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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아시아나항공의 불안한 내일과 '세 사람'

[취재파일] 아시아나항공의 불안한 내일과 '세 사람'
만남'은' 파격적이었습니다. 아시아나항공 인수 문제를 두고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이하 산업은행)과 정몽규 HDC현대산업개발(이하 '현산') 회장이 사실상의 마지막 담판 회담을 가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만남'만' 파격적이었습니다. 파격적인 성과는 없습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 "묻고 더블로 가자!"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 것은 이동걸 회장이었습니다. 산업은행은 현산의 아시아나항공 신주 인수 대금을 1조 원가량 낮춰주겠다는 새로운 제안을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럴 경우, 현산이 내야 할 인수 대금은 2.5조 원에서 1.5조 원대로 대폭 줄어듭니다. 대신 그만큼을 채권단이 부담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는 기존에 가진 영구채 8천억 원에 추가로 7천억 원을 더해, 1.5조 원을 부담하는 안으로 전해졌습니다. 인수했을 때 발생할 위험을 채권단이 절반가량 나눠 가지겠다는 뜻입니다. 이 비용, 물론 국민이 낸 세금입니다.

이에 대해 한 항공담당 애널리스트는 "채권단 입장은 시쳇말로 '묻고 더블로 가자'라는 것이다. 우리가 짐을 나눠 짊어질 테니 일단 인수는 해라. 경기가 좋아질 때까지 같이 버텨보자는 것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회계자문사 EY한영은 오는 2022년 초까지는 항공업 경기가 어려울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채권단 입장에서는 "경기가 나아질 것으로 기대되는 내년 연말까지 도와줄 테니, 일단 인수해서 살길을 같이 찾아보자"는 취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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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나항공, 현대산업개발

● "자꾸 틀린 질문만 하니까, 맞는 대답이 나올 리가 없잖아"

도움의 손길을 제안받은 현산. 하지만 표정은 밝지 않습니다. "입장을 밝히기 곤란하다"가 지금까지 나온 공식적인 발언입니다. 이에 대해 항공 전문가들은 산업은행이 현산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습니다. 채권단과 현산의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협상 결렬 가능성이 여전히 커 보인다는 뜻입니다.

영화 '올드보이'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영문도 모른 채 납치돼 골방에 15년이나 갇힌 한 남성. 이 남성은 납치될 때 그랬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풀려납니다. 복수를 다짐하는 이 남성에게, 그를 납치·감금했던 이는 이런 말을 전합니다. "당신의 진짜 실수는 대답을 못 찾은 게 아니야. 자꾸 틀린 질문만 하니까 맞는 대답이 나올 리가 없잖아. '왜 이유진은 오대수를 가뒀을까?' 아니라' 왜 풀어줬을까?'란 말이야."

어쩌면 정몽규 회장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허희영 항공대 교수는 "문제는 인수가 아니라 '장사'다. 인수는 어떻게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지금 상황에서 앞으로 장사가 제대로 될 것인가, (현산은) 그 점에 대해 고민이 많을 것이다. 코로나19 치료제든 백신이든 나와도, 항공 수요가 기존의 절반 이하 떨어질 거란 우려가 나오는데, 이런 상황에서 덜컥 샀다가 장사가 안되면, 그때는 그룹 전체가 위험해진다. 고민이 많을 것이다"라고 진단했습니다.

또 다른 항공 애널리스트도 "현산 입장에서 관심사는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할 수 있느냐 못 하느냐가 아니라 항공 경기가 얼마나 회복할 것인가이다. 소위 '숫자쟁이(재무담당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불확실성'이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그게(불확실성) 크다. 12주 재실사를 요청한 것도 그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석 달 뒤면 연말인데, 일단 그때까지 시간을 벌면서 경기가 얼마나 나아지는지 확인하고 인수 여부를 결정하고 싶을 것이다"라고 전했습니다.


(사진=연합뉴스)

● 새로운 변수, 재무적 투자자의 자금난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또 다른 변수는 미래에셋입니다. 앞서 미래에셋은 관광산업의 성장 가능성을 보고, 재무적 투자자로 5천억 원을 투자해 현산과 함께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나섰습니다. 이는 정몽규 회장 의지뿐 아니라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의 의중도 인수 결정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미래에셋 역시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점입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미국 내 고급 호텔 인수 문제를 놓고 중국 안방보험과 7조원 대 소송을 벌이는 등 예상하지 못한 외부 변수가 발생한 것입니다. 호텔과 항공사 동시 인수를 추진한 것은 두 업종이 낼 시너지 효과를 기대했기 때문인데, 호텔업 인수가 난항에 빠진 지금 상황에서 항공사가 매력적으로 보일 리가 없습니다. 인수에는 부정적인 변수입니다.

● 공은 다시 현산으로…협상 결렬 시, 책임은 누가?

결론적으로 공은 다시 현산으로 넘어갔습니다. 산업은행 요청에 이제 현산이 답해야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매각 협상이 결렬되면 '이행보증금 반환 소송'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협상이 무산되면, 현산은 앞서 냈던 계약금 2천500억 원을 돌려달라고 소송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에 대비해 채권단은 "우리가 이렇게 좋은 제안을 했는데도 현산이 거부해 협상이 무산됐다"라고, 결렬 책임을 현산에 떠넘길 수 있는 명분을 만들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과거 한화그룹도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포기하고 이후 9년 동안 법정 소송을 벌여 이행보증금 3천150억 원 가운데 절반 이상(1천951억 원)을 돌려받았습니다. 당시 법원이 "대우조선해양 노조에 막혀 제대로 된 실사를 하지 못했다"는 한화그룹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동걸 회장도 협상 결렬에 대비해, 현산에게 빌미를 주지 않고 법적 다툼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승부수를 던졌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사진=연합뉴스)

● 인수 의지 강조하며 추가 협상을 요청할 듯

현산은 고심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회사의 생존을 결정할 중대한 일을 며칠 만에 내리긴 어려울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현산이 인수 의지를 다시 강조하면서, 협의를 이어가자는 취지의 답을 내놓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산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채권단 입장에선 주인을 결정하지 않은 채 아시아나항공을 관리하고, 더 나이가 항공업 구조조정 계획을 잡기는 어렵습니다. 더욱이 이 회장의 임기가 오는 9월 10일까지여서, 늦어도 9월 초까지는 답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현산이 기한 안에 답을 내놓지 않으면, 채권단은 자체 경영을 골자로 하는 '플랜 B'를 곧바로 가동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소음과 분노로 가득한, 아무런 의미 없는 이야기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5막 5장)'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인생이란 한낱 걸어 다니는 그림자, 불쌍한 배우들, 무대 위에 서 있을 때는 자랑스럽게 떠들어대지만, 그다음 남은 건 고요함. 그것은 바보들의 이야기. 소음과 분노로 가득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한다(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아시아나항공 매각이라는 무대에 박삼구 아시아나금호그룹 회장, 정몽규 HDC현대산업개발 회장, 그리고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 세 사람이 섰습니다. 맥베스 대사처럼 이들은 지금까지 많은 말을 남겼지만, 결과는 역시 고요합니다. 대신 소음과 분노만 가득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들의 말은 아직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정몽규 회장은 실리와 리더십 타격 사이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눈앞의 불확실성도 예측하지 못한 채 무리한 투자에 나섰다는, 무능한 경영자라는 비판을 감수해야 합니다. 박삼구 전 회장도 핵심 계열사를 팔아야 할 정도로 경영에 실패하고도 사익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경영학 교과서에 이름이 올라갈 처지입니다. 이동걸 회장 역시 큰 '공'이 될 뻔했던 일이 자칫 큰 '과'가 될 상황에 놓였습니다. 자칫 아시아나항공이 산업은행 품에서 20년 넘게 세금으로 지원을 받은 대우조선해양의 전철을 밟을 경우, 이 회장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특정 소수의 욕심과 탐욕, 그릇된 판단이 국가 경제와 고용에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지를, 국민은 안타깝고, 부끄럽고, 참담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진 소음과 분노로 가득한 이야기가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기를, 파수꾼의 마음으로 국민은 지켜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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