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북적북적] 출생의 비밀은 한드의 전유물이 아니다…김용 천룡팔부

[북적북적] 출생의 비밀은 한드의 전유물이 아니다…김용 천룡팔부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작성 2020.09.06 07:30 수정 2020.09.08 09:32 조회수
프린트기사본문프린트하기 글자 크기
▶ 오디오 플레이어를 클릭하면 휴대전화 잠금 상태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오디오 플레이어로 듣기


[골룸] 북적북적 256 : 출생의 비밀은 한드의 전유물이 아니다…김 용 <천룡팔부>

"신선 누님, 살아 돌아오시어 저에게 한 마디만 던지신다면 전 누님을 위해 일백 번 고쳐 죽더라도 몸이 극락에 가 있듯 기쁘기 한량없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끝내기 무섭게 느닷없이 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시대- '집콕'이 일상이 된 게 이제 좀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대면에서 비대면으로, 만나서 함께 하는 것보다는 온라인으로 도모하고 작업은 홀로 하는 그런 상황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읽기도 하고 영화나 드라마, 게임, 홈트까지 이것저것 건드려 보게 됩니다. 코로나 상황이 아니면 이렇게 했을까 싶은 것들도 제법 있고… 이런 게 인연일까요.

모든 이에겐 사연이 있고 그로 인해 맺게 된 인연과 쌓아버린 업보가 있다, 이를 극복하려면 그것도 자신에게 해법이 있다죠. 저도 잘은 모르지만 불가의 도리와도 맞닿아있는 듯한 이런 내용을 장대한 강호의 군협담으로 풀어낸 고 김용 선생의 역작 [천룡팔부]가 이번 주 북적북적의 선택입니다.

飛雪連天射白鹿(비설련천사백록) 하늘 가득히 눈이 휘몰아쳐 흰 사슴을 쏘아가고,
笑書神俠倚碧鴛(소서신협의벽원) 글을 조롱하는 신비한 협객이 푸른 원앙새에 기댄다.

김용 선생의 오랜 팬이라면 한 번 이상 들어봤음직한 이 열네 자의 대련은 그의 작품 14편의 제목 첫자를 따서 지은 건데, 오늘 읽는 작품은 '천'에 해당하는 [천룡팔부]입니다. [소오강호], [녹정기]와 함께 김용 선생의 후반기 삼대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에요. 더 대중적인 작품으로 국내에 영웅문 3부작으로 소개된 바 있는 사조영웅문, 신조협려, 의천도룡기가 있습니다. 소오강호는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하는 이와 그를 비웃어버리는 이들, 그리고 그를 은유하는 무공을 극명한 대비로 보여줬다면 천룡팔부는 불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연과 업모를,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을 다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다 알겠지만 설명해야 할 것들이 적지 않은데요, 먼저 제목 '천룡팔부'는 불교의 호법신 8명을 가리킵니다. 천인, 용, 야차, 건달파, 아수라, 가루다, 긴나라, 마후라가… 호법신이긴 하지만 진리를 깨닫지는 못한 이들이라 팔부중 혹은 팔부신중이라고도 한다죠. 천룡팔부에도 숱한 등장인물이 나오는데 분명치는 않지만 천인도 있고 용도 있고 야차도 있겠죠.

주인공은 크게 3명, 단예-소봉-허죽 이들 3명이 겪는 우여곡절과 모험담이 큰 줄기를 이루고, 이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다른 이들과 사건에 휘말리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고난을 겪고 얽히고설켜 죽고 죽이는 이야기들이 복잡하고 다단하게 펼쳐집니다. 각 주인공 부분 중에서 제가 좋아하는 대목 하나씩을 골라 읽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주인공인 단예, 중국 서남쪽 운남 지방에 서기 937년부터 1253년까지 실재했던 대리국의 왕 헌종으로 실존 인물입니다. 원래는 단화예라는 이름인데 여기서는 단예로, 왕자로 등장합니다. 대리국의 국교는 불교로, 단예는 왕자 신분으로 어려서부터 불교 교리는 물론 경전과 시사까지 공부도 많이 했고 잘생겼지만 무협소설 주인공인데도 무공에 관심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무공을 익히라고 강요하자 가출하는 대목부터 소설이 시작됩니다. 숱한 여인들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금사빠'이기도 한데 가장 사랑했던 건 사람이 아니라 백옥으로 만든 조각상 '신선 누님' 같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자기가 만든 조각상과 사랑에 빠지는 피그말리온과 닮았습니다. 이 단예가 옥상을 사모하게 되면서 북명신공과 능파미보라는 절대 무공을 엉겁결에 익히는 그 대목을 먼저 읽겠습니다.

"그는 고두천배를 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며 그녀의 분부를 받을 수만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미인의 명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것이며 골백 번 고쳐 죽는다 해도 후회할 마음이 없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정신줄을 내려놓고 곧바로 '하나, 둘, 셋… 열… 열다섯… 스물…' 입으로 숫자를 세어가며 아주 공손히 옥상을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

"난 무공을 배우고 싶지도 않고, 소요파 제자들을 남김없이 죽이라는 지시는 더더욱 실행할 수도 없잖아? 하지만 신선 누님의 명령을 어찌 불복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누님께 고두천배를 한 것은 그분께서 시키는 대로 하고 명령을 이행하겠다는 약속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나더러 무공을 배워 살인을 하라고 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단예의 '금사빠' 기질은 실은 그의 아버지이자 실존인물로 선대 왕이기도 했던 단정순에게서 비롯된 것 같지만 비슷한 듯 또 다릅니다. 단정순은 젊었을 때 강호를 유람하며 가는 곳마다 여인들과 사랑에 빠져 꼭 자녀를, 사생아를 남기기도 했죠. 무공을 싫어하는 이 왕자가 시종일관 바보짓을 하면서 우연과 우연이 겹친 기연을 만나고 그렇게 천하제일 고수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는 것도 이 소설의 쏠쏠한 재미 중 하나입니다. 아등바등 욕심을 부리는 이들, 어떻게든 남을 흠집 내고 해를 끼치려는 이들보다 이런 바보 왕자가-다이아몬드 수저기는 하지만 더 높은 무공을 성취하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있고요.

다음 주인공은 교봉 혹은 소봉, 김용 선생의 작품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대협객으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처음 등장할 때 이름은 교봉이었으나 자신이 한족이 아니라 송나라를 계속 압박하고 침략해오던 북쪽 요나라- 거란족인 걸 알게 되면서 원래의 이름 소봉으로 돌아갑니다. 교봉이던 시절, 강호에서 가장 큰 방파인 거지들의 모임 개방 방주, 우두머리였는데 무공 뛰어나고 의협심과 통솔력 강하고 머리도 좋고, 뭐든지 최고였던 교봉, 술도 잘 마시죠. 무협소설 주인공의 클리셰는 대충 다 갖췄는데 자신도 모르고 있던 출신이 폭로되면서 고난을 겪고 개방에서도 쫓겨납니다. 그동안 몸과 마음을 다 바쳤던 개방과 조국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친구와 친지들도 등을 돌리는 그의 곁에는 적의 시녀였던 아주만 남죠. 강호 전체에 공적으로 몰린 상황에서 이 소녀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적으로 가득 찬 취현장으로 가는데… 그 대목을 읽겠습니다.

"여기 계신 영웅들 중 대다수가 과거에 이 교봉과 교분이 있었지만 오늘은 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으니 이 술을 모두 비우고 절교하도록 합시다. 나 교봉을 죽이고자 하는 벗은 누구든 이 술 한 사발을 먼저 마시고 지금부터 과거의 교분을 일소하는 것으로 하겠소. 그럼 내가 그대를 죽여도 은혜를 저버리는 행동이 아니며 그대가 날 죽여도 의를 저버리는 짓이 아닌 것이오."

"난 도대체 거란인인가, 아니면 한인인가? 내 부모와 사부님을 죽인 자는 누구일까? 난 평생 인의를 행하며 살아왔는데 오늘 내가 어찌 아무 연고도 없이 이 수많은 영웅을 해쳤을까? 난 아주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여기 왔건만 억울하게 목숨을 잃게 됐으니 이 어찌 우둔하기 짝이 없는 행동으로 천하 영웅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 아니던가?"


요나라 황제 다음 가는 왕의 자리에까지 오르지만 소봉은 일생에 단 한 명 사랑했던 이를 자기 손으로 쳐 죽이고 부모와 사부의 원수는 끝내 갚을 수 없게 됐으며 자기를 키워준 조국인 송과 원래 태어난 조국인 요 사이에 끼어 고통받는 가혹한 운명에 처하게 되죠.

마지막 주인공은 허죽, 소림사의 말단 중인데 단예와는 또 다른 양상의 바보짓 스님이죠. 어찌 보면 늘 정도를 지키고 선행을 하려 하는 이들이 험난한 강호에선 바보가 되고 마는 게 또 하나의 풍자 같습니다. 허죽의 인생이 바뀌는 건 소요파 무공을 전수받는 대상으로 낙점되면서부터인데 이를 위해선 바둑의 절대 최고 난제 중의 난제를 풀어야 합니다. 어진 마음에 사람을 구하려다 얼떨결에 그러고 있는 그 대목을 읽습니다.

"허죽은 자비심이 발동했다. 그는 바둑 실력이 형편없었던 터라 이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기국 속의 난제를 푼다는 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단연경의 두 눈이 기국을 멍하니 응시하는 것을 보자 짧은 위기의 순간에 불현듯 영감이 떠올렸다. '저 기국을 풀지는 못해도 훼방을 놓는 건 간단하지 않은가? 저자의 심신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면 그를 구할 수 있다. 기국이 없다면 승부도 없을 것 아닌가?'"

"허죽이 조금 전 눈을 감고 아무렇게나 둔 한 점이 대마가 있는 공활인 백돌들을 스스로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바둑의 이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 그 자리에 착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검을 들어 스스로 베어 자결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대량의 백돌을 상대에게 모두 내주고 난 뒤에 국면이 오히려 낙관적으로 변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세 주인공 모두 출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데, 그게 처음부터 폭로되거나 소설의 마지막에 비로소 확인되면서 극적인 반전을 가져오는 대목도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단예의 모험, 소봉의 모험, 허죽의 모험… 그리고 사이사이 등장하는 군웅들의 이야기가 피고 지고 합니다. 10권짜리 소설로 꽤 깁니다만 이 코로나 시국, 저녁에 조금씩 읽어가시기 좋을 것 같습니다.

무협소설의 큰 재미 중 하나인 무공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매력 요소죠. 마치 손가락에서 레이저가 발사되는 듯한 무공 일양지의 최고 사양 업그레이드 버전인 육맥신검이나, 소림사의 72절기, 신선이 노니는 듯 우아하며 강위력한 소요파 무공들, 개방의 진방 절기인 강룡 이십팔 장, 물결 위를 사뿐히 걸어가는 능파미보… 상상력이 빚어낸 다채로운 무공의 향연은 저를 비롯한 뭇 소년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김용 선생은 가셨지만 천룡팔부를 비롯한 무협의 고전들은 앞으로도 오래 그 생명을 이어갔으면 팬심으로 바라마지 않습니다. 중국 교과서에도 실렸단 소식이 전해집니다. 후반기 걸작 3부작 중 남은 하나 [녹정기]의 새로운 번역판도 속히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출판사 김영사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 <골룸: 골라듣는 뉴스룸> 팟캐스트는 '팟빵', '네이버 오디오클립', '애플 팟캐스트'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 '팟빵' 접속하기
- '네이버 오디오클립' 접속하기
- '애플 팟캐스트'로 접속하기


(SBS 뉴미디어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