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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진보의 금기를 깨는 진보주의자, 김종철

[그, 사람] 진보의 금기를 깨는 진보주의자, 김종철

윤춘호(논설위원) 기자 spring84@sbs.co.kr

작성 2020.11.07 11:01 수정 2020.11.07 13:43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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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거에서 7번 떨어졌다. 당선권에 근접한 적도 없다. 정치적 스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좋은 날을 보지 못하고 떠난 동지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집에 십 원 한 장 가져다주지 못했다. 많을 때라야 기껏 몇 십만 원을 활동비로 받으며 십 수년을 살았다. 그러고도 웃음을 잃진 않았다. 정치를 포기할지언정 유머는 포기하지 못한다고 했다. 남들은 이미 30년 전에 버린 신념과 가치를 우직하게 붙잡고 있다. 불쌍한 사람들 많아서 그 신념 버리지 못한다. 남들 걱정할 것 없이 당신이나 잘 살면 된다는 말이 격려가 아닌 야유로 들리는데 그 말 들어도 웃는다.

눈물 많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 상처 받을까 봐 마음껏 울지도 못했다. 노회찬, 박은지, 오재영 등 먼저 간 동지들의 상가에서나 눈물을 쏟았다. 우파들의 나라에서 좌파의 가치를 지키며 사는 일의 고단함을 그런 자리에서 통곡으로 씻어냈다. 남편을 사랑해도 너무 사랑하는 아내가 당신이 운동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 잘 아니 내가 당신을 포기하겠다고 할 때도 그는 돌아서서 혼자 눈물을 훔쳤다.

20년 넘게 정치를 하면서 그는 비례대표를 기웃거리지 않았다. 죽어도 지역구에서 죽겠다는 게 그의 당찬 각오였다. 그랬던 그가 올 초 지역구를 포기하고 비례대표에 출마했다. 비례대표 출마는 초조와 불안의 표현이었다.

"제가 120살까지 살 수 있다면 지역구에 나갔을 겁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잖아요. 제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이번에는 어떻게든 국회의원 배지를 달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의당 김종철 (취재파일용)
정의당 비례대표 경선에서 37명의 후보 중 20위를 차지했다. 우여곡절 끝에 최종 순번은 16번으로 결정되었지만 당선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비례대표 앞 순번은 영입인사들의 몫이었다. 박용진은 김종철에 대한 정의당의 대접이 이거밖에 안 되느냐며 당장 때려치우라고 했다. 기대가 컸으니 실망도 컸을 테고 상처도 깊었을 것인데 그는 집에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때 저는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본인은 당내 분위기를 잘 알고 있을 테니 어느 정도 실망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제게도 그런 것을 내비치는 성격이 아니라서요." / 정혜정 김종철 부인

정의당 선대위원회 수석 대변인으로 21대 총선 승리를 위해 애썼지만 결과는 실망 그 자체였다. 지역구 한 석 포함해서 모두 6석,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채택되면 적어도 15석, 잘하면 20석 이상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기대는 무산됐다.

당대표 출마는 벼랑 끝에 몰린 김종철의 정치적 승부수였다. 비례대표 경선에서 20등이었던 그가 당대표로 당선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정의당의 정파 구조에서 그는 소수파였고 원외라는 한계도 무시할 수 없었다.

도대체 그의 인생에서 이겨본 경험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그는 인생의 고비마다 패배했다. 대학 입시에서 고배를 마셨고 대학 학생회장 선거에서 떨어졌고 공직선거도 고배의 연속이었다. 선거에서 이긴 것이라고는 이번 당대표 선거가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1차 예선에서 1등 했을 때도 결선에서 되겠나 싶었어요. 당선 소식 듣고 이게 꿈인가 싶었습니다." / 정혜정-김종철 부인

20년 넘는 정치 인생에서 사실상 첫 승리를 얻은 기쁨을 표현하는 데 그는 인색했다. 당선이 확정되고 30초 정도 아내가 기뻐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좋았다는 게 전부였다. 승리의 진솔한 소감은 정혜정의 입을 빌리는 게 낫다.

"지금은 남편의 모든 게 예뻐요. 한 번 승리를 맛보게 해 줘서 너무 고맙고요."

정의당 김종철 (취재파일용)
2. 재수를 하지 않고 처음 지망한 대로 천문학과에 합격했다면 이 사람 인생은 달라졌을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을 좋아하고 지금도 천체물리학에 관심이 있지만 그가 운동권 학생이 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두 형이 운동권이었고 그는 형들의 영향을 받아 이미 고등학교 시절에 '의식화'된 학생이었다. 철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장남과 차남의 일을 겪으면서 논어를 보던 사람에서 마르크스를 읽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으니 그가 1990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하자마자 신나게 학생운동에 빠져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1990년대 초반 학생운동은 그 격렬함이나 대중성에서 80년대에 못지않았다. 정치권의 보수 3당 합당은 학생운동에 불쏘시개 역할을 했고 민주화되었다는 세상에서 대낮에 학생이 경찰에 맞아 죽은 강경대 군 사건은 젊은 가슴에 불을 질렀다. 1991년 봄, 열 명이 넘는 학생과 노동자가 스스로 분신하거나 투신하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보수 정권에 저항했다. 이때 시위대 규모는 모였다 하면 몇 만이었고 이 시위대의 한가운데 김종철이 있었다. 경제학과 학생회장에 이어 사회대 학생회장을 맡았고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섰지만 낙선했다.

그가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주도한 1990년대 초반 학생운동은 결과적으로 처절한 패배였다. 그는 '엄청난 좌절'이었다고 표현했다. 거리에 나서 화염병을 던지고 구호를 외치고 심지어는 '죽음의 굿판'이라는 말을 들어가면서까지 온 몸으로 저항했지만 세상은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민자당은 재집권에 성공했고 동구 사회주의는 백기를 들었다. 가진 사람은 더 많이 갖고 없는 사람들은 더 가난해졌다. 모든 힘을 다해서 공격을 펼쳤지만 그 공격은 먹히지 않았고 나가떨어진 것은 학생운동이었다.

뭐가 잘못되었을까. 왜 우리는 패배했을까. 사회주의는 왜 이렇게 몰락하는 것일까. 진지하게 묻고 치열하게 반성하고 대담하게 변화를 구해야 할 대목이었다.

"내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인가를 넘어 내가 이 일을 왜 시작했지?라는 질문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386세대는 민주화, 광주 학살 진상 규명과 처벌, 직선제 쟁취라는 시대적 과제가 해소되니 운동을 떠났습니다. 사회주의 이론이 맞지 않는다고 좌절한 사람도 있었지만 저는 이론 때문에 운동을 한 게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부부가 아이를 방에 두고 방문을 잠근 채 출근했다가 불이 나서 아이가 희생되고 시위 중에 숨진 노동자의 시신이 경찰에 의해 탈취되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IMF 사태가 터지니 노동자가 먼저 직장을 잃고 자영업자들이 죽어 나가더라고요. 저는 이런 현실이 있는 한 운동을 멈춰야 될 이유가 없다고 봤습니다."

정의당 김종철 (취재파일용)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포기하거나 다른 길을 찾아 나섰지만 김종철은 돌아서지 않았다. 오히려 운동 속으로 한 발 더 들어갔고 운동을 아예 평생의 업으로 삼기로 했다. 1999년 권영길 국민승리21 후보의 수행비서를 하는 것으로 진보정당에 첫발을 내디뎠다.

3. 당대표 취임 일성이 화제가 됐다. 정의당이 내놓는 의제에 대해 거대 양당이 입장을 내놓는 시대가 올 것이라며 두 당은 긴장하라고 경고했다. 두 당의 싸움에서 정의당은 심판 역할이나 하던 현실에서 벗어나겠다고 했다. 댓글만 다는 정당이 아니라 본문을 쓰는 정당이 되겠다는 것이다.
정책으로 승부를 보려면 철학과 논리만이 아니라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진보의 금기를 깨겠다는 그의 선언이 그것을 말해 준다. 서민 증세를 포함한 보편 증세, 연금 개혁은 물론 노동 유연성 문제도 논의할 수 있다는 그의 제안은 정치권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제안을 다른 사람이 아닌 정의당 대표가 했기 때문이었다. 정의당의 핵심 지지 세력인 전교조와 전국 공무원 노동조합의 반발이 예상되는 사안이지만 그는 금단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서민들이 적게라도 세금을 내야 부유층에게 더 많은 세금을 요구할 수 있고 그래야 없는 사람들이 더 많은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있고 현재의 연금 제도 역시 이대로 계속 가져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주장은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진보 진영도 더 큰 책임을 공유하자는 제안인 동시에 집권 세력의 무책임한 자세를 지적하려는 말이기도 하다.

지난달 27일 국회 본관 정의당 대표실에서 김종철을 만났다. 그가 이스타 항공 노조를 응원하는 차원에서 일일 동조 단식을 하는 날이었다. 그 전날 고 노회찬 의원 노모 상가를 늦게까지 지켰고 아침에 이어 점심까지 걸렀지만 피곤한 기색은 찾기 어려웠다. 그날도 4건의 언론 인터뷰를 포함해 10건 가까운 일정을 소화하는 중이었다. 그는 인터뷰에 앞서 이스타 항공 노조원들에게 보내는 영상 메시지를 녹화했다. 원고도 없이 한 번의 NG도 내지 않고 녹화를 마친 그에게 이스타 항공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 회사의 대량 실업 사태와 관련해 문제의 원인과 해법을 두고 노와 사의 입장이 다를 뿐 아니라 직종에 따라 직원들의 입장도 서로 다르지 않습니까?
"모든 사안이 그렇듯이 이스타 항공 문제도 노조를 포함해서 어느 한쪽의 말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정의당 입장에서는 가장 약자인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세상사가 정의와 불의, 선과 악으로 선명하게 나뉘는 것은 아니고 노사문제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당연한 말인데 그가 말하니 신선하게 들렸다. 그는 인권문제만 빼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했다

정의당 김종철 (취재파일용)
지난 8월 코로나 확진자 동선과 관련해 은평구청이 보수 유튜버 주옥순 씨 실명을 공개해 논란이 벌어졌다. 당시 정의당 대변인이었던 김종철은 실명 공개는 주옥순 씨에 대한 명백한 인권 침해라는 논평을 냈다. 극우 인사 한 사람의 인권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정의당이 논평까지 냈느냐는 말이 나왔지만 김종철은 인권 문제만큼은 좌우도, 진보와 보수의 구별도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주식투자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안 한단다.

-진보 정치인은 주식 같은 거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불로소득은 적은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부동산도 마찬가지고요. (경제학과 출신이라) 제 주변 친구들은 다 그런 것을 하는데 그런 것에는 손을 대지 않는 게 좋다고 봅니다."

그는 목적이 선하고 고귀하다고 해서 모든 수단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때로는 덜 악한 방법으로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정치 아닌가요. 정치는 윤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모든 대답에 0.5초쯤 틈을 두고 대답하던 그가 이 대목에서는 잠시의 틈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윤리 없는 정치가 뭐가 되겠습니까."

4. 한 사람의 삶은 다른 사람과의 대비를 통해 더 뚜렷하게 보인다. 김종철은 정의당 대표 첫행보로 고 노회찬 의원 묘소를 찾았다. 지난달 26일 노회찬 의원 노모가 작고했을 때는 이틀 연속 상가를 지켰다. 노회찬과 김종철은 2004년 민주노동당 선거대책본부장과 선대위 대변인으로 처음 만났다. 2004년 총선은 진보정당에게 잊을 수 없는 승리의 추억이다. 두 자릿수 득표율에 10명의 의원을 배출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여러 차례 인연을 맺었다. 서울 동작을 선거에서 경쟁자로 만난 적도 있지만 곧 화해했고 믿음은 더 굳건해졌다. 정의당 원내대표였던 고 노회찬 의원이 지난 2018년 비극적인 선택을 했을 때 김종철은 그의 비서실장이었다. 존경하는 선배이자 동지의 비극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과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세력들에 대한 분노가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었다.

"(노대표님 죽음과 관련해)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다가 어느 순간 가슴 저 안쪽에서 뜨거운 울분이 치밀어 오르면 잘 가라앉지를 않습니다."-2019 한겨레 21 인터뷰 중

정의당 김종철 (취재파일용)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타계했을 때 정의당이 내놓은 논평에 고인을 추모한다는 말은 단 한 줄이다. 나머지는 '정경유착' '초법적 경영' '어두운 역사' '재벌 개혁'이라는 단어로 채워졌다. 의례적이나마 한국 경제에 기여한 고인의 공적 한 두 가지라도 언급할 법도 하건만 그런 단어나 내용은 전혀 없다.

- 고 이건희 회장 타계 대변인 논평은 김 대표와 사전에 상의한 거겠지요?
"제가 조의는 짧게 하고 지적할 것은 정확하고 냉정하게 짚자고 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의 공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반도체 산업의 가치를 일찍 알아보고 그 산업이 국민을 먹여 살리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권력자들이 죽었을 때 공적 중심으로 그들의 삶을 평가하는 것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감정도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노회찬 의원께서 삼성 관련 폭로 건 때문에 의원직을 잃었고 그 뒤에 정말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때 드루킹 일당이 접근했고 그 때문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이라서 삼성이 노 대표님 죽음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요. 그걸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가 기억하는 노회찬은 내면을 좀처럼 알 수 없는 사람, 다른 사람들의 말을 조용히 들어주던 사람, 결정을 내리면 그 결정에 책임을 지던 사람, 지인들과 음식을 나눌 때 가장 크게 웃던 사람, 무엇보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방송사 기자가 드루킹 스캔들과 관련해 다소 무례하게 질문을 해서 대표님이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화를 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이 못내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입니다. 나중에 들으니 그 기자에게 전화를 해서 사과를 했다고 하더군요."

그런 노회찬의 모습을 닮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 자타공인 노회찬의 최측근이었던 그는 고인의 유지를 잇는 동시에 '노회찬의 진보'를 넘어서려는 의지를 숨기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진보 진영의 금기를 깨겠다는 말에 그런 뜻도 담겨 있는 거 아닌가.

정의당 김종철 (취재파일용)
5. 오후에 문자를 남겼더니 박용진이 밤 10시가 다 돼 전화를 걸어왔다. 취기가 묻어나는 그의 목소리는 힘이 넘쳤고 여유가 흘렀다.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이런 건가 싶었다. 고 이건희 회장 장례식장을 찾은 사람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 가운데 박용진이 있었다. 대표적인 삼성 저격수인 그가 이건희 장례식장을 찾은 것 자체가 뉴스였고 그를 맞는 맏상주 이재용 부회장의 태도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치인 박용진의 위상이 거기에서 새삼 확인되었다.

김종철 인생에서 단 한 명의 동지를 꼽아야 한다면 그 사람은 박용진이다. 두 사람은 1990년대 초반 '대장정'이라는 학생 운동 조직을 만들 때부터 인연을 맺었다. 민주노동당 창당의 실무 주역이었고 권영길 대선 후보의 보좌관, 민주노동당 대변인 자리를 주고받으며 한 길을 걸었다. 진보진영의 차세대 쌍두마차라 불렸고 진보진영 내 서울시장 후보 자리를 두고 경쟁을 펼친 라이벌이기도 했다.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는 것보다 진보적인 가치를 현실에서 실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박용진이 2010년 진보신당을 탈당해 현재 여당으로 말을 갈아탄 이후에도 두 사람의 우정은 변함이 없다. 깊이 신뢰하고 중요한 결정을 할 때면 서로 조언을 구하고 가끔 부부동반으로 만난다. 그런 그에게 김종철이 어떤 사람인지 물었다.

"똑똑하고 무엇보다 구김살이 없는 사람입니다. 남을 존중하는 것으로 남으로부터 존중을 받는 사람이지요."

박용진은 자신의 친구가 원내 3당의 대표가 된 것을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했다.

"70을 바라보는 여당 대표, 80대 야당 비대위원장 사이에 50대 진보정당 대표가 서있다는 것만으로 묘한 긴장감을 주는 거죠. 관록은 있지만 활력과 열정을 보여주지 못하는 두 사람 사이에 김종철이 서있다는 것만으로 시대의 전환을 상징하는 것이죠."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사진=연합뉴스)
단점이 없는지 물었더니 박용진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운동권 주류 마인드가 그의 단점입니다. 운동권에서 주류 일지 모르지만 세상 전체로 보면 그의 생각은 소수 마인드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결단하지 못하는 것도 약점입니다. 이번에도 심상정이 대표를 한 번 더 하겠다고 했으면 김종철은 경선에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겁 없이 도전하고 깨면서 판을 만드는 쪽이라면 종철이는 판이 만들어지면 움직이는 쪽입니다."

김종철은 한 때 박용진을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했다. 묻지도 않았지만 물었더라도 김종철이 박용진의 단점을 말했을 거 같지는 않다. 각자의 영역을 만들어 나가는 친구이자 동지라고 했는데 만약 두 사람이 다시 경쟁을 펼치는 상황이 마련된다면 그것은 분명 한국 정치의 발전으로 여겨질 것이다.

6. 화면에서 보는 모습과 실제 모습이 사뭇 달랐다. SBS 출연자 대기실에서 잠깐 본 정의당 류호정 의원은 아이돌 스타 같은 인상이었다. 단병호, 노회찬, 심상정을 진보정당의 얼굴로 알고 지내온 사람들에게 저런 얼굴을 한 청년이 정의당 간판이라는 사실은 다소 혼란스러운 일일 수 있겠다.

당대표로서 김종철의 목표는 당 지지율을 두 자릿수로 올리는 것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결국 당 소속 의원들의 활약에 기댈 수밖에 없다. 국정감사 스타로 떠오른 류호정은 그런 점에서 김종철에게 고마운 동지다.

류호정에게 김종철 대표가 어떤 사람이냐고 문자를 보냈더니 전화가 왔다.

"손 닿을 수 있는 곳에 계시는 선배라고 할 수 있어요. 심상정 대표님 같은 분들도 언제든지 편하게 전화하라고 하시지만 저희들이 그분들에게 그러기는 아무래도 좀 어렵잖아요. 그런데 김종철 대표님은 궁금한 것이 있으면 편하게 물어볼 수 있고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지도 물어볼 수 있는 그런 선배지요."

정의당 류호정 의원 (사진=연합뉴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22살, 류호정 입장에서 보면 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은데 그런 거 못 느낀다고 했다.

"대표님 SNS 대문 글이 '마지막 발언권은 항상 상대방에게'라고 돼 있는 것처럼 저희들 말을 잘 들어주시죠. 후배들 앉혀 놓고 자기 이야기만 한없이 쏟아내는 꼰대가 아니시거든요."

-김 대표는 자신의 재치와 유머가 후배들을 사로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만…
"재미있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재밌어요. 항상 고민하시면서 유머를 구사하시는데 그 과정을 보는 것 자체가 즐겁습니다. 결과물이 재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대답하고 류호정은 한참을 까르르 웃었다. 수시로 정의당 강령을 꺼내 읽는다는 28살 청년당원은 50살 당대표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일상적이고 쉬운 언어로 진보 정치를 국민들에게 알렸으면 좋겠어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정의당은 운동권 정당, '전태일 평전' 정도는 읽어야 들어올 수 있는 정당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사회적 약자들의 정당이니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우리를 알렸으면 좋겠습니다."

21대 총선에서 정의당이 영입한 인사들의 면면과 비례대표 공천을 보면서 노동자, 농민, 빈민들의 정당이 청년, 여성, 진보 명사들의 당으로 변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실망감을 표시하며 당을 떠나는 사람들까지 나왔다. SNS 댓글을 보면 정의당에 대한 차가운 시선이 이 정도일까 싶은데 김종철의 어깨가 무거운 것은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노회찬과 류호정을 잇는 가교 역할을 맡은 이가 김종철이다. 노회찬과 류호정으로 상징되는 세대와 계층, 세계관 사이에 갭이 있다면 그 차이를 메꾸는 일도 김종철의 몫일 텐데 그 일이 쉬워 보이지 않는다.

정의당 김종철 (취재파일용)
7. 남편이 집에 십 원 한 장 갖다 주지 못하니 가계는 오롯이 부인의 몫이었다. 보험회사 직원, 옷가게, 냉면집을 하면서 부인 정혜정이 살림을 꾸려갔다. 두 사람은 김종철이 병역특례로 일하던 '나눔기술'에서 만났다. 부인이 두 살 연상이다. 젊은 청춘들은 어찌어찌해서 눈이 맞았고 한 이불을 덮고 살기로 약속했고 1998년 5월 결혼했다. 장인은 월남전 참전 용사다. 빨갱이 소리 듣던 사위가 처음부터 왈칵 환영 받았던 것은 아닌 듯싶다.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정혜정은 둘째 아이를 원했지만 이들 형편에 둘째는 언감생심이었다. 살기가 어려워 둘째를 갖지 못했다는 대목에서 정혜정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매달 대출금을 갚아야 될 때마다 정혜정은 피폐해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몇 차례나 죽고 싶었고 때려치우고 싶었고 진지하게 김종철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김종철은 이야기를 묵묵히 듣는 것으로 아내를 달랬다는데 그때 김종철의 얼굴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 애잔한 마음이 든다. 내년이면 전세 만기가 되는데 다락 같이 치솟은 전셋값을 어떻게 감당할지 정혜정은 벌써부터 걱정인 눈치다. 진보정당 당수 부부는 무주택자의 설움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도 남편 닮아 부인도 낙관적이다.

"아파트 한 채 있었으면 좋겠고 아이 잘 키웠으면 좋겠고 물려줄 재산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왜 저라고 없었겠어요. 근데 이제는 그런 생각은 포기했고요,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 끼치지 않고 살았으면 합니다."

2012년 총선 유세 때 정혜정이 김종철과 같이 유세차에 오른 동영상을 찾아봤다. 김종철은 열정적으로 유세를 펼치지만 그의 웅변에 호응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 모습을 정혜정은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데 그 얼굴에 희망 없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의 고단함이 묻어 있다.

"지역구에서 될 거라고 기대한 적은 아예 없고 올 초에 딱 한 번 국회의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거 같아요. 남편이 진보정당 초기부터 헌신했고 당을 위해 누구보다 노력했으니 비례대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해요. 금배지 안 달아도 괜찮은 거 아니냐고…이 정도면 지금까지 잘 살아온 거 아니냐고 말이지요."

2004년 36살의 나이로 민주노동당 후보로 서울시장 선거에 나섰다. 그때 그와 함께 겨룬 사람이 오세훈, 강금실, 박주선 같은 인물들이었다. 비록 패하긴 했지만 선전했다. 특히 텔레비전 토론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단번에 진보 진영의 차세대 유망주로 떠올랐다. 김종철은 이 시절을 자신의 리즈 시절이라고 표현했다. 30대 서울시장 후보로 각광받고 민주노동당이 2004년 선거에서 10석을 얻으면서 기세를 올릴 때만 해도 고지는 그리 멀어 보이지 않았다. 2008년 제1야당, 2012년 집권이라는 민주노동당 목표는 현실적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꿈같은 이야기도 아니었다. 김종철도 이런 기세라면 한 두 번만 더 도전하면 지역구 당선도 가능할 것이라 기대했을 법하다. 진보 진영의 분열이 이런 희망을 무너뜨렸다. 선거는 정치인에게 기회이자 희망이지만 김종철 같은 진보 정치인에게는 자신이 처해있는 현실을 일깨워주는 잔인한 과정이기도 했다.

정의당 김종철 (취재파일용)
"막상 개표하는 날은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이미 결과는 알고 있는 상태이니까요. 정말 힘든 것은 출마를 결심하는 일이지요. 안 될 줄 알면서도 내가 지역구에서 우리 당을 알리고 단 한 표라도 더 받아야 비례대표 의석을 얻을 수 있으니까 나가는 거지만 안 될 줄 알면서 출마하는 것은 힘들지요."

한국 사회는 진보 정치에 자리를 내주는데 인색했다. 한두 명의 스타를 경기장에 넣어주는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는 투였다. 진보 진영이 제대로 팀을 꾸릴 기회 자체를 가진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김종철의 항변은 맞는 말이다. 지난해 선거법 개정 국면에서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여당까지 나서 비례전용 위성 정당을 만든 것은 진보 진영의 사다리를 걷어찬 행위였다.

진보정치인 김종철의 고난은 이런 상황에서 불가피한 것이었다. 희망 없는 싸움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그는 몇 번이나 견뎌야 했다. 그런 시련은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을 갉아먹는 일이었다. 사람이 뾰족해지고 삐뚤어지기 십상이었는데 그는 여유를 잃지 않고 유머를 포기하지 않았다.

거듭되는 낙선에도 불구하고 진보정치 진영을 떠나지 않았다. 2010년 박용진은 진보 정당을 떠나면서 김종철에게 함께 하자고 설득했지만 김종철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박용진은 오른쪽 문을 열면 거기에 답이 있다고 했지만 김종철은 왼쪽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는다. 왼쪽에서 답을 찾으려는 그의 고집은 집요하다. 이 사회가 오른쪽을 향해 달려가면 갈수록 자기 같은 사람이 왼쪽에 굳게 서서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믿는다. 세상에 폐지를 주우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새벽 4시에 6411번 버스를 타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그는 확신한다.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하고, 지금은 그 일을 자신이 해야 한다고 믿는다.

정의당 김종철 (취재파일용)
8. 진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가 진보는 변하는 것이라고 답한 적이 있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이 사람은 진보가 아니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 생각도 변하지 않았고 행동도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얼굴도 20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내 유머에 저항하지 말라며 썩 웃기지 않은 유머를 끈질기게 구사해서 사람을 웃기는 것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당신의 진보는 혹시 관성적 진보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제 와서 방향을 바꾸기도 애매해서, 살던 방식 그대로, 생각하던 방식 그대로, 행동하던 방식 그대로 살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는 관성적 진보라는 말을 천천히 음미하듯 반복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거는 아닌 거 같습니다. 중간에 아무 변화 없이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닙니다. 고민을 정말 많이 했거든요."
대답은 짧았는데 그 대답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당원 5만 4천여 명, 국회의원 6명이 소속된 원내 3당의 대표가 되고 몇 가지가 달라졌다. 차량이 배차되고 운전을 도와주는 직원이 있다. 국회 출입도 한결 편해졌다. 부르는 곳이 늘었고 가야 할 곳도 많다. 한 달 업무추진비는 100만 원이다. 대표에 취임하면서 당대표 업무 추진비를 3분의 1로 줄였다. 당의 어려운 재정을 고려한 조치다. 급여 성격의 활동비가 별도로 150만 원이 있긴 한데 그가 집에 가져가는 돈이 대표 됐다고 크게 달라질 거 같지는 않다. 정혜정은 아직 돈을 받아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별 기대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정의당 김종철 (취재파일용)
이 사람은 '오래된 진보주의자'다. 오래된 이념을 여전히 붙잡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자신의 신념을 오래도록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어떤 때는 웅숭깊은 거목의 기품을 풍기고 상대방의 말의 이면까지 헤아리며 말을 듣는 사람이다. 진보의 금기를 깨겠다는 그의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는 이유이다. 진보 인생 30년의 내공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이제 그에게 주어졌지만 무엇 하나 쉬워 보이지 않는다. 어렵고 힘든 사람이 있는 한 진보의 가치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그의 간명한 인생관이 그가 기댈 유일한 언덕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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