·감독에 맹종할 경우 검사들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은 유지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행정법원 결정을 통해 복귀할 수 있게 된 윤석열 검찰총장은 일성으로 "이렇게 업무에 빨리 복귀할 수 있도록 신속한 결정을 내려주신 사법부에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습니다. 법원 결정문이 회람된 뒤 한 검사는 "결정문 구절에서 일종의 감동을 느꼈다"는 소감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판사 사찰 의혹 문건을 수단으로 윤석열 검찰총장을 찍어내기 위해 내달렸던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과속이 도리어 법원과 검찰 두 기관 구성원들 사이 일종의 접점을 찾아준 셈입니다.

어제 열린 법관대표회의도 '판사 사찰 의혹 문건' 관련 논의를 안건으로 상정했지만, 입장을 내지는 않기로 하는 신중함을 택했습니다. 일부 법관 대표들은 '검찰의 법관 정보 수집 주체가 부적절하고, 물의야기 법관 기재와 같이 비공개 정보도 수집돼 법관의 독립을 침해할 수 있다'는 점을 근거로 법관대표회의가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법관 대표들은 '서울행정법원에서 재판이 계속되는 상황 속 재판 독립을 지켜야 하고, 정치적 이용 또한 피해야 한다'는 반대 의견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공격과 역공, 숨 가쁘게 달려오던 국면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법관대표회의가 작은 쉼표를 찍은 모양새입니다. 관건은 이를 계기로 양 기관 구성원들이 이번 사태에 대해 좀 더 생산적 논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가게 문을 닫아야하고, 줄어든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파트타임 직업을 알아봐야 하는 사람들에게 이 법조 직역 엘리트들의 싸움에서 누가 이기고 말고 하는 것은 기실 별 의미가 없는 것들입니다. 중요한 건 사생결단의 전쟁이 돼버린 이 소용돌이 속, 그래도 발을 딛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사회가 무슨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느냐입니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부장판사는 검찰의 판사 정보 수집 논쟁은 엄밀히 말하면 사법 시스템 구조 전반에 대한 논의 차원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검찰은 미국의 사례를 들어 법관에 대한 정보를 자유롭게 수집 가능하다고 하는데, 그러면 대륙법계를 기반으로 영미식 법체계를 가미한 우리 법 체계에서 영미식 당사자주의 재판을 더 과감하게 도입하는 방향에 검찰이 동의할 수 있는지 논쟁해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최근 형사 사법체계가 변화일로에 서 있는 국면에서 이 논쟁을 통해 의미 있는 시사점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출신인 양홍석 변호사는 "국가기관의 프로파일링 문제, 검찰 조직의 정보 관리에 대해 검찰 조직이 스스로 성찰하고 시스템을 마련할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보 성향의 박경신 고려대 로스쿨 교수 또한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판사 사찰 의혹이 논란이 되고 있지만, 법관은 누구에게도 견제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는 취지의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아직 윤 총장 징계위가 남아있고 이에 대한 공정성 시비가 계속되는 상황, 여기서 생산적 의미를 찾고자 하는 건 한가한 상상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이 싸움의 부산물들이 정치적 이득을 챙기고자 하는 이들의 배를 불리는 데 온전히 이용되지 않으려면, 신중함을 유지하며 침묵하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이 시작한 싸움 속에서 다른 것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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