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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영원히 흉년이라는 법은 없으니까

김창규│입사 21년 차 직장인. 실제 경험을 녹여낸 회사 보직자 애환을 연재 중

도시와 농촌이 함께 어우러진 지역에서 근무하면 좋은 점이 몇 가지 있다. 우선 경치가 좋다. 산 아래에 나지막한 집들이 옹기 종이 모여 있는 마을, 그 사이로 흐르는 개울, 그 옆에 넓게 펼쳐져 있는 논밭 등이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그림처럼 펼쳐진다. 게다가 우리 회사의 경우 이런 곳의 근무 강도는 수도권보다 솔직히 좀 약한 편이다.

그러니 나처럼 서울에서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를 달고 회사생활을 오래 했던 사람에게는, 출퇴근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힘든 점도 있지만, 아주 좋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일을 하면서 눈도 호강하니 말이다. 그날 오후도 이런 즐거움을 누리는 날이었다. 직원 몇 명과 점심 먹고 그 근처 산 중턱, 계곡 사이로 물이 흘러가는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한 예쁜 카페에서 차 한잔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황금 들판이라고 하더니, 저기 벼가 정말 예쁘네요. 황금 천이 바람결에 따라 펄럭거리는 것 같네."

벌써 한 해가 다 갔네.
나는 감탄하며 말을 이어갔다. "또 한 해가 다 갔나 보네요. 저거 다 추수하면 올해도 끝이겠죠. 어, 그런데 이상하네. 이제 곧 중추절인데 왜 아직 벼가 그대로 있죠? 여문 곡식을 다 거두어들이고 맞이하는 게 중추절인데? 이상하다."

그러자 지점장이 웃으며 답했다. "서울 촌사람 티 내시는 거 같습니다. 추석 즈음에는 대부분의 곡식이나 과일들은 익지 않은 상태예요. 추석은 추수하기 전, 농사의 중요 고비를 넘겼을 때 미리 곡식을 걷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풍년을 기원하는 거죠."

그러자 그 옆의 판매팀장이 한마디 더 거들었다. "맞아요. 우리나라 추석은 서양의 추수감사절과는 다르죠. 우리의 추석은 가을 수확이라는 큰 일을 앞두고 천고마비의 계절을 즐기면서 성묘도 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명절이랍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서양의 추수 감사제 같은 것은 음력 10월 중에 하는 상달 고사예요."

나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런가요? 정말 처음 알았네요. 서울 촌놈이라서가 아니라 상식이 없었던 것 같네요, 하하. 이번 중추절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아는지 물어봐야겠어요."

그러자 이번엔 이 차장이 나를 힐난하 듯 묻는다. "그런데 왜 아까부터 자꾸 중추절이라고 하세요?" 이 질문에 난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중추절은 중국과 베트남에서 쓰는 명칭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 명칭은 가급적 사용하지 말아야 해요. 물론 추석도 순 우리 말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만 쓰는 국산 한자어이니 그나마 낫죠. 순 우리말로는 한가위예요, 다 아시겠지만."

나는 뜨끔했다. "아! 맞네, 맞아. 추석, 한가위. 내가 실언을 했어. 미안." 하며 얼버무리며 "그래, 한가위 연휴기간에 뭐할 거예요? 코로나 때문에 한가위 풍속이 확 바뀔 것 같던데. 어디 가나요?"라고 물으며 대화 주제를 바꿔보려고 했다. 그러자 직원들은 여기는 도농지역이고 대부분 부모님이 근처에 있어서 자신들은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게 성묘 지내고 부모님께 인사드린다고 했다. 그러자 이 차장이 걱정하듯 말한다.

"그런데 이거 큰일 났어요. 우리 와이프 입이 이만큼 나왔거든요." 우리가 왜 그런지 궁금해 하자 그는 사정을 말한다. "우리 부모님이 서울 등 외지에서 사는 형제들에게 이번에는 집에 오지 말라고 했어요. 물론 코로나 때문이죠. 그런데 저희 집은 오라는 거예요. 근처에 사니까요. 그 덕에 추석 성묘 준비 등 집안 일을 우리 와이프가 도맡아 하게 생겼어요. 제 아내 입장에선 독박 쓴 거죠."

그러자 여기저기서 "아내한테 잘해라, 잘못하면 큰일 나겠다"고 걱정스러워하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때 지점장이 조용히 다른 말을 꺼냈다.

"이번 추석에는 가슴 아픈 사람들 참 많을 것 같아요. 우리야 운 좋게 코로나로 피해가 없는 회사에서 근무하는 덕분에 이런 좋은 곳에서 여유롭게 사치스러운 말을 나누고 있지만 지금 그렇지 않은 사람들 많다고 하잖아요."

지점장은 며칠 전 택시기사가 했던 이야기를 우리한테 그대로 전해줬다.

"며칠 전 어떤 손님이 타셨는데 가는 내내 택시기사인 저한테 하소연하며 우셨어요. 그 손님은 코인 노래방을 운영하는데 얼마 전에는 코로나 확산 억제를 위해 나라에서 영업을 못하게 해서 문을 닫았고 지금은 영업을 개시했지만 손님들이 거의 오지 않는다는군요. 월세는 내야 하고 생활비도 필요한데 돈이 안 벌리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뭐라고 위로 할 수가 없더라고요. 정말 딱했습니다."

이 이야기에 판매팀장도 비슷한 사례를 곁들였다.

"우리 바로 이웃이 며칠 전 부부싸움을 대판 했는데 우리 와이프가 그 이유를 따져보니 결국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라고 해요. 이웃집 아저씨는 아웃도어 옷 가게를 하는데 코인 노래방 사장님처럼 장사가 잘 안 돼서 피치 못하게 아내한테 주던 생활비를 확 줄였대요. 그분 아내는 이해는 했지만 속으로는 불만이 쌓였겠죠. 그런 상황에서 이번에 시댁과 제사 준비하다가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맘이 상했고 그것을 남편에게 따지듯 얘기하다가 서로 폭발한 거죠."

경치 좋은 곳에서 우리의 유쾌했던 대화는 갑자기 우울해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내가 입을 열었다.

"이 불행이 곧 우리 일이 될 수도 있겠네요. 지점장 말처럼 지금 당장은 우리가 코로나 위기를 빗겨 났지만 경기가 전체적으로 침체되면 우리 회사에게도 어려움이 닥쳐올 것입니다. 재수 없으면 우리 그룹 계열사 Q처럼 직원 대부분이 휴직을 해야 할지도 몰라요. 그러면 우리도 코인 노래방 사장이나 판매팀장 옆집 부부처럼 되는 거죠."

영원히 힘들 것이라는 법은 없으니까.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내 말에 우리 모두는 한숨을 내쉬었다.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저 황금녘 들판도 쓸쓸해 보였고 경쾌했던 개울물 소리도 베토벤의 비창처럼 들렸다. 이때 카페에서 난데없이 신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살다보면 그런 거지, 우후 말은 되지. 모두들의 잘못인가, 난 모든 걸 알고 있지. 닥쳐! / 우리는 달려야 해, 바보놈이 될 수 없어 말달리자!!! / 모든 것은 막혀 있어, 우리에겐 힘이 없지, 닥쳐! / 우리는 달려야 해, 거짓에 싸워야 해. 말달리자!!!"

이 노래를 들으니 조금은 힘이 솟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의 한가위는 곡물을 수확하기 전에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며 풍년을 기원하는 명절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농사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지금은 흉년일 것 같지만 끝은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닥치고 달려야 한다. 닥치고 달리려면 이번 추석 연휴, 매우 중요하다.

추석 이후 말 달리기 위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충분한 힘을 축적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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