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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위기는 기회'…영원한 청년의사의 대찬 인생

[그, 사람] '위기는 기회'…영원한 청년의사의 대찬 인생

바벨탑을 쌓는 사람- 이왕준

윤춘호(논설위원) 기자 spring84@sbs.co.kr

작성 2020.12.05 08:36 수정 2020.12.08 13:25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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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길 위에 작은 집을 짓겠다던 사람이다. 바람 거센 고단한 길 위에 작은 집 하나 짓겠다던 사람이다. 누구라도 와도 쉬어갈 수 있는 꿈의 공동체를 만들겠다던 사람이다. 나의 집이 아니라 우리의 집을 짓겠다고 맨손으로 달려들었던 사람이다. 세상 모든 근심 다 감당할 수는 없어도 병들어 서러운 마음만은 없게 하겠다고 지금도 다짐하는 사람이다.

그랬던 이 사람이 지금 바벨탑을 쌓고 있다. 하나의 왕국을 넘어 제국을 개척하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이 사람에게 주목하는 것은 이 사람의 성취가 남달리 크거나 이 사람의 왕국이 유난히 화려해서만은 아니다. 길 위의 작은 집, 꿈의 공동체를 말하던 사람이 자신의 왕국, 자신의 제국을 지향하게 된 연유를 알아보기 위함이다. 그의 생각 중 어떤 부분이 변했는지, 변했다면 왜 변했는지, 어떤 생각이 새로 생겨났는지 어떤 부분이 더욱 굳어졌는지 명지병원 이왕준 이사장에게 들어보고 싶었다.

[그, 사람] 이왕준
2. 코로나19와 관련된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WHO가 전 세계 유행을 선언할 것이라는 말은 날짜까지 맞췄고 날이 더워진다고 코로나 기세가 수그러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코로나와의 싸움은 내년까지 갈 장기전이 될 것이라며 코로나 상황을 뉴노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11월 중순이면 다시 한번 유행이 올 거라는 그의 지난 8월 예측은 요즘 500명을 오르내리는 확진자 수로 입증되고 있다.

"아직 클라이맥스는 오지도 않았어요. 5막 오페라 중에 이제 3막 정도라고 보면 됩니다. 올 겨울이 코로나 싸움의 절정이 될 겁니다."

사람들이 그의 말에 주목한 것은 그의 예측이 정확한 것도 있지만 그가 코로나와의 싸움에 최일선에 서있기 때문이다. 명지병원은 코로나 발생 직후 국내병원으로는 처음으로 비상 상황실을 설치했고 지난 1월 코로나 3호 확진자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00여 명이 넘는 환자를 받았다. 명지병원 코로나 입원 환자 수는 국립의료원에 이어 두 번째다. 이 병원의 코로나 환자 치명률은 25%나 된다. 그만큼 중증 환자를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병원은 지금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지고 전사자가 속출하는 실제 전투를 치르고 있는 최전선이다. 명지병원은 병원 건물 한 동 전체를 코로나 전담 치료 시설로 사용하고 있다. 코로나 거북선으로 불리는 병동은 건물 전체가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된다. 환자들이 있는 2층과 4층은 외부와의 접촉이 완전 금지된 봉쇄 수도원 같은 인상이었다. 폐쇄회로 화면으로 살펴본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들은 영락없이 중무장한 병사들의 모습 그 자체였다. 이왕준은 이 코로나 전쟁의 최일선 지휘관이었다.

하루에도 두세차례씩 음압격리병상 찾아 환자 상태를 살피고 의료진을 격려하는 이왕준 이사장
거칠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거침이 없다고 해야 할까. 지난달 25일 김밥을 먹으면서 학생 운동 시절 이야기를 해 나가던 중에 그가 전화를 받았다. 제천 명지병원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는 보고 전화였다. 보고를 듣는 그의 자세는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는 의료법인 이사장의 모습 그대로였다. 전화 상대방은 병원장으로 보였는데 반말과 존댓말이 반반쯤 섞인 그의 어투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훈계하고 지시하고 질책하고 가르치는 자세였다. 그의 지시는 단호했다. 당신은 코로나19에 대해 잘 모르니 지금부터 지휘 라인에서 빠지고 그 일을 잘 아는 사람에게 결정권을 넘기라는 것이었다. 병원장과 통화를 마친 뒤 두 대의 핸드폰을 이용해 다른 관계자들에게 문자를 보내고 통화를 하며 구체적인 대책을 지시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병원과 관련된 모든 자료가 입력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를 불러야 할지, 그 사람을 어디로 보내서 무슨 일을 시켜야 할지 그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전화로 불러낸 병원 관계자에게 지금 곧바로 제천으로 갈 것을 지시하면서 당국의 조치는 이러이러하게 진행될 터이니 당신은 거기에 맞춰서 이러이러하게 대응하라고 지침을 줬다. 그는 여기서 자칫 잘못 대응해서 병원이 몇 주 문을 닫으면 병원 직원 한 달 월급이 날아갈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라고 했다.

그런 비상 상황이었는데 그는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고 누구의 조언을 구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있음직한 대책회의 소집 지시도, 담당자나 담당 부서가 누구인지 묻는 일도 없었다. 누구를 오라 가라 하지도 않았다. 곧바로 판단해서 곧바로 지시하고 곧바로 지시 내용을 실행에 옮기도록 했다. 하다못해 제천에 내려갈 차량 수배까지도 직접 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코로나19 전문가이기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이겠지만 다른 상황에서도 그의 이런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왕준 이사장의 청년 의사 시절
3. 아버지가 전주에서 유명한 의사였으니 집안이 유복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학교 기숙사를 거쳐 방 한 칸 얻어 자취를 하거나 하숙을 할 때 그는 여의도에 부모님이 마련해준 아파트에서 살았다. 학생 운동에 몰두하는 바람에 9년 만에 의대를 졸업하고 남들보다 몇 년 늦게 전문의 자격을 땄지만 그는 실업자 신세였다. 가기로 내정되어 있던 병원이 갑자기 문을 닫는 바람에 오갈 데 없는 처지였다. 운동권 핵심 인물이었고 전문의가 되기 전에 <청년의사>라는 언론사를 만들었으니 그는 이미 의료계에서는 유명 인사였지만 그를 같이 일하는 동료, 부하로 받아 들이려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던 모양이다. 궁지에 몰렸을 때 그는 더 크게 도전을 했다. IMF를 맞아 부도 위기에 빠진 진로 기업 소유의 인천 세광병원을 인수하기로 한 것이다. 개업을 한 적도 없고 페이 닥터로 일한 적도 없다. 집안이 넉넉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200병상의 병원을 통째로 인수할 재력은 없었다. 34살 이왕준은 사실상 맨주먹 빈손이었다. 무슨 자신감이 있어 이런 모험을 했을까.

1998년 인천사랑병원 개원식에서 의료진과 함께.
"송영길 선배 소개로 그 병원 노조원들 만나 컨설팅을 해줬어요. 이러저러한 말끝에 노조사람들이 당신이 맡아서 한 번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는데 어느 순간 한번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남들과 다르게 하면 성공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부모님에게 받은 2억 원에 아파트 담보 등으로 인수 대금의 일부를 마련했고 나머지는 부채를 떠안는 조건이었다. 채권채무 관계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고 병원은 1년 동안 문을 닫고 있는 상황이라 환자는 단 한 명도 없었고 병원 장비는 낡아서 장부 가격이 0원이었다. 희망이 없는 도전에 그의 후배들 8명이 동참했다. 학생운동 시절 그의 리더십을 믿은 것인지 아니면 <청년의사>를 만들 때 그가 보여준 돌파력과 추진력을 본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때 그의 무모한 도전에는 그의 동지들도 함께 했다.

인천사랑병원 시절은 여러모로 주목할 만하다. 그가 성공의 신화를 쓰기 시작한 시점이고 의료 문화를 획기적으로 바꾸겠다던 그의 청년 시절 꿈이 구체화된 시절이었다. 동시에 의료 운동가 이왕준이 병원 사업가 이왕준으로 변신한 시절이기도 하다. 그 시절을 꼼꼼히 살펴보면 그의 오늘을 알 수 있고 80년대 청년 혁명가들이 어떻게 변화해가는지를 볼 수 있다.

인천사랑병원 경영은 참신했다. 교통사고 환자를 데려오는 기사들에게 세탁비라는 이름으로 뒷돈을 주던 관행을 거부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인천사랑병원에 환자를 데려오지 않던 기사들이 정작 자기 가족들이 아플 때면 이 병원으로 왔다. 양심적이고 투명한 병원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생긴 일이었다

[그, 사람] 이왕준
"병원이 사회적 가치를 공유하면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사회적 신뢰가 뿌리내리면 굉장히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확인했습니다."

그는 인천사랑병원을 시작하면서 꿈의 공동체를 만들겠다고 했다. 노동자, 여성, 노인, 어린이 등 어렵고 힘든 사회적 약자에게 열린 병원이 되고자 노력했다. 불법 체류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의료 공제회가 이 병원을 기반으로 해서 처음 시작됐다. 민간병원에서는 처음으로 사회복지사를 정식으로 채용하고 의료사회사업실을 만들었다. 지역 주민과 환자를 위해 매주 각종 공연을 비롯한 문화 행사를 열었다. 개원 초기 100일 동안 병원에서 먹고 자고 명절에는 당직을 자원했다. 병원 직원 중 가장 적은 미화원 월급과 같은 80만 원만 받겠다고 선언했다. 사회적 가치 실현과 병원의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쫓겠다는 그의 목표는 성공적이었다. 병원 인수 3년 만에 모든 부채를 갚았다. 남들이 기적이라고 했다.

병원을 개원하기 전 병원가(歌)를 만들었다. 돈도 없고 경력도 없고 장비도 변변치 않으니 노래라도 부르면서 힘을 모으자는 취지였다. 친분이 있던 노혜경 시인에게 '헌신, 사랑, 봉사 같은 상투적인 말들이 들어가지 않은 가사를 써달라고 부탁했고 이건용 교수에게는 캠핑 가서 기타 치며 부를 수 있는 곡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병원가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세상의 걱정 근심 우리가 다 감당할 수 없지만 아파서 서러운 사람 없게 하리라" 이 노래를 이왕준은 무척 좋아했던지 병원 직원들을 상대로 상금 500만 원을 걸고 이 노래를 지정곡으로 하는 슈퍼스타-M이라는 노래 경연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 노래가 청년 의사 이왕준의 병원에 대한 꿈과 이상을 담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4. 그는 동지이자 후배들과 뜻을 함께 하고 행동도 같이 했지만 권한과 책임을 같이 나누지는 않았다. 그는 책임도 혼자 지고 권한도 혼자 행사하였다.

"같은 팀이고 동업자인 것은 맞는데 그 친구들이 돈을 낸 것은 아닙니다. 기획, 재무, 행정 등 100%를 제가 다 했어요. 그 친구들이 몸으로 노력 봉사한 것은 맞는데 재정적인 것은 내가 다 책임졌습니다. 어설픈 동업은 분열로 끝난다는 것을 너무나 많은 사례에서 봤어요. 초창기에는 의기투합할 수 있지만 나중에는 분열로 끝났습니다. 예외가 없어요…현명한 철인 정치가 맞지 여러 사람이 모여 민주적으로 한다고 꼭 결과가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꿈의 공동체는 언젠가부터 이왕준 왕국으로 변해갔다. 병원 성공에서 그의 기여가 절대적이었지만 그의 독주에 대한 반발 역시 만만치 않았다. 개원 4년 차에 벌어진 노사갈등이 단적인 예이다. 27일 간 파업이 벌어졌고 노조원들은 거세게 저항했다. 병원장실은 붉은 스프레이로 쓴 그에 대한 온갖 험한 욕설과 낙서로 난장판이 되었다. 그는 아수라장이 된 병원에서 100일 넘게 먹고 자면서 노조와 맞섰다. 그는 노조에 양보할 생각도 없었고 기세에서 밀리지도 않았다.

"(노조에서는) 서울대 나온 범생이에 부잣집 아들이니 자기들이 세게 개기면 제가 도망갈 거라고 생각한 거지요. 그러니까 그런 짓을 한 거지요."

만주노총까지 나서 그를 비난하고 나섰고 그의 분노지수는 극한까지 치솟았다. 약자들을 위해서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왕준에게 노조와의 극한 대립은 그의 인생에서 중대한 분기점이 된다. 노조는 약자들의 모임이고 그래서 노조의 주장은 곧 정의라는 단순한 셈법은 더 이상 그에게 맞는 말이 아니었다. 노조가 약자만은 아니고 설사 약자일지라도 약자의 주장이 꼭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체득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우리의 정체성이 처음에 뭘 하겠다며 내세운 가치와 캐치프레이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시련과 도전을 받고 거기에서 살아남으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정립해온 거 같습니다."

그는 노조 문제, 노동 운동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극히 조심스러워했다. 명지병원에 노조가 없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그의 얼굴에서 곤혹스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명지병원에는 노조가 원래부터 없었습니다." 라고 답했다.

[그, 사람] 이왕준
4. 그는 학생 운동에서 배운 것이 많다고 했다. 그중에 하나는 어려울 때일수록 더 세게 나가라는 것이다. 1986년 5월 서울대 구국학생연맹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이왕준은 그해 12월 1심에서 집행 유예로 석방되었다. 다른 동료들이 대부분 실형을 산 것에 비하면 고생을 덜 한 셈이었다. 부모님이 이리저리 힘을 쓰셨고 초기에 붙잡혀 드러난 혐의가 적기도 했지만 어쨌든 남보다 일찍 나온 것이 좀 미안했다. 그가 석방되고 한 달이 안돼 서울대 후배 박종철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 숨지는 사건이 터졌다. 거기는 이왕준이 조사를 받았던 곳이었다. 당시 대한변협이 고문 관련 공청회를 열었고 이왕준의 변호를 맡았던 홍성우 변호사가 이왕준에게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 받은 내용을 공청회에 나와 증언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왕준은 홍성우 변호사의 부탁을 받고 20초쯤 고민했다고 했다. 독재 정권이 말기적 증상을 보이던 시절에 집행유예로 풀려난 지 불과 한 달이 안된 운동권 학생이 고문 관련 공청회에서 공개 증언을 하는 것은 다시 구속을 자청하는 일이었다. 그는 못하겠다는 말을 못 했다. 알겠습니다. 몇 시 어디로 가면 됩니까 라고 묻고 홍성우 변호사와의 전화를 끊었다.

공청회장으로 들어가는데 그렇게 많은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기는 처음이었다. 연이어 터지는 셔터 소리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이 때 생각했단다. '내가 여기에서 증언을 하고 살아남는 방법은 세게 증언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그는 자신이 고문을 당한 상황을 '쎄게' 그리고 '정확하게' 증언을 했다. 물고문을 받았고 고문 참여 경관은 두 명이 아니고 다섯 명이었고 물고문은 두 명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증언을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고 김근태 의원 부인 인재근 씨와 유시민 작가의 누나 유시춘 씨가 자신을 굳이 불러 밥을 사주더란다. 나중에 생각하니 이제 이왕준이 다시 구속될 텐데 우리가 그래도 따뜻한 밥 한 끼는 사줘서 보내야 되는 것 아니냐 싶어 그런 것 같다며 이왕준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의 말대로 '쎄게' 증언을 해서 신문에 대서특필 되어서인지 형사들이 거의 24시간 밀착 감시를 하긴 했지만 구속되지는 않았다.

[그, 사람] 이왕준
5. 인천사랑병원을 인수할 때 사람들이 도대체 개인 병원도 경영한 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큰 병원을 경영할 수 있겠느냐고 할 때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병원 경영을 어깨너머로 보면 자랐습니다. 의사가 한 명인 병원과 열 명인 병원이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에게는 숫자가 열 배가 되는 것은 문제가 아닌 것이다. 외형이 커진다고 조직 운영의 본질이 달라질 것은 없다고 본다. 이 사람이 인천사랑병원에 이어 그보다 덩치가 몇 배는 큰 명지병원을 인수하겠다고 도전한 이유다. 명지병원은 너무나 헐값에 나왔고 이것을 안 잡아야 할 이유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200병상을 가진 병원이 600병상의 대형 병원을 인수하는 것을 두고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는 말이 나왔다. 명지병원 인수는 인천사랑병원 인수 때와는 차원이 다른 모험이었고 그의 능력이 다시 한번 빛나는 대목이었다. 명지병원을 인수한 후 그는 환자 제일주의를 내세우며 이 병원을 지역 응급 의료의 거점으로 키웠다. 병원 공간 혁신을 통해 분위기를 일신하는 것은 물론 사람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 병원에서 5년 동안 근무하고 지난 4월 국회 입성에 성공한 신현영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사람을 뽑을 때 출신, 배경, 조건을 보지 않으세요. 저는 명지병원 면접 볼 때 임신 5개월이었어요. 몇 달 후면 육아 부담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저를 뽑더라고요. 저를 뽑아줘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이 사람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역량을 보고, 우리 병원에 꼭 필요한 사람인지를 꿰뚫어 보고 사람을 선택하더라고요."

[그, 사람] 이왕준
무엇보다 이 병원을 감염병 대처의 메카로 키우겠다는 그의 전략이 적중했다. 2009년 신종플루가 터졌을 때 그는 주춤거리지 않고 2만 명이 넘는 환자를 치료했고 2015년 메르스 사태가 터졌을 때도 명지병원이 가장 먼저 나섰다. 2012년에는 민간병원으로는 처음으로 공공의료 사업단을 만들었다. 사회가 아플 때 병원이 자기 이익이나 따져서야 되겠느냐며 의료기관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하는 그의 태도는 그의 이름과 명지 병원을 우리사회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성과는 금방 나타났다. 병원을 인수한 지 6개월 만에 병원 인수 중도금 140억 원을 갚았다.

"제가 2015년 명지병원에 들어갈 때와 2020년 나올 때를 비교해보면 병원 위상이 많이 올라갔고 평판도 달라졌지요. 감염병 시대를 미리 대비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한 덕분이라고 봅니다. 민간병원이 공공 의료 영역을 맡는다는 게 쉽지 않은데 그 점에서 평가받을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신현영 더불어 민주당 의원

이왕준은 명지병원 법인 이사 8명 가운데 6명을 임명할 권리를 갖고 있으니 그는 이 병원 그룹의 제왕적 존재다. 종합병원 3곳, 요양병원 1곳, 요양원 한 곳, 직원 3천 명이 있는 대형 의료 법인의 소유주다. 명지병원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그의 매년 신년사 동영상을 보면 그의 1인 체제가 얼마나 확고한 지 바로 느낄 수 있다. 신년사를 읽는 그의 모습은 자신만만하고 압도적이고 전제적이다. 화면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가 신년사를 읽을 때 딴짓하는 참석자는 절대 없을 거 같다.

명지병원 인수 이후에 이왕준의 모습은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병원 사업가의 모습에 더 가까워진다. 공동체 의료, 병원의 책무성, 공공 의료를 강조하는 그의 모습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방점은 성장, 경쟁력 같은 데로 옮겨갔다. 병원 수지와 성장에 관한 수치가 수시로 등장하고 꿈의 공동체라는 말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명지병원 인수 이후 그의 모습은 길 위의 집을 짓는 낭만주의자의 모습이 아니라 거대한 바벨탑을 쌓는 야망가의 모습이다. 인천사랑병원 시절에는 그래도 흔적이라도 남아있던 우리들의 공동체 이미지는 명지 병원 그룹으로 도약한 뒤에는 이왕준의 왕국, 이왕준의 바벨탑 이미지로 바뀐다.

[그, 사람] 이왕준
-'꿈의 공동체'라는 말은 명지병원에서 이제 더 이상 들리지는 않는 거 같습니다.

"병원이 성장하고 커지면서 그 말을 함부로 내세우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작은 단위에서는 충분히 공동체적 단일성, 공감을 기본으로 해갈 수 있지만 조직이 커지면 그 말이 설득력을 잃게 되는 거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부모 밑에 있을 때는 가족으로 1차원적인 관계를 공유할 수 있지만 성장해서 자기 가정을 꾸리면 과거 같은 초기의 결속력을 갖고 가기 어려운 것이지요. 신입직원들에게 병원의 역사를 설명할 때는 그 말을 이야기하지만 그 지향이나 슬로건을 지금은 내세우지는 않습니다."

6. 여기까지만 말하면 고난을 극복한 한 천재의 성공 스토리 같지만 그의 성공의 이면을 뒤집어 보면 사실 실패의 연속이다. 실패를 성공으로 겨우겨우 가리고 있는 듯한 면도 있다. 허공에 외줄 하나 걸치고 천길 낭떠러지를 건너는 듯한 위태로움이 그에게서 느껴지기도 한다. 재능과 열정이라는 외줄 하나로 말이다.

그가 학생 운동으로 구속돼 재판을 받을 때 그의 부친은 반성문은 쓰지 않아도 좋으니 최후 진술에서 선처해주면 학교로 돌아가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하라고 부탁했다. 그는 그런 말씀 하시려면 면회도 오시지 말라고 했다. 이왕준은 의사가 될 생각도 없었고 그 시절 의사가 될 가능성도 없었다. 대검차장 조남관은 그의 고교 시절 절친이다. 학생 운동을 하던 두 사람이 이런 말을 주고 받았다. '내가 의사 되는 것과 네가 사법고시 합격하는 것 중에 무엇이 빠를지 내기하자.' 그런 말을 하면서 두 사람이 크게 웃었다. 그 때는 두 사람 모두 의사나 검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겨우 의대로 복학하긴 했지만 그는 서울대 인턴 과정에 들어가지 못해서 1년 동안 시골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젊은 청춘을 보내기도 했다. 전문의 자격을 따고서도 갈 데가 없어 몇 개월을 방황했다. 노동자를 위해 살고자 했던 그가 악덕기업주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필생의 소원이고 바벨탑의 완성이라고 생각했던 대학 병원 인수에 실패했다. 관동대는 떠나 보내야 했고 3년 넘게 공을 들였던 서남대 인수는 60억이 넘는 법적 분쟁만 남겼다.

사실 지금도 한 발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처지다. 100억 원이 넘는 돈을 투자해 야심 차게 인수한 바이오 회사는 관리종목으로 지정돼 거래 중지된 상태다. 거래 중지된 직후 그는 이 회사의 대표이사를 맡아 다시 한 번 벼랑 끝 승부를 펼치는 중이다. 내년 3월 최종 심사를 앞두고 있는데 상장폐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태다. 명지병원은 비교적 안정궤도에 올랐다지만 치열한 경쟁에서 승자로 남을 수 있을지 누구도 장담할 처지가 아니다. 원래 가진 것 없이 출발해서 늘 돈에 허덕인다고 했다. 언제나 돈에 대한 걱정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라고 했다.

이런 처지인데도 끝없이 뻗어 나가려는 노력, 더 높이 바벨탑을 쌓으려는 적나라한 야망을 그는 숨기지 않는다. 계속 달리지 않으면, 여기서 멈추면 쓰러지고 만다는 것을 그는 머리보다 가슴 속으로 먼저 터득한 듯싶다. 좀 안정됐다 싶으면 새롭게, 더 크게 일을 벌인다. 일을 벌일 때 그는 안전판 같은 것을 남겨두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싸운다. 집한 채를 빼면 부동산 같은 거 없고 자식들에게 물려주려고 따로 챙겨 놓은 재산도 없다고 했다. 남들은 이제 그만하라고 한다는데 그는 좀처럼 그 말을 듣지 않는다. 그의 이런 스타일이 앞으로 달라질 거 같지 않다. 그의 모습을 보면 반 집 승부를 즐기는 프로기사 같은 느낌이 난다. 요행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도박꾼은 아니다. 마지막 한 수까지 치밀하게 계산해서 반 집의 승리를 쟁취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승부는 마지막 수를 놓을 때까지 승패를 알 수 없는 피 말리는 싸움이다.

그는 자신의 성공 스토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했다. 앞으로 2-3년, 늦어도 2025년쯤에는 지금과는 다른 차원의 성공 스토리를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는 야심가의 면모를 숨기지 않는다. 그가 이런 말을 할 때 경이롭기도 하고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7. 1988년 의대에 복학한 뒤에도 그는 학생 운동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숙이 관여했다. 본인은 오프를 요구했지만 굳이 그 요청을 지킬 일은 아닌 듯싶다. 전두환 이순자 체포 결사대, 전대협 통일 운동에서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세상을 정치적으로 보는 것이 훈련된 사람이고 정치권에 폭 넓은 인맥도 있으니 정치에 대한 관심이 없을 리 없다. 성공한 전문가이지 내놓을 만한 경력의 386 운동권 출신이니 여당은 물론 야당에서도 그를 찾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보궐 선거를 비롯해 4차례 제안이 있었는데 모두 거절했다고 했다. 그를 잘 아는 그의 지인은 정치권에 뛰어들 타이밍을 놓쳤다고 표현했다. 거의 적수공권으로 인천사랑병원과 명지 병원을 인수하고 정상화 시키느라 정치권에 들어갈 형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앞으로도 정치와는 담을 쌓고 살 것이라고 볼 이유는 없을 것이다. 아니 언제 해도 정치를 하겠다고 덤비지 않을까 하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다. 이왕 할 거 학생 운동도 주변부가 아니라 주류에 가서 하겠다며 자연대나 의대가 아닌 사회대 언더 서클을 찾아간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니 몇 백 병상 병원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거기에 만족할 리 없는 사람이다.

그를 두 번 만났다. 11월 25일 명지병원 이사장실에서 약 3시간 만났고 지난 28일 SBS 사옥에서 5시간 남짓 모두 8시간 넘게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첫 번째는 약간 독선적으로 보였는데 두 번째 만나니 그와의 대화가 즐거웠다. 유쾌하고 친화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끊임 없이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토해냈다. 직설적이고 말을 돌려 하지 않았다. 말이 너무 길어져 중간에 말을 끊으려고 해도 그는 자기 할 말은 끝까지 했다. 물러설 줄 모르는 탱크 같은 느낌, 성공에 익숙해진 완고한 군주 같기도 했는데 예전에 비하면 성질이 순해졌다고 했다. 자기가 아니라 조직을 위해 이제는 얼마든지 비겁해질 수 있다며 크게 웃기도 했다. 젊었을 때는 머리의 속도를 말이 따라가지 못해 중간중간 논리가 튀기 일쑤였고 목청도 높아서 자기가 말을 하면 남들이 도대체 저놈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하는 눈빛이었는데 요즘은 머리회전이 예전에 비하면 1.2배 정도라서 논리의 비약은 없다며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졌다고 했다. 당신의 자리가 높고 권한이 커져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는데 그는 별로 동의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 사람] 이왕준
자기 재능에 대한 자랑을 하지 않았다. 1990대 공전의 히트를 쳤던 드라마 <종합병원>의 기본 밑그림을 이 사람이 그렸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다. 기본 플롯과 주요 인물의 캐릭터가 이 사람의 머리에서 나왔다. 말은 다소 장황하지만 글은 간결하고 잘 읽힌다. 적이 많을 스타일인데 그의 주변 사람들 평은 의외로 칭찬 일색이다. 마치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좋은 이야기만 해서 듣는 사람이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독선적이고 목소리가 크고 일을 열면 좀처럼 말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이라 남에게 거부감을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인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이해관계들이 있어 그러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 사람은 운이 좋다는 말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아니 그의 입에서 운이 좋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달리 말하면 그는 자신의 성공이 운이 좋아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남들보다 더 노력하고 남들보다 더 독하게 버텨서 이 자리에 왔다는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했고 거저 얻은 게 단 하나도 없다고 했다. 명지병원 신년사에서 그는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하버드대학에서 성공한 사람들에 대해 연구를 했더니 재능이나 성적 아이큐 이런 것은 성공과 거의 관련이 없고 체육관 러닝머신에서 1분 1초라도 더 버텼던 사람들이 성공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성공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는 뜻이다.

내가 주역이 되면 세상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그리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할 때, 세상이 변한 줄로 알았는데 그리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때, 아버지의 나이가 되니 진료실에서 평생을 보낸 아버지의 삶이 이해가 된다는 말을 할 때 이왕준은 나이 들어 보였다. 코로나 이후야 말로 진정한 21세기의 시작이라며 병원을 플랫폼으로 한 새로운 기회를 이야기할 때, 바이오 혁명에 대해서라면 6시간을 말해도 부족하다고 말할 때 그는 여전히 청년이고 혁명가였다. 5년 전 그는 병원 관계자들에게 IT 신기술과 바이오 산업을 기반으로 한 바이오 메디컬 비즈니스를 준비하자고 말했다. 그의 동료들이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기술이 있습니까, 사람이 있습니까, 인프라가 있습니까? 우리는 아무 것도 없잖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합니까." 이왕준이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전략과 병원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전략이란 말은 이왕준이란 말로 바꿔서 생각해야 한다. 남들이 돈, 인력, 기술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이왕준이 없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8. 그의 바벨탑이 모래 위에 쌓은 것은 아니다. 위태로울 때도 있겠으나 그의 바벨탑이 쉽게 무너질 거 같지도 않다. 신기루 같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탑 그 자체의 무게로 무너질 것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말은 질시이거나 험담으로 들린다. 그는 지금의 바벨탑을 쌓을 만한 능력이 있고 그 거대한 탑을 쌓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면서 살아왔다. 그의 성취를 평가하는데 인색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이런 질문에 대해 그는 앞으로도 계속 답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당신의 성공으로 이 세상은 얼마나 나아졌습니까. 당신의 바벨탑 안에 병들어 슬프고 서러운 사람이 깃들 공간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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