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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돌연 바뀐 국방과학연구소장 응시 자격…한 사람 위해 짜고 치나

[취재파일] 돌연 바뀐 국방과학연구소장 응시 자격…한 사람 위해 짜고 치나
▲ 올해로 창설 50주년을 맞은 국방과학연구소

지난주 목요일(10월 29일) 강은호 방위사업청(이하 방사청) 차장이 퇴직했습니다. 자천타천 차기 방사청장, 차기 국방부 차관 물망에 올랐던 인물이 돌연 공직을 떠나자 방사청, 국방부, 방산업계가 술렁였습니다. ( ▶[취재파일] 방사청 2인자의 돌연 '면직' 신청…분분한 해석들)

강 전 차장의 퇴직 열흘 전쯤부터 그의 다음 행선지는 뜻밖에도 국방과학연구소장이라는 전망이 나왔습니다. 그를 국방과학연구소장으로 민다는 청와대 안보실 고위 관계자들의 실명도 국방부 주변에서 돌았습니다. 확실한 출처의 전망이지만 전망은 전망일 뿐. 공식 확인된 사실이 아니어서 설마 했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국방과학 최고 전문가들이 모여 자주국방의 무기를 개발하는 곳입니다. 시행착오도 있었고 잘못된 관행도 있지만 많은 연구원들이 좋은 국산 무기 만들겠다며 인생을 거는 곳입니다. 강 전 차장은 국방과학자가 아닙니다. 행정고시 출신 일반 공무원입니다. 국방과학연구소의 흠결에 책임 안 지려고 무던히 애썼습니다. 게다가 응시 자격이 까다로워 방사청 차장은 애초에 국방과학연구소장 자리를 넘볼 수도 없었습니다.

설마가 사실이 되고 있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가 어제(2일) 소장 공개모집을 공고했는데 응시 자격이 달라졌습니다. 응시 자격에 느닷없이 '방사청 고위공무원'이 추가됐습니다. 누가 봐도 강 전 차장을 위해 규정을 손본, 말하자면 위인설법(爲人設法)입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며 출범한 정부에서 권위주의 시대에나 있을 법한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낙하산' 절차를 개시했습니다. 결과도 정의와는 관계없을 듯합니다.

● 갑자기 바뀐 국방과학연구소장 응시 자격

국방과학연구소장 응시 자격은 공무원 임용 결격사유에 해당되지 않는 자로서 4가지 조건 중 하나에 해당돼야 합니다. ① 예비역 영관급 이상 장교로서 국방정책 관련 부서 유경험자, ② 국방부 고위공무원급으로 무기 획득분야 및 국방과학기술분야에서 5년 이상 근무한 자, ③ 과학기술분야 정부산하연구소에서 책임연구원 이상으로 10년 이상 근무한 자, ④ 대형 방위산업체에서 이사급 이상으로 5년 이상 근무한 자 등입니다. 며칠 전까지는 이랬습니다.

2017년 국방과학연구소장 모집공고 중 응시 자격…방사청 고위공무원은 해당되지 않는다.

어제(2일) 국방과학연구소가 게재한 국방과학연구소장 모집 공고는 작지만 묵직하게 달라졌습니다. ②번 조항이 국방부· 방위사업청 고위공무원급으로 무기 획득분야 및 국방과학기술분야에서 5년 이상 근무한 자로 바뀌었습니다. '방위사업청' 딱 한 단어 더 들어갔습니다. 왜 추가했는지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어제 게재된 국방과학연구소장 모집공고 중 응시 자격…방사청 고위공무원이 추가됐다.

국방부는 강 전 차장이 퇴직하는 날 전후로 새로운 모집 규정을 국방과학연구소로 내려보냈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소장 응시 자격이 바뀌는 줄도 몰랐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국방과학 최고 전문가들이 국방과학연구소의 미래 청사진과 개혁의 로드맵을 제시하며 자웅을 겨룬 뒤 소장으로 뽑혀야 하는데 응시 자격을 보니까 시쳇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혹평했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의 한 간부는 "평등, 공정, 정의를 추구한다는 문재인 정부에서 국방과학 최고 책임자를 이런 식으로 앉히면 안 된다", "군부독재 시절에도 국방과학연구소장을 이렇게 뽑지는 않았다"고 탄식했습니다.

● 국방과학연구소장 자격 있나

국방과학연구소는 올해로 창설 50주년을 맞았습니다. 뜻깊은 해이지만 퇴직 연구원들의 초대형 기밀유출 사건으로 홍역을 치렀습니다. 사건은 지난 4월 26일 SBS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관리감독기관인 방사청이 서둘러 조사를 하고 지난 6월 25일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때 나선 이가 바로 강은호 전 차장입니다.

강은호 전 방사청 차장

그는 "방사청이 이 사건을 인지한 시점은 4월 중순"이라고 했습니다. 방사청도 모르고 당해서 답답하다는 투였습니다. 의아했습니다. 4월 중순이면 SBS 취재진이 기밀유출 사건을 한창 취재하던 때입니다. 기자와 방사청 고위급이 같은 시기에 국방과학연구소 사건을 알았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사실, 방사청은 작년 말 사건을 제대로 파악했습니다. 작년 12월 15일부터 12월 20일까지 국방과학연구소 보안실태조사 합동팀이 운영됐습니다. 방사청 기술보호과장 등 방사청 직원 5명, 국정원 직원 3명, 안보지원사 직원 2명으로 구성됐습니다. 방사청이 주도했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 관계자는 "당시 합동팀이 입수한 자료들은 현재 기밀유출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경찰이 확보한 자료와 같다", "방사청은 작년 말 실태조사 내용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합동팀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건을 제때 처리하지 않다가 마지못해 4월 중순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4월 중순에야 인지했다"는 강 전 차장의 말을 믿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방사청이 제대로 국방과학연구소를 관리감독했다면 애초에 기밀유출 사건을 막든가, 적어도 작년 말 사건을 경찰에 넘겨야 했습니다. 방사청은 둘 다 안 했습니다. 덮었다고 욕먹어도 할 말 없는, 대단히 석연치 않은 일입니다. 책임은 강은호 전 차장에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국방과학연구소장 자리를 탐한다면 뭔가 많이 잘못된 것입니다.

● 국방과학연구소장의 진짜 자격은

국방과학연구소장은 권력 쥔 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정할 자리가 아닙니다. 은혜 입고 은혜 갚는 자리가 돼서는 안 됩니다. 차기 국방과학연구소장은 국산 첨단무기 개발을 진두지휘할 수 있는 최고의 국방과학자여야 합니다. 연구원들은 제 신념, 흥에 신명 다해 좋은 무기 개발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미래의 소장 자리를 꿈꾸며 스스로 동기부여를 할 터. 소장의 자리는 그래서 또 중요합니다.

국방품질기술원의 한 관계자는 "강 전 차장은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경력이 있는데 박근혜 정부, 문재인 정부에서도 승승장구했다"며 "정권을 넘나드는 정치의 수완가, 무기 사업관리의 전문가는 맞지만 국방과학과는 거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진짜 국방과학자들에게 맡기고 강 전 차장은 정치적인 자리인 방사청장이나 국방부 차관에 도전해 봄이 어떨런지요.

국방과학연구소장의 응시 자격은 누가 어떤 과정을 거쳐 고쳤을까요. 국방부 장관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국방과학연구소의 이사회에서 정식 안건으로 논의해 의결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습니다. 응시 자격 규정을 바꾸라고 지시한 사람이 있습니다. 국방부 인사복지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 정부 안보라인의 유력한 인물입니다. 지난달부터 강 전 차장을 국방과학연구소장으로 민다고 실명이 거론되던 바로 그 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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