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살, 나는 아이를 가졌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의 퇴근과 아이가 태어나기만을 기다리던 임신부 생활은 길고도 외로웠다. 아이만 나오면 평생을 납작 엎드려서 자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잠자는 것도 불편한 나날이었다. 불편하고 외로운 긴 시간을 지나 뱃속에서 꿈틀대던 아기가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우와… 진짜 아기네'
이제 막 태어난 생명체를 바라보는 나의 감상은 기대했던 것만큼 그리 특별하진 않았다. 간호사는 내 몸 위로 올라와 아이가 빠져나간 배를 있는 힘껏 눌렀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고통이 다시 한번 따라왔다. 감동은 없고 고통만 있었다. 이것이 나의 생생한 출산 기억이다.
아기를 낳음과 동시에 대단한 사랑이라도 튀어나올 줄 알았다. 못해도 사랑스러운 아기 얼굴을 마주할 때 온몸에 전율이라도 느껴질 줄 알았다. 여태 보았던 드라마와 영화, 수많은 매체에서 다루는 아름다운 출산의 순간에 내가 느낀 것은 분명 고통이었다. 쭈글쭈글한 얼굴에 태반 찌꺼기를 뒤집어쓴 아기와 기저귀를 찬 채 온종일 젖을 짜는 나의 모습. 임신과 출산 육아의 과정 중 그 어느 것 하나 로망과 현실이 맞닿는 곳은 없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모성애'는 무엇이었을까?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 아이를 보는 순간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느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존재. 나만 빼고 모두 공유하는 듯한 '엄마의 마음' 같았다. 그 모성애가 내게는 없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의 퇴근과 아이가 태어나기만을 기다리던 임신부 생활은 길고도 외로웠다. 아이만 나오면 평생을 납작 엎드려서 자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잠자는 것도 불편한 나날이었다. 불편하고 외로운 긴 시간을 지나 뱃속에서 꿈틀대던 아기가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우와… 진짜 아기네'
이제 막 태어난 생명체를 바라보는 나의 감상은 기대했던 것만큼 그리 특별하진 않았다. 간호사는 내 몸 위로 올라와 아이가 빠져나간 배를 있는 힘껏 눌렀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고통이 다시 한번 따라왔다. 감동은 없고 고통만 있었다. 이것이 나의 생생한 출산 기억이다.
아기를 낳음과 동시에 대단한 사랑이라도 튀어나올 줄 알았다. 못해도 사랑스러운 아기 얼굴을 마주할 때 온몸에 전율이라도 느껴질 줄 알았다. 여태 보았던 드라마와 영화, 수많은 매체에서 다루는 아름다운 출산의 순간에 내가 느낀 것은 분명 고통이었다. 쭈글쭈글한 얼굴에 태반 찌꺼기를 뒤집어쓴 아기와 기저귀를 찬 채 온종일 젖을 짜는 나의 모습. 임신과 출산 육아의 과정 중 그 어느 것 하나 로망과 현실이 맞닿는 곳은 없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모성애'는 무엇이었을까?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 아이를 보는 순간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느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존재. 나만 빼고 모두 공유하는 듯한 '엄마의 마음' 같았다. 그 모성애가 내게는 없었다.
*SBS 보이스(VOICE)로 들어보세요.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느꼈던 감정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었다. 인간애. 세상 밖으로 나와 숟가락질은커녕 고개조차 스스로 들 수 없는 나약한 존재에게 드는 가여움. 아기는 하나부터 열까지 부모(보호자)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서 잠드는 순간까지 아기를 돌보는 것이 나의 역할이자 책임이었다. 밀려오는 부담을 가득 안은 채 아이 돌보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수유 중에 나의 젖을 입에 문 채로 잠든 아이를 유심히 보게 됐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과 오물거리는 입술, 조그만 손으로 내 가슴을 꽉 쥔 채 잠이 든 나의 아가. 아이는 어느새 내 품을 가장 포근한 요람 삼아 편히 잠들어 있었다. 어떻게 보면 나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존재에게 사랑을 퍼붓는다는 것 자체가 매우 어색했던 것 같다. 여태껏 그 누구도 이유 없이 사랑해본 적 없던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아기는 말 한마디 없이 '엄마를 사랑하고 있다'고 느끼게 해 주었다. 내가 웃으면 따라 웃고, 내 품에 안겨 잠이 들고, 나 없이는 먹지도, 자지도, 울음을 멈추지도 않는 엄마 바라기였다. 아이에게 나는 유일하고도 가장 큰 세상이 되어 갔다.
어느덧 아이는 3살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내 볼에 뽀뽀를 하고 "고마워 사랑해"라고 말하며 내 품에 안긴다. 어찌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가슴이 저릿해 눈물이 날 정도다. 내가 그토록 바라 왔던 사랑이란 감정이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내가 아이에게서 느끼는 이 사랑에 대해 모성애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진 않다. 엄마라는 이름에 당연스럽게 따라붙는 모성애 때문에 나는 역할을 다 하고 있을 때에도 늘 부족한 부모처럼 느껴졌다. 내가 경험한 모성애는 아이를 낳는다고 바로 생겨나는 감정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나와 아이 사이에 쌓아 올린 감정의 탑 같았다. 내게 맞는 속도와 높이로 둘만의 관계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것이다.
엄마가 되고 나서 깨달은 것들이 참 많다. 그중 하나는 사회가 입혀 놓은 '엄마의 옷'이 내게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엄마다운 옷차림, 엄마의 행동거지 그리고 엄마라는 마음가짐까지 엄마에게 덧씌운 이미지가 공공연하게 존재했다. 나 역시 그런 이미지를 입어야 엄마다운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엄마답다'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그 범주 안에 들지 못한 엄마들을 비정상으로 분류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 엄마다운 것은 없었다. 나를 엄마로 인정해 주고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아이뿐이다. 나는 내 아이의 엄마이기만 하면 된다. 더 이상 다른 기준에 나를 맞추지 않기로 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내게 말을 건넬 수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처음부터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한 생명을 네 안에 품고 세상에 나오게 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을 한 거야. 모성애 없이도 잘 해내고 있어. 좋은 엄마가 될 거야."
* 편집자 주 : 이번 글은 인-잇의 정규 필진 파파제스 님의 아내 한여울 님이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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