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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별 볼 일 없는 인생 같을 때, 이범수가 전하는 글

[인-잇] 별 볼 일 없는 인생 같을 때, 이범수가 전하는 글

이범수│ 영화배우

SBS 뉴스

작성 2020.12.05 11:04 수정 2020.12.07 15:47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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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육강식.

세상은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정글의 법칙 아래 모두가 최강을 추구한다는 것은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인생을 살아가며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수많은 인생 과목 중, 좋아하거나 승부를 걸어보겠다는 과목 한두 개 정도는 100점 도전을 해봄직 하겠지만, 어찌 인생 전 과목을 올백점을 맞을 수 있겠는가. 욕먹지 않을 정도, 나쁘지 않을 정도, 남들 하는 정도로 (어찌 보면 과제를 무사히 제출하는데 의미가 있는)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꽤나 벅차고 응원 받을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상과 달리, 현실의 우리는 인생의 승부를 건 주된 과목조차 100점에 도전한다고 100점을 보장받지는 못한다. 모든 게 가능하다며, 모든 게 가능해야 한다며 세상 물정 모르고 패기 넘치던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지만, 내 손에 쥐어진 것을 소중히 여기며 현실을 수용하는 지금의 내 모습에 감사하다.

남들만큼 열심히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러겠다 다짐하면서도 여전히 인생을 마주할 때면 정답을 찾지 못한다. 기가 막히게 좋은 패를 쥐고 태어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렇지 않다면 대부분은 그저 그런 별 볼일 없는 패를 쥐고 태어난다는 말인데, 그 와중에 우리는 최고를 꿈꿔야 하나, 아니면 우선 최저를 면하는 것부터 시도해야 하나.

내가 출연했던 영화 중에 위에서 말한 그런 부류의 사람을 이야기한 영화가 있다. 손에 쥐고 태어난 패가 별 볼일 없어서, 그래서 열심히 그 벽을 뛰어넘어보고자 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 아직도 많은 팬분들께서 은근하게 꾸준히 응원해 주시는 작품, 바로 '슈퍼스타 감사용'이다.

슈퍼스타 감사용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무엇보다 정이 갔던 건 주인공에 대한 묘사였다. 운동을 하기엔 작은 체구, 체계적인 시스템 아래 제대로 훈련받은 선수들과 달리 뒤늦게, 게다가 열악한 환경에서 운동을 시작한 그 사람. 일생에서 단 한 번이라도 1승을 해보고자 했던, 최고를 꿈꾸었던 것이 아니라 최저를 벗어나고자 최선의 노력을 쏟아 부었던 어느 선수의 이야기.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19살에 서울로 올라와 가진 것이라곤 몸뚱아리 하나와 의욕밖에 없었던 나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나 또한 감사용의 1승을 간절히 기대하며 촬영에 임했던 기억들이 남아있다.

영화 속 감사용은 마지막 경기마저 패하며 결국 1승도 거두지 못한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 어찌어찌하여 후에 1승을 거두었다고 소개를 할뿐이다. 비하인드 스토리지만 당시 제작사 대표님과 나는 감독에게 마지막 경기에서 감사용이 1승을 거두게 하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을 드렸다. 그토록 소망하던 1승을 손에 쥐어줌과 동시에 관객들에게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꼭 전해주고 싶었다. 어쩌면 감사용을 연기한 나부터 꼭 느껴보고 싶던 쾌감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감독의 뜻은 달랐다. 영화 후반에 승리를 거두는 뻔한 스토리보다, 언젠가 올릴 1승을 기대하며 계속 나아갈 감사용의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승리라는 것을 감독은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어했다. 감독의 깊은 뜻을 듣고 난 후 나를 포함한 모든 영화팀들이 감사용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던 듯하다. (특히 스포츠 영화의 생동감을 고스란히 전하고자 최선을 다하던 김영호 촬영 감독의 모습 또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슈퍼스타 감사용
진심이 전해져서 였을까. 지금도 많은 팬들이 영화 엔딩이 충격적이지만 그래서 더 깊은 여운을 느끼고 감사용의 잔상이 마음에 남는다는 평을 전한다.

우리는 인생의 경기에서 몇 전 몇 승 몇 패의 성적으로 생을 마감하게 될까. 자기가 잘하는 과목은 물론 전체 과목에서 말이다. 야구에서 타자가 3할의 성적이면 강타자라고 한다. 10타수 3안타.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에 10타수, 10번의 기회는 보장이 되는 걸까. 첫 번째 병살타. 두 번째 삼진 아웃인 타자는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 최고를 꿈꾸고 싶지만 최저부터 벗어나야 한다. 1천 명 중에 최고는 한두 명이다.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은 값지고 영광스럽기에 두고두고 빛난다. 너무나 멋진 일이다. 하지만 나머지 수백 명은 최고가 아니다. 노력을 덜 했을 수도 있고 운이 따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손에 쥐고 있는 패가 시작부터 달랐기 때문이라면? (경기의 룰은 공정하겠지만) 같은 노력, 더한 노력을 했지만 애초에 출발선이 달랐다면?

그래서 1등은 겸손해야 하고, 이런 약점을 뛰어넘은 1등은 당당히 축하받아야한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출발선부터 달라 최고가 아닌 최저를 면하고자 사력을 다하는 많은 사람들을 존중하고 응원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슈퍼스타 감사용' 크랭크인 즈음 박민규 작가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책이 한때 붐이었다. 마침 영화 촬영을 앞둔 시점이라 한 번 읽어보고자 구입했지만 영화 속 인물 성격과 스토리가 달랐기에 자칫 캐릭터에 혼선을 불러일으킬까 염려된다는 감독의 우려로 읽지 않았었다. 그렇게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지난여름 10여 년 만에 꺼내 읽었다. 하필이면 만년 꼴찌 슈퍼스타즈의 팬클럽이 되어 어린 시절부터 인생의 쓴맛을 경험해야 하는 주인공의 슬픈(?) 이야기가 배꼽 빠지도록 유쾌하게 그려진 이 책 역시 뻔한 승리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보다 인생에서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고 있어 반가웠다. 또한 이 책을 읽기까지 이사도 여러 번 다녔는데 용케 떨어지지 않고 책장에 붙어있는 모습이 오래전 내 모습처럼 느껴졌기 때문일까 괜히 고맙고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우리는 오늘도 투수가 되어 인생의 공을 힘껏 던진다. 우리는 과연 1승을 했었던가. 그것은 진정한 1승이었을까. 아니면 1승과 무관하게 열심히 공을 던진 우리는 이미 최고일까.

오늘도 그저 말없이 힘껏 공을 던진다. 그게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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