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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북적] 특이한 랜선 여행을 떠난다면?…'먹는 인간'

[북적북적] 특이한 랜선 여행을 떠난다면?…'먹는 인간'


[골룸] 북적북적 265 : 특이한 랜선 여행을 떠난다면?…[먹는 인간]

"가는 곳마다 먹는 인간이 있고 지금 그 음식을 먹는 데는 넘치도록 충분한 이유가 있으며, 먹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을 둘러싸고 알려지지 않은 드라마가 펼쳐진다… 오감에 의존해 먹다라는 인간의 필수 불가결한 영역에 숨어들어 보면 도대체 어떤 광경이 펼쳐질까?"

올해는 많은 즐거움 중에서도 특히 여행이란 게 아련해진 특이한 해입니다. 저는 먹는 것과, 여행을 꽤 좋아하는데 책도 그런 류를 즐길 때가 많은데요, 가을의 중턱을 지나 이제 겨울에 가까워진 이때 독특한 '랜선 여행'의 재미를 느껴볼 만한 책이 이번 북적북적의 선택입니다. 일본의 저널리스트 헨미 요가 쓴 <먹는 인간>입니다.

헨미 요는 일본 교도통신 기자였고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세계를 여행하면서 칼럼을 연재했으며, 그 칼럼들을 기반으로 1994년 이 책을 출간했습니다. 와, 세계 여행하면서 칼럼을 썼다니 부러워... 하는 마음이 안 들었던 건 아니지만, 거의 30년이 다 됐네 오래됐구나... 생각이 안 든 것도 아니지만, 그런 마음을 전부 뛰어넘은 내용이었다고 할까요. 저처럼 90년대 학창 시절을 주로 보내셨던 분들이라면 그리 멀게 느껴지진 않을 것 같은데 보스니아 내전이나 유로화 이전의 마르크라든가 이런 화폐가 나오는 걸 보니 세월이 꽤 흘렀네 싶긴 하네요.

작가는 '먹는 인간'이라는 책 제목과 같은 주제를 가지고 15개 나라를 여행합니다. 아시아에서는 방글라데시, 베트남, 필리핀, 타이, 한국. 유럽에선 독일, 폴란드,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아프리카에서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우간다… 미주와 오세아니아는 안 갔지만 세계 일주에 버금가죠. 당시 일본은 고도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할 만한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반면 작가가 다닌 나라들은 대개 전쟁이나 제국주의 침탈, 빈곤, 그 외 분쟁 등을 극심하게 겪었거나 그 한복판에 놓여 있는 곳들이 많습니다. 관광이 발달한 나라도 당시로서는 별로 없고요. 일부러 골라 간 거겠죠.

"하지만 이상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먹는다는 것이 삶과 죽음으로 직결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를 나는 요 며칠 사이에 다카에서 확인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사람도 가끔 짐승과 똑같이 '먹이를 먹는다'. 돈이 많은 사람은 우아한 모습으로 먹이를 먹을 뿐이다. 먹다 남은 음식을 먹는 사람, 대량 수입한 음식을 먹고 남기는 사람. 음식의 신이 있다면 틀림없이 전자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후자에게는 언젠가 배고픔과 목마름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하지 않을까?"


첫 여행지인 방글라데시, 여기서 작가는 먹다 남은 음식이, 어쩌면 쓰레기라 불러야 할 것이 은밀하게 수거돼 상품이 되고 빈민들의 양식이 되는 충격적인 상황을 목도합니다. 직전에 떠나온 모국 일본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상황에 삶과 죽음에 대해 명상하죠. 방글라데시는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이미지가 바뀐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이 나라를 첫 행선지로 택한 이유는 그래서일까요? 서쪽으로 나아가는 여행에서 가장 가까워서인 것도 같고요.

"갑자기 신비하고 묘한 표정을 짓더니 주전자 속 커피를 이가 빠진 찻잔에 천천히 따랐다. 할아버지의 피부색과 같은 그것을 머뭇머뭇 한 모금 마신 나는 깜짝 놀랐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부드럽고 순수한 모카의 맛이다... 흙이 섞인 강물로 끓인 걸작 커피다. 마치 마법 같다. 두 잔을 더 마셨다."


"버터로 할까요? 소금으로 할까요?... 들여다보니 기름이 물보다 가벼워서 커피의 위아래로 녹은 버터와 커피가 완벽하게 두 층을 이루고 있다. 당연히 버터를 먼저 마시지 않으면 커피에는 영원히 다다를 수 없다. 꿀꺽 마셨다. 물론 처음에는 버터 맛이, 그다음에는 모카 맛이 났다. 둘이 맞닿은 부분은 아무래도 맛이 좋지 않았다. 생선회에 얹은 버터 같다고나 할까, 무척 복잡한 맛이었다."


한때 유행했던 '방탄 커피'를 20여 년 전 유명 커피콩 산지인 에티오피아의 시골 마을에서 먼저 맛보다니! 어찌 보면 비참해 보이는 현지인들의 삶과, 매일 손쉽고도 값싸게 지구 반대편에서 커피를 즐겨 마시는 저의 일상이 겹쳐지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커피 맛처럼 쌉쌀하고 신맛이 나네요.

"끌려가던 중에 오사카의 포장마차에서 먹은 '우동'이라고 할머니가 답했다. 멸치 육수 맛을 잊을 수가 없어. 빨간 어묵이었는데, 정말 맛있었어. 귀국한 뒤에 그 맛을 내려고 만들어 봤지만 아무리 해도 그 맛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날 할머니는 100만의 지옥 같은 기억과 100만 분의 1의 기분 좋은 기억을 남김없이 식칼로 없애 버리려고 했구나."

"그녀는 대구의 야학에서 일본인 선생에게 배운 야스쿠니의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잘 불러서 두 번 불렀다. '단팥소가 든 떡'을 두 개 받았다. 큰 찹쌀떡이었는지, 설날 먹는 찰떡이었는지 내가 물었다. 모른다고 했다. 하나를 다른 소녀 둘과 나눠 먹고, 하나는 남겨 두기로 했다. 그런데 그때 금지되어 있던 한국말을 무심코 해 버렸다. 그것 때문에 화가 난 군인이 입에서 떡을 뱉으라고 명령했고, 떡을 뱉자 군화로 짓밟아 버렸다."


놀랍게도 작가의 마지막 여행지는 바로 옆 나라, 가깝고도 먼 한국이었습니다. 청학동 유생을 만나고 재일교포 한국인 야구 선수를 만난 뒤 마지막에 만난 이들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19944년 출간된 책을 2020년에 읽으면서 올해 화제의 인물이기도 했던 그, '이용수'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잠깐 반가웠고 못내 입맛이 썼습니다.

[먹는 인간]은 우리 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식'을 통해 삶을 들여다본 책입니다. 풍요롭고 모두가 행복한 나라보다는 그렇지 않은 곳을 주로 골라 다녔습니다. 크로아티아를 방문했을 때는 아드리아 해에서 어선에 타 막 잡아 올린 정어리를 회쳐먹는 장면이라든가, 폴란드 탄광에서 종일 숨이 턱턱 막히는 곳에서 일하고는 함께 먹었던 보그라치 수프의 맛 같은 건 뚝 떼어다 여행 서적에 실어도 좋겠다 싶을 만큼 생생하기도 합니다. 그것도 삶이니까요.

'저널리즘과 문학이 아름답게 결합된 명저'라는 평가가 아깝지 않고 고단샤 논픽션상 수상이라는 타이틀은 조금 아쉽습니다. 26년이 흘렀으니 지금의 세상은 당시보다 조금은 나아졌을 것이란, 근거 희박한 기대도 하면서 언젠가 여행을 다시 맘껏 하게 되면 이런 것들도 기억하자, 하면서 다소 특이한 랜선 여행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출판사 메멘토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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