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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국군의 뿌리' 광복군의 창설과 좌절, 그리고 10만 확군 활동

[월드리포트] '국군의 뿌리' 광복군의 창설과 좌절, 그리고 10만 확군 활동

송욱 기자 songxu@sbs.co.kr

작성 2020.09.18 10:04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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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17일) 오전 중국 서부 충칭시에서 '대한민국 만세' 삼창이 울려 퍼졌습니다.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을 맞아 중경한국인(상)회가 주관한 행사에서 참석자 2백여 명은 독립유공자 이달 선생의 장녀인 이소심 여사와 양재경 중경한국인회 회장의 선창에 맞춰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습니다. 양 회장은 "오늘은 광복군 창설 80주년이자 광복군 총사령부가 복원을 모두 끝마치고 처음 맞는 기념일"이라며 "광복군 창설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복원은 시기는 다를지언정 한중 양국이 협력적인 관계를 통하여 이룩해 낸 성과"라고 말했습니다.

[월드리포트] '국군의 뿌리' 광복군의 창설과 좌절, 그리고 10만 확군 활동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인 광복군은 80년 전인 1940년 9월 17일 당시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시의 가릉빈관에서 성립전례식을 가졌습니다. 광복군은 1946년 대원들의 귀국 전까지 5년 넘게 중국에서 활동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건군(建軍)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후 중국에 남은 총사령부 건물은 중국 음식점과 옷 가게 등으로 사용되다 2015년 철거됐지만, 한중간 합의로 다시 복원돼 지난해 3월 복원 기념식을 가졌습니다. 내부 장식과 코로나19 사태로 제대로 문을 열지 못했던 총사령부는 지난 6월 말 관람객들에게 개방됐습니다. 양 회장은 "총사령부는 충칭시의 중심 번화가에 자리하고 있어 하루에 많게는 수백 명의 관람객이 찾아오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월드리포트] '국군의 뿌리' 광복군의 창설과 좌절, 그리고 10만 확군 활동
● 한국광복군의 탄생과 국내 진공 좌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원년(1919년)에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 원수의 특별 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광복군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22년(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함을 선언한다." – 한국광복군 창설 선언문 中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
80년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는 중국 충칭에서 광복군 창설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에는 김구와 총사령 지청천, 이범석 참모장 등 3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는 목표 아래 광복군의 가장 시급한 활동은 병력 확충이었습니다. 중국 내 한인 청년과 독립군, 일본군에서 탈출한 한인 사병 등을 모집했습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12월 9일 대일선전을 정식으로 포고하고, 1942년 7월에는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됐습니다.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에 취임했습니다. 광복군은 중국군 지휘를 받아 중일전쟁에 참전했고, 인도-미얀마 전선에 파견된 대원들은 영국군에 소속돼 감청과 선무 공작, 포로 심문 등의 활동을 펼쳤습니다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과 OSS 도노반 소장
1945년 광복군은 미국 정보기관 OSS와 합작해 광복군을 국내로 잠입시킨 뒤 미군이 상륙작전을 벌일 때 안에서 돕게 하는 일명 '독수리 작전'을 세웠습니다. 1945년 8월 30여 명의 대원들이 중국 시안의 비밀기지에서 3개월의 특수훈련을 수료했고, OSS는 8월 7일 국내 진공 작전 계획을 통보했습니다. 하지만 이틀 뒤 일본의 항복 소식이 들려왔고, 진공 작전은 결국 무산됐습니다.

당시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라고 안타까워하며 "진실로 전공(前功)이 가석(可惜)하거니와 그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 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고 적었습니다.

● '국군의 뿌리' 광복군의 '10만 확군'과 '복원 선언'

일제의 패망 이후 광복군의 활동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습니다. 임시정부는 환국의 추진과 함께 건국에 필요한 건군(建軍)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광복군을 중심으로 건군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광복군의 조직과 세력을 확대하는 확군(擴軍) 활동이 있습니다. 중국 각지에 있는 한인 청년과 중국 전선에 있던 일본군에 학병, 징병 등으로 끌려나온 한적사병을 광복군으로 흡수해 광복군의 세력을 확대하고, 국내에 들어가 이를 근간으로 삼아 국군을 건군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광복군은 1945년 8월 말부터 간부들과 대원들을 중국의 여러 지역으로 파견하였습니다. 주요 도시에 판사처를 설치하고 한인 청년들의 접수를 받았고, 중국군에 파견돼 일본군의 항복 접수를 도우면서 일본군으로 끌려 나온 한적 사병을 광복군에 편입시켰습니다. 확군 활동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광복군은 1945년 10월 말까지 기존 3개 지대 외에 난징과 한커우, 항저우, 상하이, 베이징, 광둥 등 6개의 잠편(임시 편성) 지대를 추가로 설치하게 됐습니다. 광복군은 10만 명까지 확군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사료에 따라 적게는 2만 명, 많게는 9만 명까지 광복군을 늘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광복군의 건군 구상은 장애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중국의 반대였습니다. 일제 패망 이후 광복군에 우호적이던 국민당은 공산당과의 내전이 격화되자 광복군이 추진한 확군 활동을 중단하도록 했고 한국인의 강제 송환을 결정했습니다. 한인무장단체를 비롯하여 중국 내 한인들을 불안요소로 여긴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미 군정은 임시정부와 마찬가지로 광복군이 편제를 유지해 귀국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광복군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교민과 확군활동으로모은 대원들의 귀국이 이뤄진 1946년 5월 16일 광복군 총사령 지청천은 '한국광복군복원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제 숙적 일본이 항복하여 연합군은 승리하고, 우리 국토는 광명을 되찾았으니, 본군의 중국 내에서의 작전 임무는 이로써 끝났다. 춘풍추우 수십 년의 망명과 항전 과정에서, 우리는 이 날이 오기를 얼마나 고대하였는가! 이에 본군은 복원을 선포, 전 대원이 귀국하여 조국건설 대업에 참가할 것을 명한다." – 한국광복군 복원 선언문 中

이 복원 선언은 사실상의 광복군 해체, 해산 선언으로 평가받지만, 선언문은 '해산'이 아닌 '복원'이란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필요할 때에는 다시 동원하여 군에 복귀시킨다는 것을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광복군 자격으로의 귀국은 금지됐지만, 광복군 출신 이범석이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고 국군이 창설되면서, 광복군 출신들이 국군에 입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범석 장관이 1949년 3월 물러나면서, 국군에서의 광복군 위상은 점차 약화되어 갔습니다.

우리 국군의 뿌리인 광복군과 국군과의 관련성을 더욱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해방 후 중국에서의 광복군 활동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하지만 해방 후 중국에서 전개한 광복군의 활동에 대해서는 수집된 자료가 많지 않고, 연구도 아직 부족한 상황입니다. 단국대 사학과 한시준 교수는 "일제가 패망한 후 광복군은 확군 활동과 함께 중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귀국시키는 역할을 했다"며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군의 임무를 수행한 것이었고, 건군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광복군의 위상이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연구 과제"라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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