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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여행이 사라진 시대의 여행

[인-잇] 여행이 사라진 시대의 여행

김다영 | 여행 전문가. 여가 설계와 여행 트렌드를 강의하고 있다.

SBS 뉴스

작성 2020.10.04 11:00 수정 2020.10.05 16:11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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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나 여행이 떠났다 캡쳐
"처음으로, 여행이 우리를 떠났습니다"

마음을 울리는 첫 카피부터, 괜히 뭉클해지는 영상이다. 아시아나 항공이 8월 6일에 공개한 '여행이 떠났다' 광고는 1천만 뷰를 눈앞에 둔, 아시아나 항공 유튜브 채널에서도 역대 최다 조회를 기록한 영상이 됐다. 어쩌면 이 광고는 코로나로 힘든 시기를 보내는 모든 이들을 향한 응원이자,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시점을 지나고 있는 항공사 스스로에게 보내는 다짐과 메시지이기도 할 것이다. 아시아나는 그저 응원과 다짐을 전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9월 24일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목적지 없는 비행' 상품을 내놓았다.

'목적지 없는 비행'은 코로나로 모든 것이 멈추어 버린 항공업계에서는 최대의 화두다. 이 트렌드의 출발점은 지난 7월 2일 타이완 송산공항에서 70주년 이벤트로 열렸던 비행 체험 행사가 CNN 등 매체에서 보도된 후 화제가 되면서부터다. 송산공항이 코로나로 여행을 못 가는 사람들의 아쉬움을 해소하기 위해 가상 항공 탑승 여행을 준비했는데, 8천 개 이상의 참여 댓글이 달리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중 무작위로 180명을 뽑아서 국적기인 중화 항공과 에바 항공에 나누어 탑승 체험을 진행했다고 한다.

2020년 상반기는 항공사에겐 암흑과 같은 시간이었다. 해외여행이 완전히 봉쇄된 상황에서 기껏해야 기내 위생 안전에 대한 홍보 영상 제작, 마일리지 유효기간 연장, 미래의 항공권 미리 판매, 항공권 날짜 변경이나 환불을 자유롭게 해주는 등의 아이디어밖에 내놓지 못했다. 송산공항의 이벤트에서는 실제로 비행을 하지는 않았지만 체험 비행 상품에 대한 시장성을 어느 정도 미리 엿볼 수 있었던 셈이다.

얼마 후 타이완의 신생 항공사인 스타럭스 항공은 온라인 여행 플랫폼인 클룩(Klook)과 함께 본격적인 '목적지 없는 비행' 패키지 상품을 내놓았다. '세계 최초의 체험 비행'을 표방한 이 상품은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하고, 비행기를 타고 타이완 동부 해안선을 따라 비행하며 기내식과 영화 감상을 즐기는 코스다. 단순 비행 체험이 20만 원 선이라면, 5성급 호텔 숙박과 결합한 4인 가족 스테이케이션(staycation) 상품은 무려 2만 7000 타이완 달러, 한화로는 100만 원이 넘는다.

하지만 이 패키지들은 출시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완판 되었다. 그러자 일본 ANA 항공의 하와이 콘셉트 비행 상품, JAL의 밤 비행 상품, 타이완 에어의 타이베이~제주 비행 상품 등 각양각색의 상품이 계속 나오고 있다. 9월 17일에는 호주의 콴타스 항공이 시드니의 랜드마크를 무려 7시간 동안 비행하는 상품을 내놓았는데 역시 10분 만에 전 좌석이 매진되었다. 싱가포르 항공에서도 곧 상품을 내놓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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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나에서도 '목적지 없는 비행' 상품을 내놓았다. 반응은 역시나 뜨거웠다.
아시아나에서 내놓은 상품 역시 반응이 뜨겁다. 대형 기종인 A380의 퍼스트와 비즈니스 클래스를 25~30만 원대에 타볼 수 있는 데다, 10월 24~25일 양일간만 진행되는 이벤트성 상품이다 보니 희소성도 있다. 예약이 시작된 당일,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지만 퍼스트와 비즈니스 석은 이미 매진되었고, 그나마 몇 석 남아있던 이코노미 석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인천에서 떠나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야 하는 비행이 상품이 된다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동시에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여행에 목말라 있는지 절실히 느껴졌다.

이렇게 목적지 없는 비행 상품이 점차 늘어날 조짐이 보이자, 환경 파괴에 대한 비판도 뒤따르고 있다. 특히나 기후 변화를 넘어 기후 위기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데 때에 이동 목적이 아닌 비행의 탄소 배출이 과연 온당한가라는 지적도 눈여겨보게 된다.

플라이트 프리(Flight free) 운동은 스웨덴의 환경운동에서 영향을 받아 미국, 호주, 유럽 등 세계 6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환경 운동으로, 비행기를 가급적 적게 타거나, 타지 않는 것을 서약하는 캠페인이다. 이 운동의 영국 디렉터인 안나 휴즈(Anna Hughes)는 9월 18일 더 가디언(The Guardian)과의 인터뷰에서 "비행에 중독된 사회라면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목적지 없는 비행은 광기에 가깝다"라고 비판했다. 시간당 온실가스 배출량이 가장 많은 교통수단인 비행기를, 단순히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서만 운항하는 행위는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미 코로나 사태 이전부터 그레타 툰베리의 환경 운동으로 시작된 '비행 수치심'의 여파 때문인지, 유럽의 항공사들은 '목적지 없는 비행'의 흐름에 선뜻 동참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코로나로 인해 재정상태가 크게 악화된 항공사들이 결국 너도나도 '목적지 없는 비행'을 선택하게 될지, 상황의 변화에 따라 또 다른 묘책이 나올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물론 목적지가 있는 비행의 시대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더라도, 이전보다는 항공 여행의 '목적'을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는 시대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인-잇 #인잇 #김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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